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 빌 게이츠가 최근 포르쉐의 전기차 ‘타이칸’을 구입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자사 전기차를 구입하지 않은 그를 두고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비꼬았지만 빌 게이츠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전기차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기후 변화와 싸우기 위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가장 희망적인 분야”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이미 전기차는 가장 근접한 미래모빌리티로 주목받고 있다.
친환경 차량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시장은 전년 대비 10% 성장했다. 미국의 전기차 전문매체 ‘인사이드 EVs’가 순수전기차(EV),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를 대상으로 집계한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총 220만9831대. 인사이드 EVs는 “중국 시장의 수요가 하반기에 감소했지만 다른 국가의 판매가 증가하며 전체적으로 10% 성장했다”고 분석했다. 판매량 1위를 차지한 브랜드는 미국의 테슬라로 전 세계 시장에서 총 36만7820대를 판매하며 수위에 올랐다. 2, 3, 4위는 중국의 비야디(BYD·22만9506대)와 베이징자동차(BAIC·16만251대), 상하이자동차(SAIC·13만7666대)가 차지했다. 5위는 독일의 BMW(12만8883대)가, 그 뒤를 폭스바겐(8만4199대), 닛산(8만545대), 중국의 지리자동차(Geely·7만5869대)가 뒤쫓았다. 국내 완성차 브랜드인 현대차(7만2959대)와 기아차(7만2959대)는 각각 9위와 11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면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전기차의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 국내 완성차 브랜드 5개 업체의 모델을 기준으로 지난해 국내에서 판매된 순수전기차(EV)는 총 2만9683대였다. 전체 승용차 판매량이 129만2850대였으니 2.6% 수준이다. 높아진 관심에 비해 판매량은 아직 미미한 게 사실. 그렇다면 내연기관 대신 전기모터로 엔진이 대체되는 진정한 전기차 대중화 시대는 언제쯤 가능한 걸까.
▶2020년은 전기차 대중화 원년?!
자동차 업계 관계자들은 “올해가 전기차 대중화의 원년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배출가스 규제를 대폭 강화하자 완성차 업체들이 친환경차 라인업을 빠른 속도로 늘리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전기차 대중화를 이끌고 있는 국가는 2020년을 기점으로 환경규제를 강화한 유럽연합(EU)이다.
EU는 2018년 12월 파리기후협약에 따라 오는 2030년까지 승용차의 이산화탄소(CO2) 배출량을 37.5%나 감축하기로 결정했다. 차량당 CO2 배출 허용량을 올해부터 95g/㎞(기존 130g/㎞)로 줄이고, 2023년 62g/㎞, 2050년엔 10g/㎞로 줄이는 규제정책을 시행할 계획이다. 출시된 완성차가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초과한 CO2 배출량과 판매량을 계산해 차량 한 대당 95유로의 벌금을 물게 된다. 친환경차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이 현실로 다가오자 글로벌 완성차 업계도 EU 규제에 발 맞춰 내연기관을 버리고 전기차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우선 독일의 폭스바겐은 “2026년부터 새로운 내연기관 엔진 개발을 중단하고 2040년부터 내연기관차를 판매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메르세데스-벤츠도 친환경차 정책인 ‘앰비션(Ambition) 2039’를 공개하고 “향후 20년 내에 모든 차량을 친환경차로 바꾸겠다”고 공언했다. 벤츠는 2039년까지 생산차량의 절반 이상을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수소차 등 친환경차로 생산할 계획이다. 스웨덴의 볼보는 올해부터 단계적으로 내연기관 자동차의 생산을 중단하고 신차는 전기차 모델만 생산한다. 일본의 토요타도 내년 초 전기차 전용 ‘e-TNGA’ 플랫폼을 기반으로 6종의 순수 전기차를 선보이고, 2025년부터 내연기관차 생산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폭스바겐의 ID. 스페이스 비전
전기차 비중을 높이는 완성차 브랜드도 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내년부터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 탑재 모델을 출시한다. 이를 기반으로 2025년까지 전기차 모델을 29종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푸조와 시트로엥을 생산하는 프랑스의 PSA그룹은 올해 전 차종의 약 50%를 전기차로 구성하기로 했다. 인도 타타그룹의 계열사인 재규어랜드로버도 올해부터 모든 차종에 전기차 모델을 갖추기로 했다. 그런가 하면 전기차 브랜드 테슬라는 지난해 10월 가동하기 시작한 중국 상하이 공장에서 올해부터 연간 50만 대의 차량을 생산할 계획이다. 업계에선 테슬라의 전기차 판매량이 2021년에 100만 대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기차는 석유 연료와 엔진을 사용하지 않고 배터리에 축적된 전기에너지로 모터를 회전시켜 구동한다는 면에서 가장 현실적인 친환경차로 떠올랐다. 국내 수입차업계의 한 관계자는 “전기차는 그 동안 내연기관차에 비해 비싼 가격과 충전 인프라 등 편의성 문제로 보급이 활발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라며 “세계 각국의 친환경 정책과 완성차 업체들의 개발 경쟁이 가속화되며 이젠 대중화가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전했다.
현대 모터스튜디오 고양에 설치된 전기차 초고속 충전 설비 하이차저(Hi-Charger)
▶10만 대 돌파한 국내 친환경차 시장, 올해 더 치열해져
지난해 국내 완성차 업체가 내수 시장에서 판매한 친환경차는 총 11만219대(한국자동차산업협회 집계)로 처음으로 10만 대를 넘겼다. 전년(9만3051대) 대비 18.5% 증가한 수치다. 유형별로는 하이브리드차(HEV)가 7만5966대로 전년 대비 68.9% 성장했고, 순수 전기차(EV) 2만9683대로 전년 대비 0.8% 늘었다. 그 외 수소전기차(FCEV·4194대)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PHEV·376대)가 뒤를 이었다. 점유율로 보면 HEV가 전체 친환경차의 68.9%를 차지했고, EV가 26.9%, FCEV 3.8%, PHEV 0.3% 순이었다.
업체별로는 현대차가 9종, 6만4353대의 친환경차를 판매해 58.4%의 점유율을 차지했고, 기아차가 5종, 3만9211대로 점유율 35.6%를 기록했다. 현대·기아차 합산 점유율이 94%로 현대차그룹이 국내 친환경차 시장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는 이러한 독주 체제에 다양한 수입차가 가세하며 도전장을 내밀 전망이다. 우선 르노삼성이 유럽에서 전기차 누적 판매량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소형전기차 ‘조에(ZOE)’의 3세대 모델을 수입 판매한다. 아우디, 포르쉐, 푸조 등 수입차 브랜드도 전기차 모델 출시를 예고하고 있다. 아우디는 올 상반기에 브랜드 최초의 양산형 전기차 ‘e-트론’을 국내시장에 선보인다. e-트론은 국제표준주행모드(WLTP)로 400㎞ 이상 주행이 가능하며 상시 사륜구동 시스템이 적용됐다. 포르쉐는 올 하반기에 순수 전기 스포츠카 ‘타이칸’을 출시한다. 800V(볼트) 전압 시스템을 탑재해 5분간 급속 충전으로 최장 100㎞를 주행할 수 있고, 제로백이 2.8초에 불과한 차량이다. PSA그룹은 상반기에 푸조 e-208, 푸조 e-2008, 하반기에 DS3 크로스백 E-텐스 등 전기차 3종을 출시할 계획이다.
LG화학 오창 전기차배터리 라인에서 연구원들이 배터리를 살펴보고 있다.
▶3세대 전기차 시장 선점 경쟁
여기서 잠깐, 그런데 현재 진일보한 전기차의 1회 충전 시 주행거리는 400㎞ 남짓이 전부인 걸까. 올 1월 출시된 현대차의 최신모델인 2020년형 전기차 ‘코나 일렉트릭’의 1회 충전 시 주행거리는 406㎞, 한국GM의 대표 전기차 쉐보레 ‘볼트 EV’도 2020년형 모델도 414㎞가 최장거리다.
최근 완성차와 배터리 기업들이 속속 1회 충전에 500㎞ 이상 주행할 수 있는 ‘3세대 전기차’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전기차는 개발 단계와 기능에 따라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구간으로 나뉜다. 초기 전기차가 1세대다. 국내 완성차 모델을 예로 들면 현대차의 ‘아이오닉 일렉트릭’(200㎞), 기아차의 ‘쏘울EV’(180㎞), 르노삼성의 ‘SM3 ZE’(213㎞) 등이 그 주인공이다. 대부분 1회 충전 시 주행거리가 200㎞ 이하여서 서울에서 수도권까지 운행에 적합했다. 2세대 전기차로 진화하며 현대차의 ‘코나 일렉트릭’(406㎞), 기아차의 ‘쏘울 부스터 EV’(386㎞), 쉐보레 ‘볼트 EV’(414㎞) 등이 출시됐다. 1세대에 비해 배터리 용량은 2배가량 늘었고 주행거리도 400㎞를 넘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1회 충전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운행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급속 80% 충전에 약 1시간이나 걸리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업계에선 3세대 전기차가 개발되면 1회 충전으로 500㎞ 거리를 이동할 수 있어 서울~부산 간 이동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지난 1월 14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기관투자가·신용평가사·애널리스트 등을 대상으로 한 ‘CEO 인베스트 데이’를 개최한 기아차가 “내년에 1회 충전 500㎞ 이상, 20분 이내 고속충전이 가능한 전기차 전용 모델을 출시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연장선이다. 미국의 테슬라가 올해 생산하는 ‘모델Y’의 주행거리도 약 506㎞. 물론 배터리 성능이 관건이다. 완성차 브랜드가 직접 배터리 제조에 뛰어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폭스바겐과 토요타는 지난해부터 직접 배터리 제조에 뛰어들었다. 폭스바겐은 이 분야에 10억달러(약 1조1900억원) 투자를 결정했고, 토요타와 파나소닉의 배터리 합작사 PEVE는 대규모 공장 증설을 발표했다.
테슬라가 직접 배터리 제조에 나선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테슬라는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프레몬트 공장에서 자사가 개발한 배터리를 시범 생산하기 위한 라인을 구축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테슬라는 그동안 파나소닉으로부터 배터리를 공급 받아왔지만 최근 LG화학, 중국의 CATL과 공급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여기에 자체 생산을 준비하며 배터리 수급 다변화에 나서고 있다.
국내 배터리 제조사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12월 GM과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하고 최근 미국 오하이오에 63만9000㎡ 규모 공장용 부지를 매입했다. 올 상반기에 착공할 예정이다. 이 공장에선 연간 30GWh 규모 배터리를 생산, GM에 공급할 계획이다. 전기차 40만 대에 탑재가 가능한 양이다. 삼성SDI는 2021년까지 1회 충전 시 600㎞ 이상 달릴 수 있는 배터리를 양산할 계획이다. 김헌준 삼성SDI 전지사업 전략마케팅 상무는 지난 1월 30일 열린 지난해 4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2021년부터 생산돼 BMW에 공급할 ‘젠5(5세대) 배터리’는 니켈 함량 80%에 배터리를 효율화하는 신공법도 도입할 예정”이라며 “완성차 업체 입장에선 1회 충전 시 주행거리를 600㎞ 이상으로 늘릴 수 있어 전기차 보급 확대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도 내년 하반기에 완공될 미국 조지아의 글로벌 생산거점에서 2022년부터 3세대 전기차 배터리를 양산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