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인공지능(AI)’ 기업이라는 자리를 놓고 한국의 대표 IT 기업들이 맞붙었다.
오픈AI의 ‘GPT’나 앤스로픽의 ‘클로드’처럼 한국도 글로벌 수준의 AI 파운데이션 모델을 확보하기 위한 정부 프로젝트가 닻을 올린 것이다. AI 기술이 국가의 전략 자산 수준으로 중요성이 급증한 가운데, 우리도 기술 자립과 주권 확보 차원에서 경쟁력 있는 자체 모델 기술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다.
통신사부터 플랫폼 기업, 게임사, 학계와 스타트업 등 주요 기업과 기관이 모인 15개의 컨소시엄이 뛰어들었고, 경쟁을 통과한 5곳의 정예 팀이 8월 발탁됐다.
선발된 5곳은 네이버클라우드, 업스테이지, SK텔레콤, NC AI, LG AI연구원이다. 이들은 컨소시엄을 이끌며 AI 모델 개발과 확산을 이끌게 된다. 주관사 외에도 리벨리온과 같은 반도체 기업부터 유수의 AI 스타트업들, 게임사 크래프톤 등 쟁쟁한 기업들이 서로 다른 컨소시엄에 합류해 주관사에 힘을 보탠다.
선발된 곳들은 올해만 2000억원 규모의 정부 지원을 받으며 한국만의 경쟁력을 갖춘 독자 모델 개발에 돌입한다. 이번 하반기에는 5개의 팀이 선발됐지만 ,앞으로는 반기마다 평가를 통해 한 팀씩 탈락하게 되면서 2027년에는 최종 2개의 팀으로 압축되게 된다.
지난 6월 공모를 시작하면서 첫발을 뗀 위 프로젝트의 이름은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키를 잡고 운영하는 정책이다.
올해 초 혜성같이 등장한 중국의 딥시크가 글로벌 수준의 성능을 보여주며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뒤로, AI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도 뒤처지지 않으려면 인프라와 인재 등을 집중적 지원해 격차를 따라잡아야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대규모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시킨 원천 모델로, 범용 적용이 가능하면서 다양한 영역으로도 맞춤화해 활용할 수 있는 AI 모델을 일컫는다. 한번 개발해 확보해두면 빠르게 응용하고 확산할 수 있어 매우 유용하다.
정부는 평가를 거쳐 선발된 정예 팀에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같은 인프라, 모델 구축을 위해 필요한 데이터와 인재 확보를 지원한다. 평가에는 독자 모델 구축 역량 뿐만 아니라 향후 모델 공개를 통한 AI 확산과 국내 생태계에 대한 기여도, 국산 반도체 활용을 통한 소버린 AI 구현 계획 등이 종합적으로 반영된다.
2027년까지 5000억원 이상을 투입할 예정인 정부는 올해 하반기에만 약 2000억원 규모를 지원한다.
데이터 확보를 위한 628억원 지원과 함께 인재 영입에 250억원을 지원하고,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확보해 지원하는 데만 약 4000억원 이상을 투입한다.
정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각종 벤치마크 테스트에서 해외 AI 모델의 95% 이상의 수준을 보여줄 수 있는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을 목표로 내걸었다. 올해 하반기에는 5개의 정예 팀을 선발했으며, 향후 단계 평가를 통해 반기마다 정예 팀을 압축해 2027년 상반기에는 2곳만 남게 된다.
선발된 5개의 정예팀들은 정부로부터 ‘K-AI 기업’과 ‘K-AI’ 모델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부여받게 된다. 인프라 혜택뿐만 아니라 국가대표 AI로서 기술력을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 많은 기업의 프로젝트 참가 배경이 되기도 했다.
우선 각각 ‘하이퍼클로바X’ ‘엑사원’이라는 자체 초거대 모델을 개발했던 네이버클라우드 컨소시엄과 LG AI연구원 컨소시엄이 한자리씩 차지했다.
네이버클라우드는 자체 모델을 처음부터 개발하고 꾸준히 고도화해온 몇 안 되는 국내 기업으로 꼽힌다. 컨소시엄에는 주관사인 네이버클라우드와 함께 네이버 본사도 참여하며, 영상 AI 모델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트웰브랩스가 합류했다. 또한 서울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포항공대, 고려대, 한양대 등 국내 유수 대학의 연구팀이 참여한다.
네이버의 강점은 뛰어난 한국어 성능에서 국내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하이퍼클로바X’와 올해 6월 공개한 추론 모델 ‘하이퍼클로바X 씽크’ 등 강력한 모델과 기술력을 갖췄다는 데 있다. 여기에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한국 대표 스타트업 중 하나인 트웰브랩스를 통해 영상 AI 역량까지 보완했다. 또한 네이버는 직접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AI 인프라를 구동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차별점이다.
네이버 컨소시엄은 이 기술들을 결합해 텍스트·이미지·오디오·비디오 등 모든 형태의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생성하는 ‘옴니(Omn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을 목표로 내걸었다. 글로벌에도 진출이 가능한 수준의 완성형 멀티모달 AI를 선보이면서, 국내에서는 전 국민이 경험할 수 있는 AI 서비스를 제공해 생태계에 기여한다는 계획이다.
LG AI연구원은 LG그룹의 AI 싱크탱크이자 원천 기술 개발을 총괄하는 기업이다. 모델 ‘엑사원’ 시리즈를 지속 개발하면서 글로벌 비영리 연구기관인 ‘에포크AI’가 선정하는 ‘주목할 만한 AI 모델’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등 국제 무대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LG AI연구원이 이끄는 컨소시엄에는 LG CNS, LG유플러스와 같은 LG 계열사부터 유망한 AI 스타트업이 다수 포진해있다. 컨소시엄 참여사들과 함께 LG AI연구원은 한 단계 더 발전시킨 ‘K-엑사원’이라는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하고, 로봇과 같은 물리 세계까지 AI를 접목하는 ‘피지컬 AI’를 구현한다는 것이 목표다.
AI 인프라부터 데이터 수집 단계에서는 퓨리오사AI, 프렌들리AI 등의 기업이 역할을 하게 되며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서비스 영역에서는 뤼튼테크놀로지스, 이스트소프트, 한글과컴퓨터처럼 이미 AI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구성사들이 활용 사례를 만들어 갈 예정이다. 다양한 산업 영역에 있는 LG 계열사들과 협력한다는 점도 LG AI 연구원만의 강점이다.
SK텔레콤의 경우 자체 개발한 모델인 ‘에이닷엑스(A.X) 3.1’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한국 대표 AI 반도체 기업 중 하나인 리벨리온과 협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AI 반도체에서는 리벨리온과 퓨리오사가 스타트업의 두 축으로 꼽히는데, 퓨리오사는 LG AI연구원 컨소시엄에, 리벨리온은 SKT에 합류했다.
SKT가 강조한 것도 반도체부터 모델, 데이터, 서비스로 이어지는 ‘풀스택 AI’다.
모델 단에는 SKT를 주축으로, 음성과 영상 등 멀티모달 기술력을 갖춘 게임사 크래프톤이 힘을 더한다. 또한 서울대학교와 KAIST, 위스콘신 메디슨대학교 연구진이 원천모델 개발에 참여해 독자 모델을 구축할 예정이다.
게임사 엔씨소프트의 AI 전문 자회사인 NC AI는 14년간 축적한 연구개발 역량을 집대성해 국가대표 AI 개발에 나선다. 엔씨소프트는 게임사 중에서도 일찌감치 AI 전담 조직을 꾸리고 자체 모델인 ‘바르코(VARCO)’를 개발하는 등 AI 연구를 시작한 기업이다.
컨소시엄에는 NC AI를 중심으로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등 국내 대학 및 연구기관과 함께 포스코DX, 롯데이노베이트 등 주요 대기업 그룹사들이 참여한 것이 특징이다.
모델 측면에서는 멀티모달 모델인 ‘바르코’를 가진 NC AI를 주축으로 글로벌 최고 성능 수준의 2000억파라미터 크기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들겠다는 것이 이 컨소시엄의 목표다.
또한 다양한 도메인으로 파운데이션 모델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도메인옵스(DomainOps) 플랫폼을 직접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NC AI는 또한 음성 합성, 얼굴 모션 애니메이션 등 AI 모델 기반의 다양한 응용 기술력으로 패션, 미디어 등의 산업에서 활용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롯데, 포스코의 그룹사 등 다양한 산업으로 확장을 맡게 될 기업들이 참여하면서 54개 기업의 커다란 연합체를 구성했다.
자체 모델 ‘솔라’를 개발한 기업이자 유일하게 스타트업 주관사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업스테이지가 마지막 컨소시엄이다. 컨소시엄은 업스테이지를 중심으로 GPU 가상화 기술을 보유한 래블업, AI 모델 경량화 전문 스타트업 노타, 데이터 기업 플리토 등 인프라부터 데이터까지 다양한 기술을 갖춘 스타트업들이 대거 포진했다.
또한 제조 분야에 특화된 마키나락스, 의료의 뷰노, 법률의 로앤컴퍼니 등 각 산업에 특화된 AI를 제공할 수 있는 스타트업들이 참여하며 금융 영역을 맡게 될 금융결제원도 컨소시엄 구성사다.
업스테이지는 대기업 대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지만, 글로벌 모델 벤치마크에서 종합 점수 12위로 10위권 성적을 보여주는 등 다른 컨소시엄에 밀리지 않는 모델 경쟁력을 갖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히 세계 수준 모델 개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개방하고 한국의 산업 전반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렇다 보니 참여하는 기업들은 자사 기술력을 뽐내고,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자사 모델들을 오픈소스로 대거 공개하고 있다. 5개의 정예 팀으로 선발된 기업들은 물론이고 선정 과정 중에서 탈락한 KT나 카카오와 같은 기업들도 일부 모델을 개방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예팀 선정 과정에서는 기술력뿐만 아니라 오픈소스 공개 여부와 같은 생태계 기여 측면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 AI 업계에 훈풍이 불고 있는 만큼 실질적인 기술력 확보와 기업들의 성장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모양새다.
[정호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