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달러’의 시대다. 미국 달러화의 일방적인 강세가 지속되면서 원화를 포함한 주요국 통화 가치가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다. 미국과 패권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달러 대비 위안화 가치가 급락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9월 말 위안화 환율은 역외 시장에서 7.2위안대로 치솟으면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환율이 급등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위안화 가치가 크게 하락했다는 의미다. 이후 10월에도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은 7위안대에 머물면서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중국 외환 시장에는 ‘포치(破七)’라는 용어가 있다. 포치는 ‘깨뜨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파(破)와 숫자 칠(七)이 결합된 단어로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이 7을 넘어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용어가 생긴 건 중국 외환 시장에서 7위안을 심리적 지지선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이 7위안을 넘어서는 건 외환 시장이 지나치게 불안정해졌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당국은 평소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이 7위안을 넘지 못하도록 시장 개입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한다. 하지만 올해 하반기 들어 포치 시대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위안화 가치 하락은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먼저 중국 당국은 긴축을 추진하는 미국과 달리 오히려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펼쳤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사실상 기준금리 역할을 하는 1년 만기 대출우대금리(LPR)를 올해 들어서만 2차례 인하했다. 올해 1월 인민은행은 1년 만기 LPR를 전월보다 0.1%포인트 낮췄고 8월에도 0.05%포인트 내렸다.
이강 중국 인민은행장은 지난 7월 온건한 통화정책의 시행 강도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며 실물 경제를 위해 더욱 강력한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사진 연합뉴스>
기준금리 제도가 없는 중국에서는 인민은행이 매달 중국 내 18개 시중은행이 보고한 최우량 고객 대출금리를 취합해 평균을 내는 LPR를 통해 시장금리를 조정하고 있다. 세계적인 긴축 흐름과 달리 중국이 1년 만기 LPR를 올해 들어서만 0.15%포인트 낮춘 것은 중국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유동성 확대를 통해 적극적인 경기 부양에 나설 필요성이 컸다는 얘기다. 제로코로나 정책으로 인한 도시 봉쇄,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인한 글로벌 시장 수요 감소 등으로 올해 중국 성장률은 3% 안팎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정부가 제시한 목표치(5.5%)에 크게 못 미치는 수치다. 세계은행은 1990년 이후 32년 만에 중국의 성장률이 아시아 개발도상국 평균(5.3%)에 뒤지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의 돈 풀기는 경색된 부동산 시장에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측면도 강하다. 인민은행이 주택담보대출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5년 만기 LPR를 올해에만 3차례 인하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중국 당국의 잇단 금리 인하로 미중 금리 차는 계속 축소됐다. 이로 인해 과거 금리가 높은 중국 시장을 택했던 외국인 자금이 다시 중국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중국 금융 당국 통계에 따르면 외국인은 지난 2월부터 8월까지 역대 최장 기간인 7개월 연속 중국 채권을 순매도했다. 누적 순매도 규모는 5000억위안(약 100조원)에 달한다.
여기에 달러 확보 1등 공신이었던 수출마저 흔들리고 있다. 중국 수출 증가율은 제로코로나로 인한 상하이 도시 봉쇄 등의 충격으로 4월 3.9%로 급락했다가 5월 16.9%, 6월 17.9%, 7월 18%로 회복했다. 하지만 8월에 다시 한 자릿수인 7.1%로 급락하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여줬다. 로이터는 “올해 초만 해도 수출은 중국에서 전망이 밝은 몇 개 안 되는 분야 중 하나였지만 글로벌 수요 둔화 속 하반기에는 빠른 속도로 둔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시장에서는 이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2015~2016년 같은 위안화 가치 급락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영국 바클레이스의 보고서를 인용해 “달러당 위안화 환율이 7.5위안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위안화 환율이 급등하면서 중국 당국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지난 9월 5일 외화 지급준비율을 8%에서 6%로 2%포인트 인하한 인민은행은 3주 후 선물환에 대한 위험준비금 비율을 0%에서 20%로 상향 조정하는 조치를 내놨다. 이로 인해 금융기관들이 위안화 선물환을 거래할 때 위험 증거금으로 거래액의 20%를 인민은행에 무이자로 예치해야 한다. 외환 선물환에 대한 위험준비금 비율 상향은 선물거래로 향후 위안화 가치 하락에 베팅하는 데 필요한 기회비용을 증가시키는 만큼 위안화 가치를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으로 평가된다.인민은행은 또 위안화 환율 방어를 위해 주요 국영 은행들에 역외 시장에서 달러를 매도하라고 주문했다. 달러 매도와 위안화 매수가 동시에 진행되면 위안화 가치 급락세를 안정시킬 수 있다.
▶3조원 외환보유고에도 위안화 가치 급락
전문가들은 이제부터 진짜 미중 간 환율전쟁이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승패는 장담하기 힘들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은 이미 한 차례 투기세력과의 환율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을 갖고 있다.
2016년 헤지펀드업계 대부로 불리던 조지 소로스는 위안화 가치 하락에 거액을 베팅했다. 당시 소로스가 공개적으로 위안화 가치 하락에 베팅하자 다른 헤지펀드들도 속속 소로스의 위안화 공격에 동참하면서 중국 대 헤지펀드 업계 간 환율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인민은행은 ▲외환보유고 활용 ▲은행과 개인의 달러 관련 거래 제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중국 채권 시장 참여 확대 등의 방법을 총동원해 위안화 가치가 달러당 7위안을 넘지 못하도록 막아냈다. 중국 금융당국은 이번에도 위안화 하락에 베팅하는 투기세력에 대한 경고를 내놨다.
인민은행은 홈페이지에 게재한 보고서를 통해 “현재 외환 시장 운영은 전반적으로 규범적이고 질서 있지만 소수 기업은 외환 투기를 하고 금융기관의 규정을 위반하고 있다”며 “위안화 환율의 상승 또는 하락 일변도에 베팅하지 말라. 장기간 돈을 걸면 반드시 잃는다”고 밝혔다. 중국은 또 3조원이 넘는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다. 중국 외환 당국이 “외환보유액이 충분한 상황이어서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공언하는 이유다.
하지만 여전히 시장은 위안화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긴축 흐름에 대응해 금리를 올리기도 힘든 상황이다. 금리 인상에 나설 경우 부동산 시장 자체가 붕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강달러를 이용해 중국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음모론’도 제기된다. 기축통화인 달러에 대항하는 중국 위안화 흐름에 세계 금융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