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팬데믹은 올해 미술시장을 집어삼켰다. 올 3분기까지 국내외 각종 전시회와 아트페어는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미술계의 성수기인 봄(3~5월)은 그렇게 사라졌다. 팬데믹과 함께 불어 닥친 경기침체의 그늘에 글로벌 미술시장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 그만큼 미술품은 경기에 민감하다. 수년 전부터 성장이 침체됐던 국내 미술시장도 마찬가지. 가장 먼저 식고 또 가장 더딘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렇다고 시장의 숨이 멎은 건 아니다. 한숨만 쉬고 있던 미술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은 건 온라인(On-Line)이었다. 국내 미술품 경매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서울옥션은 코로나19 영향에 올해 홍콩 경매가 취소되자 세계적인 아트 플랫폼인 아트시(Artsy)와 함께 3차례에 걸쳐 온라인 경매를 진행했다. 올 1∼7월 서울옥션 온라인 경매에 출품된 작품은 1410개, 낙찰된 작품은 1133개나 된다. 서울옥션이 지난해부터 진행 중인 제로베이스 경매도 주목받고 있다. 그동안 시장에 소개되지 않았던 작가들의 작품을 엄선해 0원부터 경매가 시작되는 방식이다. 갤러리 데뷔가 힘들었던 신진 작가에겐 새로운 기회가, 컬렉터에겐 원하는 작가의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수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다.
케이옥션도 지난 10월 20일 국내 최초로 무관객 비대면 실시간 경매인 ‘라이브온 경매’를 진행했다. 기존 경매와 같이 경매사의 진행으로 서면과 전화 응찰은 유지되지만, 고객이 현장에서 참여하는 현장 응찰이 없었다. 서면과 전화 응찰 이외에는 모두 온라인으로 대체됐다.
온라인 전시와 경매가 새로운 미술시장의 플랫폼으로 떠오르자 부유한 밀레니얼 세대가 새로운 고객으로 떠올랐다.
코로나19의 유행이 본격화되던 지난 3월, 스위스 미술품 거래 박람회 기업 아트바젤과 금융그룹 UBS가 공동 발표한 ‘2020 세계 미술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가 세계 고액 자산가 컬렉터 가운데 49%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싱가포르, 홍콩, 대만 등 7개국 고액 자산가 컬렉터 1300명(평균 76작품 소장자)을 설문조사한 결과다. 밀레니얼 세대 다음으로는 X세대(39~54세) 33%, 베이비부머 세대(55~74세) 12%, Z세대(22세 이하) 4%였다. 밀레니얼 고액 자산가 컬렉터는 지난 2년 동안 1인당 평균 300만달러(약 37억원)를 미술품 구매에 썼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6배가 넘는 지출이다.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시점에 다시 살펴본 보고서는 미술시장의 예견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달의 미술시리즈 ‘당신이 아는 미술, 시장이 아는 미술’은 온라인으로 이동한 글로벌 미술시장을 조명했다. 누군가에겐 분명 새로운 기회가 될 시기이자 시장이다.
서울옥션이 진행한 온라인 전시 및 경매
언택트 시대의 미술시장
온라인으로 이동한 예술
글 윤현식 서울옥션 스페셜리스트
글로벌 미술시장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코로나19로 갑작스럽게 시작된 언택트(Untact·비대면) 시대에서 미술시장은 온라인으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한 2월 이후 거의 모든 국내 및 해외 미술 기관은 잠정 휴관을 결정했고, 아트페어, 비엔날레 등 대부분의 예술행사들이 취소 혹은 연기되었다. 그중 예술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아트 바젤(Art Basel)’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트페어로 미술계의 흐름과 최신 경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행사이다.
컬렉터들이 작품을 직접 대면할 수 없게 되자, 아트 바젤은 온라인 뷰잉룸(Online Viewing Room) 플랫폼을 선보였고, VIP 프리뷰 오픈 전부터 접속이 지연될 정도로 전 세계 관객의 폭발적 관심과 기대를 이끌었다. 가고시안 갤러리(Gagosian)는 프리뷰가 시작되고 30분 만에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2019년작 <The Other Side of the Oil Stain>을 120만유로에 판매해 주로 중저가 시장에 머물러온 온라인 미술시장의 판도를 바꿔놨고, 온라인 미술시장으로서의 전환 및 가능성을 보여줬다.
지난해 6월 열린 스위스 아트 바젤
미술시장 전체의 매출액은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온라인을 통한 거래규모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앞으로 꾸준한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An ART BASEL+UBS Report’에서 발표한 ‘미술시장 2020(The Art Mar ket 2020)’에 의하면 2019년 세계 미술시장은 641억달러(약 76조원) 규모였으며, 전년 대비 5% 정도 줄어들어 2017년 수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온라인 시장의 확장으로 인해 미술품 거래량은 4550만 건으로 전년 대비 2% 증가해 2010년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온라인으로 미술작품을 구매하는 것은 일상적인 온라인 쇼핑 경험과는 차이가 있지만, 4차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다양한 플랫폼과 콘텐츠들로 인해 밀레니얼 세대와 기존의 컬렉터 층이 많이 유입되고 있다.
특히 부모 세대에 비해 무려 평균 6배 더 많은 지출을 하는 부유한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과 함께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미술품을 사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며 92%가 이미 온라인 거래로 미술품을 구매해 본 적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온라인 경매로 미술 분야와 비미술(주얼리, 시계, 와인, 위스키 및 가구 등) 분야의 범위가 더 커지고 있고, 이는 앞으로 세대교체의 변화와 새로운 고객들의 유입으로 다양한 문화 소비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옥션 온라인 프라이빗 세일 강세, 온라인 경매 강화
물리적인 공간에서 경매를 진행할 수 없게 되자, 옥션 하우스들은 온라인 공간으로 경매를 끌어들였다. 온라인으로만 진행되는 경매와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의 글로벌 라이브 경매 ‘스트리밍(생중계)’을 진행하는 등 여러 플랫폼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된 변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고 준비돼 왔던 것인데, 전염병 위기가 그 변화를 더 빠르게 촉진시켰고 온라인 프라이빗 세일(Private Sale)과 경매의 확대, 도록 발행 부수 축소, 젊은 신흥 컬렉터의 유입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올 상반기에는 세계 3대 경매회사로 꼽히는 크리스티(Christie’s), 소더비(Sotheby’s), 필립스(Phillips) 등 3개사가 모두 131개의 온라인 경매를 진행하였고 이는 2019년과 비교했을 때 약 2배가량 증가한 수치다. 매출 면에서도 월등하다. 온라인 경매 매출은 작년에 비해 475%나 증가해 약 1억864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특히 소더비의 생중계 경매가 큰 화제가 되었다. 응찰자, 경매 회사직원, 관람객으로 북적이던 코로나19 이전의 경매 현장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런던 소더비 스튜디오에서 경매사인 올리버 바커(Oliver Barker)가 뉴욕, 홍콩, 런던에서 전화로 접수되는 응찰과 온라인 비딩 현황을 모니터로 확인하면서 경매를 진행했다. 총 낙찰금액은 3억6300만달러(약 4536억원)에 달했고 93%의 높은 낙찰률을 기록했다.
최고가로 낙찰된 작품은 현대 미술시장에서 최고의 스타 작가로 인정받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1981년작<Triptych Inspired by the Oresteia of Aeschylus>로 8460만달러(약 1015억원)에 팔렸다. 이번 소더비 경매는 코로나19 유행 이후 세상의 많은 것들이 바뀌어 나가는 것처럼 미술시장도 변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것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온라인 경매와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미술시장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국내 최초 미술품 경매회사 서울옥션은 세계적인 아트플랫폼인 아트시(Artsy)와 협업하여 온라인 경매를 진행했다. 전시장에 오지 않더라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VR 전시장을 오픈하여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러한 결과로 해외 신규 컬렉터들의 진입과 한국작가의 작품들을 세계에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갤러리들의 새로운 세일즈 시도
옥션 하우스뿐만 아니라 갤러리들도 온라인 세일 호응도가 높아지고 있다. 가고시안(Gagosian), 데이비드 즈위너(David Zwirner), 하우스&워스(Hauser & Wirth) 등 세계적인 갤러리들은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6개의 온라인 세일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지난 6월, 제프 쿤스(Jeff Koons)의 <Balloon Venus Lespugue(Red)>가 800만달러(약 97억원)를 기록하며 온라인 세일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제프 쿤스 <Balloon Venus Lespugue(Red)
▶가고시안 갤러리(Gagosian)
가고시안은 #GagosianSpotlight라는 테마로 온라인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한 명의 아티스트를 골라 48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에만 가격을 공개, 하나의 작품을 선보인다. 매주 금요일 새벽 6시, 온라인에 아티스트의 작품을 하나만 공개해 경매에 내놓는 형태로 게릴라 식의 새로운 세일즈 형태를 시도하고 있다.
올 가을 두 번째 시즌, 2020년 9월 16일부터 에드 루샤(ed Ruscha)를 선두로 존 커린(John Currin), 다카시 무라카미(Takashi Murakami)가 차례대로 나왔다.
▶페로탱 갤러리(Perrotin)
페로탱 갤러리는 인스타그램 계정인 @perrotinstore를 통해 갤러리 소속 아티스트들의 1만달러 이하의 원화나 프린트, 책 등을 선보인다.
일본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굿맨 갤러리(Goodman Gallery)
팬데믹 사태에 대응하면서 사회에 이바지하는 전략을 선택한 케이스도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케이프타운과 영국 런던에 위치한 굿맨 갤러리(Goodman Gallery)는 비영리 의원들을 후원하기 위해 아티스트가 디자인한 텍스타일 작품들을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선보인다. 모두 500유로로 책정되어 모든 수익금은 요하네스버그의 비영리 헬스케어 의원인 Witkoppen Health & Welfare Centre에 기부된다.
▶리손 갤러리(Lisson Gallery)
리손 갤러리는 앱을 론칭하여 아트 컬렉터들 집에 어떤 작품이 어울릴지 증강현실 기술을 통해 ‘Try Out’ 해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사실 팬데믹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많은 갤러리들이 선보이기도 했지만 리손은 증강현실 회사와 협업하여 올 4월에 재출시했다.
이젤(사진 이젤 홈페이지)
▶이젤(Eazel)
2015년 설립되어 서울과 뉴욕, 홍콩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이젤은 VR(가상현실) 기술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플랫폼이자 아트마켓 플랫폼이다.
이젤은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 등의 전시와 작가의 스튜디오 공간을 촬영한 VR 영상과 이미지, 각 기관의 정보와 전시를 기록하고 전시 경험을 공유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 각지에서 방문자 수가 급증했다. 모바일 앱도 함께 론칭하여 뉴욕의 블루칩 갤러리와 한국의 갤러리가 대거 이젤에 합류하고 있다.
서울 팔판동에 자리한 페로탱 갤러리 서울
▶디지털화되면서 더 개방된 미술시장
갤러리들이 온라인 뷰잉룸을 선보이면서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공개되지 않았던 정보들이 대중적으로 공개되고 있다.
그동안 미술시장에서 작품가격은 철저히 고객에게만 전달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온라인을 통해 대중적으로 가격을 공개하였다. 이는 미술시장이 가지고 있던 투명성이 한 단계 진보한 것을 의미하며, 새로운 형식의 세일즈를 보여준다. 또한 작가의 부가 정보, 텍스트, 사진, 동영상, 오디오, 팟캐스트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작가를 소개하고 대중들이 원하는 트렌디한 방식으로 풀어내 대중들과 같이 호흡하고 있다.
굿맨 갤러리(사진 아트 바젤 홈페이지)
또한 SNS 플랫폼인 인스타그램은 단순히 SNS를 넘어선 ‘온라인 갤러리’로 확장되고 있으며 마케팅의 수단 및 세일즈로 활용되고 있다. 신진작가들, 그리고 유명작가들의 작업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소소한 일상과 작업현장, 전시 등을 알리면서 대중과 친밀도를 높인다. 언택트 시대에 갤러리, 옥션하우스, 뮤지엄들까지 SNS 마케팅에 열을 올리면서 미술 지형도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확장하고 있다.
온라인 시장은 대중들을 만나기 위한 중요한 채널이 되고 있다. 아트 바젤과 UBS 아트마켓 발행인이자 미술품 경제학자인 클레어 맥앤드루(Clare McAndrew)는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변화하고 적응하며 또한 혁신하는 자들이 앞서 나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온라인 시장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승리자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젊은 세대의 미술품 구매력 향상, 온라인 구매환경 개선, 그리고 수준 높은 정보를 제공하는 온라인 플랫폼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온라인 미술시장의 꾸준한 성장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