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건축트렌드] (4) 1차 세계대전 후 근대건축운동의 세계화…강철의 시대 새로운 마천루의 시작
입력 : 2016.02.25 10:43:48
19세기 근대건축의 다양한 시도들은 실험정신이 높은 건축가들과 박람회에서 앞다퉈 다뤄졌다. 산업화에 따른 신기술과 새로운 자재들은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유럽인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변화이기도 했다.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선보인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한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 1832~ 1923)의 에펠탑은 이러한 혼재된 사회변혁이 대중에게 수용되기까지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대중에게 생소한 강철과 구조기법을 적용한 에펠의 이러한 계획은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파리 시민들은 300m나 높게 올라가는 철골의 안전에 많은 걱정과 도시경관을 해칠 것이라는 우려를 보냈고, 전문가들 또한 항의와 반대의 의견들을 냈다.
“우리 작가,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은… 지금 위협받고 있는 프랑스 예술과 역사의 이름으로 우리의 수도 한가운데 백해무익하고 추악한 에펠탑을 세우는 것에 항의한다… 이 탑의 야만적 크기는 노트르담, 생 사펠, 투르 생 자크 등을 압도해 우리의 모든 건축물을 모욕하고 왜소하게 만들 것이다.”
당시 에펠탑의 상상을 초월하는 높이는 여느 건축물보다 높은 상징물로서 박람회가 갖는 성격을 보여줬다. 1만5000개의 분리된 철재는 250만 개의 리벳으로 연결됐고 탑의 형태는 구조를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박람회장의 입구로 계획된 기단부의 아치는 유일한 비구조요소로서 그곳을 통과해서 걷는 보행인에게 아름다운 구조미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탑의 상부에는 3개소에 각각 전망 테라스가 마련됐고 고전적 파리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신기술의 경이로움을 제공한다.
박람회장의 많은 건물들이 전시 후 철거되는 운명에 있었으나 에펠탑은 그대로 남아 무전탑으로 이용되었고, 그 후 텔레비전 안테나가 덧붙여져 텔레비전 송신탑으로 사용되었다. 탑의 높이는 40여 년간 인공건축물로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에펠탑의 성공은 고전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실험정신과 새로운 기술이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근대건축을 보여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는 “노출된 철 제품이 승리한 해”로 기록되기도 한다.
Patrizia Kramer. 바우하우스
▶세계대전 후 재건을 위한 고민과 실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던 유럽은 재건을 위한 많은 건축가들의 고민과 실험의 무대가 되었다. 더불어 산업화에 따른 신기술 및 새로운 자재들의 개발은 건축가들에게 보다 자유로운 그들의 실험정신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했다.
1928년 스위스에서 열린 근대건축국제회의(C.I.A.M)의 결성은 당시 근대건축가들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각 나라의 기술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한 건축박람회는 건축과 도시재생을 계획하는 다양한 움직임도 보여주었으며, 그 중심에는 철, 유리를 기존의 건축양식에 적용 실험하는 새로운 도전양식들도 있었다. 유럽의 근대화 과정은 자국의 영화를 보여주기 위한 고전양식의 채용과 신 재료를 적용한 신기술의 충돌을 겪게 된다.
독일은 선진화에 대한 정책과 지원에 힘입어 미술, 공업, 수공예의 기술력 향상을 목적으로 1907년 ‘독일공작연맹’이 결정되었다. 그 중심에는 바우하우스의 1대 교장인 월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있었다. 그는 패전의 복구를 위해서는 건축의 공업화가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예술과 기술이 결합된 표준규격의 건축자재가 대량 생산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바우하우스’ 교육 프로그램에서 실현된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설립되어 1933년 강제 폐교되기까지 불과 14년간 운영된 새로운 형태의 예술교육기관이었다. ‘바우(Bau)’는 건축을 뜻하고 ‘하우스(Haus)’는 집을 뜻하며, 기존의 학교와는 다른 커리큘럼과 프로그램, 교수진으로 운영되었다. 개교 당시 그로피우스가 작성한 선언문의 주요 내용은 ‘미래의 새로운 건축을 위해 조각,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과 공예와 같은 응용미술이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로 바우하우스가 지향하는 교육의 방향을 보여줬다. 바우하우스 운동은 그 당시 가장 계획적이고 실험적이며 또한 진보적이었다. 교수진 또한 형태와 색채교육을 위한 화가, 공예가, 건축가들을 위촉했으며 교육프로그램 또한 탄탄한 예술 기반을 바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업화 교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대량생산의 공업화를 외치던 정치적인 문제와 예술 기반을 바탕으로 한 교수들 사이의 갈등 및 경제적인 이유로 폐교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새로운 학장으로 취임한 독일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9)의 자구노력에도 불구하고 1933년 바우하우스는 폐교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와의 갈등은 오히려 근대건축사상을 여러 나라에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과 정신을 이끌던 건축가들은 자국이 아닌 외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19세기 근대건축의 새로운 꽃을 피우게 된다. 그로피우스는 영국을 거쳐 1937년 하버드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고 미스 반 데어 로에 또한 1938년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건축학장으로 초빙되어 바우하우스의 교수진과 학생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Cerative Commons Attribution 팬앰빌딩
▶뉴욕 마천루의 시작
당시 미국은 시카고 대화재로 도시재건의 기회를 갖은 시카고학파(Chicago School)의 건축활동을 제외하고는 유럽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뒤떨어져 있었다. 지리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입지 않았고 오히려 전쟁으로 호경기를 누리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한 마천루 건설의 기틀이 마련된다.
이로 인하여 많은 유럽의 건축가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하였고, 이들은 다져진 사회 분위기와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뉴욕의 지가(地價) 폭등에 따른 고층화의 추세로 1922년 미국 신문사인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사의 국제 설계현상 공모가 있었고 여기에는 그로피우스, 타우트, 로스 등 유럽의 유명 건축가들이 다수 응모하였으나 레이몬드 후드(Raymond Hood)의 계획안이 당선되어 1925년에 완공되었다.
크라이슬러 chris, 트리뷴타워 Tommy
고딕양식이 반영된 외관과 무거운 돌을 외장재로 사용하여 중세 종교건물을 연상시키는 트리뷴타워의 당선은 근대건축으로 가는 과정 중의 과도기로 보인다. 그리고 당선되지는 못하였으나 그로피우스와 마이어의 합동작품은 철근 콘크리트의 일체형 구조를 외관에 나타낸 합리적 디자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이 현상공모 설계는 전 세계 건축가의 국제적 교류의 큰 계기가 되었다.
뉴욕에서는 거대한 상업자본으로 자신의 이름을 길이 남겨줄 초고층 랜드마크를 짓고자 하는 건축주들의 건설 붐이 일었다. 대표적인 예로 맨해튼 동부 42번가와 렉싱턴 거리의 교차점에 위치한 높이 319.4m의 크라이슬러 빌딩을 들 수 있다. 상업자본을 바탕으로 로비는 호화로운 대리석과 크롬스틸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출입구의 외관은 강건미와 현대미를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크라이슬러를 각인시킨 인상적인 지붕 쪽의 장식은 유럽 아르데코 양식의 허브 캡, 레디에이터 캡, 그리고 독수리 머리를 한 반원형의 크라이슬러 로고를 상징한다. 그 위로는 스테인리스 스틸 첨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이로써 1930년 크라이슬러 빌딩은 뉴욕 마천루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이라는 타이틀과 크라이슬러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 상징적인 건물로 완성된다. 또한 강철과 유리를 사용한 뉴욕의 현대적인 마천루 사이에서 상업적 요소를 아르누보적인 고전 양식으로 적절히 채용한 독창적인 건물로 뉴욕에 자리 잡게 된다.
상업자본과 철, 유리로 대변되는 신재료의 공업화가 이룬 초고층 마천루의 건설은 근대건축에서 현대건축으로 넘어가는 기반을 만들었다. 당시 실험정신 가득한 건축가들은 고층화에 따른 새로운 수요와 시대의 변화를 논리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많은 시도들을 했다. 그러나 외형적인 변화와 기술적인 발전의 이면에는 자연에서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유기적 철학을 주장하는 흐름도 있었으며, 대중이 만족할 만한 초고층 건축물에 적절한 건축적 언어를 찾는 과정 중에 고전주의 건축과의 혼돈도 있었다. 이로써 도시는 보다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되었고, 다양한 접근방법으로 시대의 흐름을 읽으려는 노력들로 좀 더 개성을 갖춘 다양한 마천루의 각축장이 되었다.
관련 건축가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Frank Lloyd Wright, 1867~1959 )
1867년 미국의 위스콘신 주에서 태어나 위스콘신대학에서 공학을 배운 후 설리번의 사무실에서 수학한다. 르 꼬르뷔제, 미스 반 데어 로에와 더불어 근대건축에 있어서 세계 3대 거장의 한 사람이다.
미국 근대건축의 편향적인 고층화, 산업화와는 다른 독립적인 방향의 유기적인 건축철학을 실현했다. 대지와 재료의 본질, 인간의 근본에서 모든 것이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인간 본연의 본성을 건축에 담으려 노력한다. 그가 구현한 유기적 건축철학은 근대건축의 다양성을 보완해준다.
월터그로피우스 ( Walter Gropius, 1883~1969 )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독일공작연맹의 멤버로 활동하던 중 1919년 바우하우스 창설의 1대 교장을 맡게 되어 귀족의 전유물로 여기던 공예와 미술을 건축에 결합한다.
영국을 거쳐 1937년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하버드대학 디자인대학원장을 역임한 그는 젊은 건축가들과 ‘건축가공동체(TAC)’를 결성, 하버드 대학원 센터(1949~1950), 매코믹 빌딩(1953), 베를린 한자 지구의 인테바우전(展)의 아파트(1957) 등을 세웠다. 그의 건축뿐만이 아닌 예술 전 분야에 걸친 바우하우스 교육이념과 철학은 근대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예술을 실생활에 끌어들여 현실화한 이론 정립에 큰 기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