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걸 기자의 Blue House Diary] 朴, 4월 16일 고심과 혼선 속에 ‘긴 하루’ 대한민국 대통령 퇴짜 맞고 분향도 못해
입력 : 2015.05.15 17:17:37
수정 : 2015.10.08 15:05:17
지난 4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은 아침 일찍부터 고심과 혼선이 점철된 ‘긴 하루’를 보냈다. 정확히 1년 전 악몽 같았던 그날이 생각났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화롭던 오전 갑자기 날아든 세월호 침몰 소식과 오후 들어 갑자기 드러났던 참상…. 국민 누구에게라도 비극적인 소식이었지만 국가원수이며 행정수반인 박 대통령에겐 마치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처참한 소식이었다.
1년 전 그날의 꿈을 꾸며 박 대통령은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
취임 후 단 하루도 발 뻗고 잔 날은 없었지만 이날은 복잡한 심경에 더욱 긴장이 됐다. 아침부터 부산한 일정이 예정돼 있었다. 오전엔 세월호 참사의 현장인 진도 팽목항을 방문했다가 오후 2시 30분에 지구 반대쪽 중남미 국가들로 무려 12일에 이르는 긴 순방을 떠나기로 돼 있었다. 처음 가보는 네 나라를 방문하고 각국마다 정상회담을 비롯해 초단위로 이뤄지는 수십 개의 행사를 치러야 한다. 이런 와중에 아침에 받아온 조간신문은 마음을 더 복잡하게 했다. 헤드라인마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관련 기사로 도배가 돼 있었다.
특히 이완구 국무총리의 불법자금 수수 의혹에 대해 대문짝만하게 보도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순방을 떠나면 국무총리가 자리를 대신한다. 그 당사자인 총리는 이미 카운터펀치를 맞고 그로기 상태에 빠진 게 확실했다. 방송과 신문에선 박 대통령이 세월호 1주기인 이날 출국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난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난해 4월 16일에 이어 이날도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분향조차 못한 대한민국 대통령
오전 일찍부터 서둘러 비행기와 헬기를 갈아타며 진도 팽목항으로 날아갔지만 분향은 할 수가 없었다. 희생자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분향소 문을 테이블과 실종자 사진 등으로 막아놨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가슴은 메어져 왔다.
이날 오전 박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사실이 팽목항에 전해지자 유가족들이 반발하며 분향소를 폐쇄한 것이다. 세월호 가족대책회는 “대통령과 모든 정치인들이 ‘4·16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 ‘유가족의 여한이 남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며 “누구도 295명 희생자와 9명 실종자를 추모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분향소를 떠난 이유를 밝혔다.
박 대통령은 결국 분향소 앞에서 실종자 9명의 사진을 바라보며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과 이주영 전 장관이 설명하는 실종자들의 사연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어 분향소 옆의 실종자 가족들의 임시숙소를 둘러본 뒤 방파제로 이동해 바다를 뒤로 한 채 홀로 서서 대국민 발표문을 낭독했다.
당초 박 대통령은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플래카드를 배경으로 유족들 앞에서 담화를 밝힐 예정이었다. 담화는 선체 인양과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개정 등 유족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분향소가 폐쇄되는 바람에 홀로 방파제 앞에서 담화를 발표했다. 얼굴은 비통함이 묻어났다.
▶긴박한 하루… 순방 출발시간 3번 바꿔
박 대통령의 팽목항 방문은 작년 5월 4일 이후 11개월여 만이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그동안 진정성 있게 유가족을 위로하는 행보를 고민해오다 팽목항 방문을 최종 결정했다. 박 대통령의 팽목항 방문에는 이병기 비서실장과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박흥렬 경호실장, 민정수석을 뺀 나머지 9명의 수석비서관, 국가안보실 1차장, 대변인 등 청와대 비서진 대부분이 수행했지만 결국 분향조차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날 청와대는 하루 종일 우왕좌왕을 거듭했다. 당초 오후 2시 30분으로 예정된 박근혜 대통령의 남미순방 출발시간도 오전 10시 갑자기 3시간을 미뤘다.
오전에 이미 12일간의 순방일정을 치르기 위해 바리바리 큰 짐가방을 싸서 청와대에서 공항으로 출발했던 일부 수행단과 출입기자들은 광화문 인근에서 차를 돌려 다시 청와대로 복귀하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당초 박 대통령은 팽목항에서 12시 30분께 담화를 발표한 직후 광주공항으로 이동해 남미로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갑자기 ‘서울에서 오후 일정이 생겼다’며 공항으로 향하던 차를 돌렸다. 청와대는 오후 늦게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대통령이 만난다고 밝혔다. 이후 오후 5시 30분이던 출발시간은 막상 4시 40분으로 다시 당겨 부랴부랴 콜롬비아로 떠났다. 무려 20시간의 비행이 예정돼 있는 전용기에 올라타고 나서야 박 대통령은 발을 뻗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오락가락을 계속한 하루였다.
▶4.16추모 방법 놓고 오랜 기간 장고
사실 이날 전남 진도 팽목항을 향한 것 자체도 무려 한 달에 걸친 ‘장고’의 결과였다.
세월호 추모식은 이날 진도 팽목항(9명의 실종자 가족과 일부 희생자 유가족들), 안산 단원고(수학여행 희생자 가족들), 인천항(일반인 희생자 가족) 등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여기에 국회가 통과시킨 세월호 특별법에 따라 정부가 주최하는 ‘국민 안전의 날 행사’는 물론 광화문 추모집회 등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당초 청와대는 대통령이 진도 팽목항과 안산 단원고 등 복수의 추모제를 방문하는 방안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갑자기 남미순방에 콜롬비아가 추가되면서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졌다.
4월 16일 오후 다섯 시에 한국을 떠날 경우 미국 LA에서 급유를 하고 최대한 빨리 비행을 해도 콜롬비아엔 밤 9시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만약 16일 밤늦게 열리는 행사를 참석하고 떠날 경우 콜롬비아엔 자정을 넘겨 새벽에나 도착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도착해서 다음날 바로 떠나는 무리한 스케줄이 되고 지난 1월 직접 박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방문을 부탁한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에 대한 외교적인 결례라는 지적도 나왔다. 결국 박 대통령에게 국내에서 세월호 4.16 추모에 대해 부여된 시간은 반나절 정도밖에 없었던 셈이다.
물론 일각에선 ‘콜롬비아가 뭐가 중요하냐’는 지적도 나왔다. 사상초유의 국가적인 재난사태, 국민모두의 마음을 멍들게 한 세월호 1주기 추모에 대통령이 한나절 투자할 마음도 없냐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추모행사를 연장하기보다 순방을 택한 배경은 무엇일까. 이날 박 대통령이 진도 바다 앞에서 발표한 대국민 메시지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갑자기 가족을 잃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가신 분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그분들이 원하는 가족들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고통에서 벗어나셔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기 바란다.(중략) 이제 세월호의 고통을 딛고 그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길에 나서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부모를 모두 불의의 흉탄에 잃었던 본인의 아픈 기억을 떠올려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공감대를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할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본인의 사명감도 전한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순방 전 극비 독대… 절묘한 선택
박 대통령은 이날 순방 출국을 3시간이나 미뤄가면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만났다. 콜롬비아엔 ‘도착이 3시간 정도 늦는다’는 통보를 보냈다. 상대국에 도착시간 변경까지 무릅쓰면서까지 김 대표를 면담한 이유에 대해 한 여권 관계자는 “급박한 순간의 절묘한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나라를 비우고 가는데 권한대행인 총리는 비리의혹에 무기력해졌고, 그렇다고 의혹만을 갖고 총리를 면직시킬 수도 없었다. 한편으론 의혹을 받는 총리에게 온전한 권한대행을 맡기고 가는 것도 이상했다. 일각에선 12일이란 긴 시간 동안 총리가 다른 마음을 먹으면 검찰수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대두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국가원수가 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나는 것은 무책임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욕을 먹을 가능성이 컸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전용기와 헬기를 갈아타며 팽목항으로 날아가는 와중에도 이런 복잡한 상황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스스로 택한 마지막 방법이 바로 ‘김무성 카드’였다. 김 대표 역시 박 대통령이 순방 직전 자기를 불러 독대를 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단 한 사람만을 불러 1 대 1 독대를 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여성이라는 특징도 있지만 신뢰와 투명성과 신뢰를 중시하는 박 대통령은 보통 비서실장이나 대변인 등을 반드시 배석시키고 면담을 한다. 그러나 이날은 당초 예정됐던 비서실장, 정무수석, 대변인을 모두 물리고 단 둘이서만 만났다. 이것 역시 고도의 정치행위로 해석된다.
면담 후 김 대표가 행한 브리핑도 주목된다. 무려 40분간을 독대했는데 김 대표는 직접 행한 브리핑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금품을 전달했다고 지목한 이완구 국무총리의 거취 문제는 남미순방을 다녀와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는 취지로 간단하게 끝냈다.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다 얘기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