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기다랗게 생긴 유리병에 담긴 자희향 막걸리를 땄다. ‘스스로 기뻐서 향기를 낸다’는 이름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올해 초 건배주로 냈다는 같은 이름의 청주를 만드는 주조장에서 만드는 고급 막걸리라고 했다. 잔에 따르니 살짝 내비친 누룩향 뒤로 꽃과 과일이 어우러진 듯 그윽한 향이 피어올랐다.
‘어허! 막걸리에서도 이런 향이 나네.’
다이긴조 정도의 고급 사케에서나 그런 향기가 나는 줄 알았는데 좋은 쌀로 잘 담근 한국 전통주도 마찬가지로 그윽한 향을 풍겼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살짝 꽃향기가 실린 깔끔하고 부드러운 맛이 감미롭게 다가왔다. 연엽주가 널리 알려지기 전, 아산 외암리 고택에서 마주했던 술도 이처럼 깔끔한 맛이었던가.
막걸리는 원래 텁텁한 술이라는 선입견이 어느새 사라졌고 대신 상큼하면서도 달착지근한 여운이 길게 남았다. 문득 아주 오래전 시골에서 어머니가 담근 술이 잘 익었을 때 몰래 한 모금 입에 댔을 적의 감미롭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신선하고 상큼한 막걸리 다수 등장
잠시 반짝 열풍을 일으킨 뒤 사라지는 듯 했던 막걸리 바람이 다시 일고 있다. 이번엔 그저 ‘우리 술’이니 많이 마시자는 맹목적 애국심에 호소하다가 사라지는 바람이 아닌 것 같다. 추억과 스토리를 살려주는 감미로운 맛을 담아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일부 골프장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대대포 막걸리(담양 죽향도가)는 텁텁하지 않고 깨끗하고도 시원한 맛을 자랑한다. 병부터 색다르게 짙은 갈색을 띤 이 막걸리는 벌꿀을 가미했다지만 단맛은 살짝 느껴질 정도로 미미하고 그 대신 시원하면서 깊이 있는 막걸리 고유의 맛을 거스르지 않는다.
강진의 설성 만월막걸리는 허리춤을 날렵하게 파낸 병 디자인부터 눈길을 끌고 있다. 지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감미해 달달한 맛이 강한 편이라서 여성들도 관심을 가질 만해 보인다.
고구마가 많이 나오는 해남에선 핑크색 막걸리가 등장했다. 자색고구마로 만들었다는 이 막걸리는 따로 감미를 하지 않아 시원하면서도 구수하고, 살짝 쌉쌀한 맛에 꽃향기까지 피우고 있다. 전통 막걸리라기보다 와인의 풍미를 풍기는 재미있는 술이다.
핵안보정상회의에 나왔다는 울주 복순도가의 생막걸리는 항아리에서 손으로 직접 빚어 자연발효에서 나오는 탄산을 그대로 담아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개를 따면 거품이 올라오기에 아주 조심스레 열었다 닫기를 반복한 뒤 따라야 하는데 살짝 달착지근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난다.
‘막걸리 6도’는 옛말
맛뿐 아니라 알코올 도수도 맛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아직도 일반 마트에서 파는 막걸리의 대부분은 알코올 도수 6도짜리지만 전문점이나 쇼핑몰 등을 통해 도수 높은 막걸리들이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다.
장수막걸리를 비롯한 대부분 막걸리 제조업체들은 옛 주세법 시행령에서 알코올 도수를 묶어놓은 뒤 그 수준에 최적화한 맛을 유지하려고 아직도 6도로 내고 있다. 주조장에서 만든 막걸리 원액은 이보다 알코올 도수가 훨씬 높지만 물을 타서 도수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6도 제한 규정은 사라졌다지만 알코올 도수가 높아지면 세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해 출고가를 대폭 인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술의 참맛을 살려야 한다며 도수를 높인 막걸리를 내놓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함평 자희자양의 자희향 탁주는 12도나 된다. 거의 와인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경기도 의왕시 소재 농업회사법인 ‘좋은술’이 빚은 천비향 막걸리는 10도이며 이 회사의 생주는 14도나 되는 높은 알코올 도수를 자랑한다.
서울법대 출신 변호사가 세운 강원도 홍천의 ‘예술’이 만드는 홍천강 탁주는 11도이고 이 회사가 찹쌀과 단호박으로 만든 생탁주 ‘만강에 비친 달’은 10도이다. 역시 손으로 빚은 경기도 화성의 새비주 이화주도 10도인데 걸쭉할 만큼 진한 게 특징이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들은 대부분 물을 많이 타지 않았기에 전통술 그대로의 순수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사실 집에서 담그는 전통주도 술을 거를 때 물을 넣어야 한다. 전통주가 항상 물을 전혀 타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오랜 숙성기간 거친 깊은 맛
알코올 도수가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더 깊은 맛을 내기 위해 숙성기간을 아주 오래 잡거나 두 번, 세 번 양조를 거듭해 빚은 막걸리도 늘어나고 있다.
홍천강 탁주나 만강에 비친 술을 만들고 있는 ‘예술’은 두 번 빚어 옹기에서 110일 동안 숙성한다고 강조했다. 의왕시의 천비향 막걸리는 세 번 빚은 삼양주이고, 이 회사의 생주는 다섯 번 빚은 오양주라고 한다. 숙성기간은 3개월이라고 했다.
함평의 자희향도 100일 숙성한다고 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숙성하려면 발효할 때 온도를 대폭 낮춰야 한다. 발효할 때 온도가 높아지는 것을 내버려두면 술은 빨리 익지만 부글부글 끓어 탁한 맛을 낸다. 깊이 있는 맛은 낮은 온도에서 오래도록 숙성해야만 얻을 수 있는데, 이는 그만큼 많은 노력과 비용이 더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서울 합정동에서 막걸리 전문점 ‘세발자전거’를 운영하는 백웅재 씨는 “알코올 분자가 오랜 기간 숙성을 거치는 동안 물과 조화를 이뤄 무게감 있고 깊이 있는 복합미를 낸다”며 “4년 숙성한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는데 그 맛이 엄청났다. 30년산 위스키와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막걸리 전문가들은 시중에서 구입한 막걸리도 저온숙성을 거치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전통주 유통업체인 진승통상의 사진학 사장은 “김치 냉장고에 오래 보관했다가 마시는 좋은 술은 맛이 일품”이라고 설명했다.
전통 막걸리 재현 지원
막걸리가 아직도 서민의 ‘저렴한 술’처럼 치부되고 있지만 사실 일제가 금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막술은 아니었다. 집안마다 전통의 술을 빚어 손님을 대접했고 당연히 맛 또한 뛰어난 술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 막걸리를 재현해 사업화하려는 움직임도 곳곳에서 일고 있다.
한국의 곡창으로 꼽히는 전라남도는 대표적으로 도가 나서서 막걸리 품질을 관리하고 있다.
전남도청 식품유통과의 이귀동 전통식품담당은 “박준영 지사 시절부터 막걸리의 싼 이미지를 벗겨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차원에서 ‘만월’이라는 공동 브랜드를 개발했다”면서 “전남도 내 117개 업체 가운데 유기농으로 인증한 업체만 이 브랜드를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전남도는 현재 강진 병영주조장의 ‘설성’과 담양 죽향도가의 ‘대대포’, 장성 청산녹수의 ‘사미인주’, 함평 자희자양의 ‘자희향’ 등 네 곳에 유기농 인증을 했다고 설명했다.
지자체의 지원 없이도 최근 전통술이 좋아서 막걸리 양조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통을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 외국 술과 경합할 만큼 가치와 깊이까지 추구하고 있다. 옛날 할머니들이 만들던 스토리 있는 막걸리가 더욱 많이 등장할 것이란 전망을 할 수 있다.
좋은 술이 늘어나면서 최근 막걸리 전문점이나 관련 동호회도 생겨나고 있다. 새로운 막걸리 바람을 끌고 갈 수요와 공급 채널이 갖춰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