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rved for Prime Minister Abe’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였다. 세계 각국의 정상과 장관들,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 유수의 석학까지 지구촌의 수뇌들이 몰려드는 이곳에선 지난 1월 22일 박근혜 대통령의 개막 기조연설이 예정돼 있었다. 작은 산골 다보스까지 날아간 기자 몇 명은 연설장소인 콩그레스홀을 일찍 찾아 들어갔다. 취재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눈에 들어온 종이 한 장.
좌석 맨 앞줄에 놓여있는 하얀 종이에 쓰인 글귀를 보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안 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했다. ‘Abe(에이브)’는 영미 사람들 이름 Abraham(에이브라함)의 애칭이다. 혹시 그렇다면 다른 사람?
그러나 ‘Prime Minister’라는 직책을 보면 일본 아베 총리가 분명했다. 급하게 청와대 인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한 수석비서관이 답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우리가 알기로 아베 총리는 분명히 11시 56분에 취리히에서 떠나는 기차가 예약돼 있습니다. 지금이 11시 30분인데 여기에 올 수가 없어요. 그냥 자리 예약만 해놓은 것이 아닐까요?”
“정말 아베?” 예기치 못한 조우
그럴까. 워낙 꼼꼼한 일본 사람들이니 만약에 대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분 후 결국 확인이 됐다. 한덕수 무역협회 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 등 다보스포럼의 한국 참가자들이 속속 입장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다. “아베가 문 앞에 와 있어요.”
한국서 온 참가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아베가 들어오나”, “비행기 시간을 바꾼 모양이네.”
뒤를 돌아본 순간 멀리 출입문으로 아베 총리가 보였다. 3~4명의 보좌진을 거느린 채 청중들과 인사하며 입장하고 있었다.
차갑게 경색된 한일 관계. ‘세계의 심장’으로 불리는 다보스에서의 드라마틱한 조우. 예고치 않은 갑작스런 일본 총리의 ‘깜짝 방문’. 개막세션에서 강의하는 박 대통령과 연단 아래의 아베 총리.
여러모로 흥미로운 기삿거리였다. 갑자기 주변에 카메라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아베 총리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사람들과 악수를 나눴고 우리 측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주철기 외교안보수석과도 인사를 했다. 조금 걱정이 됐다.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온 것을 알고 있을까. 맨 앞줄 가운데여서 대통령이 연설 중에 보게 될 텐데 놀랄 수도 있겠구나.’
아베 총리는 “박 대통령의 연설을 듣기 위해 일부러 일찍 왔다”고 말하는 등 준비된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는 사이 여하튼 대통령이 등장해 강연을 시작했다. 아베 총리는 진지한 모습으로 들었다. 동시통역기를 귀에 꽂은 채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연설 내내 박 대통령의 얼굴을 쳐다봤다. 중간중간 청중들이 박수를 칠 때면 같이 박수를 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다행히 별다른 문제없이 연설을 잘 끝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찰나의 순간은 있었다. 박 대통령은 연설 도중 미소를 머금고 연단을 둘러보다 시선을 천천히 아베 쪽으로 던졌다.
깜짝쇼에 맞춰진 세계언론… 언짢은 청와대
각도상 분명히 두 정상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미세한 멈춤도 없었다. 놀라거나 미소를 거둬들이지 않고 자연스레 눈길을 포용하며 연설을 마쳤다. 그러나 기자에겐 그 순간에 소름이 돋았다. 시선이 돌아가는 게 아주 길게 느껴졌다. 나중에 물어보니 청와대 몇몇 인사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혹시 아베가 올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맨 앞에 앉아있는지는 모르고 연단에 등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야말로 깜짝 뉴스였다. 각국의 유력언론이 아베의 깜짝 등장을 관심 있게 보도했다. 한일 언론이 집중 보도했고, 미국과 유럽의 다른 언론들도 사진과 내용을 꽤 눈에 띄게 보도했다. 청와대로선 기분이 언짢은 상황이었다.
한 관계자는 말했다. “박 대통령은 기조연설에서 주창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등 한국경제를 알리려고 분초를 아껴 다보스를 방문했다. 국익을 위해 필요한 이런 내용을 보도하려던 언론이 전부 아베와의 깜짝 조우만 관심을 갖게 됐다. 정말 황당한 노릇이다.”
실제 그런 측면이 있었다. 박 대통령이 다보스의 빅샷들 앞에서 작심하고 발언한 ‘기업가 정신’ ‘창조경제’ 기사는 아베의 깜짝 방문에 가려 줄어들었다. 준비하느라 노심초사했던 청와대로선 정말 황당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아베의 등장이 재를 뿌린 셈이 됐다.
아베는 어땠을까? 어쩌면 작전에 성공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실 ‘보여주기 외교’로선 꽤 성공한 편이다.
아베 총리는 ‘나는 대화를 위해 이처럼 노력하는데 박 대통령은 싸늘하게 안 만나준다’는 설정된 모습을 남들에게 떠벌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게 과연 한일관계의 회복을 바라는 일본 지도자의 모습일까. 기자는 이날 아베 총리를 바로 뒤에서 지켜봤다. 느낌은 그저 연출된 행동이란 것뿐이다.
진정성 없는 실망스런 지도자
아무리 국제 포럼이라고 하지만 양국 정상의 접촉은 정상외교다. 농담이나 얼굴 표정, 악수 등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외교행위다. 특히 사상 유례가 없이 싸늘해진 한일관계 속에서 아베 총리는 예고도 없이 행동했다. 박 대통령의 마음이 어떨지 한국 국민들의 마음이 어떨지를 전혀 타진도 고려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일본 국민의 총리로선 기대를 벗어난 행동이다. 혹시나 우리 정부에 미리 예고를 했나 싶어 알아봤다. 역시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다. 하긴 대통령을 보좌하는 수석비서관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 이건 정말 ‘깜짝쇼’다.
아베 총리가 진정성 없음은 다른 데서도 확인된다. 그는 박 대통령 연설장의 ‘깜짝 방문’만으로 다보스를 마무리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이어진 일정마다 망언 릴레이를 쏟아냈다. ‘중국과 일본의 사이는 1차 대전 전 영국과 독일 사이와 같다’며 중일 전쟁을 암시하기까지 해 전 세계 언론을 경악시켰다. 오죽하면 뉴욕타임스(NYT)가 “일본지도자가 다보스에서 세상의 이목을 즐기고 있다”는 제목으로 아베 총리가 일본과 중국 간에 해상영유권 분쟁을 더욱 끓어오르게 만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