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들은 기업과 가계가 알아서 움직이기를 기다리지 말고 보다 능동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끌어내야 한다. 금융기관들은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자금중개 기능(예금을 받아 대출하는 일)을 강화해 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해야 금융기관들은 자금중개의 가치를 증진시킬 수 있고 또 금융기관들이 예대마진을 축소하는 쪽으로 경쟁을 가속화하지도 않더라도 대출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시켜줘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것이다. 동시에 거시경제 관점에선 금융기관의 자금중개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금융과 경제활동 사이의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는 우호적인 환경을 가져올 것이다.”
대출 독려 나선 일본 중앙은행
지난 5월 26일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일본금융경제학회 연차회의 기조연설을 통해 작심한 듯 이처럼 금융기관들에게 대출을 강화하라고 독려했다. 한국은행 총재가 경제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통계숫자를 거론하며 해명에 급급한 것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구로다 총재는 이날 “최근의 저조한 경제활동과 디플레이션 상태에서 금융기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출을 늘리거나 금융기관 자체의 자산의 질을 향상시키는 등의 노력을 통한 성과를 확인하는 게 쉽지는 않다”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들이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구조조정이나 사업조정 신시장 개척 등을 지원하라는 게 구로다 총재의 요구다. 그냥 지원하라는 게 아니라 거기에 필요한 자금은 일본은행의 대출지원기금(Fund-Provisioning Measure)으로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금융기관들이 이렇게 기업을 지원해야 금융 서비스의 부가가치를 지속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구로다 총재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금융기관들의 대출 확대를 독려하고 있다. 일본은행 총재가 이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독려하면서 일본 기업들의 대출 사정은 호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행은 6월 13일 발표한 최근 경제와 금융 발전에 대한 월간 보고서를 통해 “신용공급과 관련해 기업들은 금융기관들의 대출 태도가 향상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어음이나 회사채 발행 조건은 전체적으로 우호적이다”라고 밝혔다.
글로벌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일본 경제가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에서도 일본 기업들이 양호한 성적을 거둔 데는 이 같은 일본 금융기관들의 적극적인 자금 지원이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시중 자금사정 무관심한 한국 은행
대조적으로 한국 기업들의 자금사정은 여전히 밝지 않은 상황이다. 한 상장기업의 CFO는 “대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이 직면한 자금상황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특히 지방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한국은행은 이런 사정은 남의 나라 얘기처럼 넘긴다. 금리동결을 고집하다 마지못해 지난 5월 기준금리를 내린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지난 6월 ‘통화정책방향’ 결정문에는 이런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금융통화위원회는 앞으로 해외 위험요인의 변화 추이와 지난달 기준금리 인하 및 추가경정예산을 포함한 정부 경제정책의 효과를 면밀하게 점검하면서, 저성장 지속으로 성장잠재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 중기적 시계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물가안정 목표 범위 내에서 유지되도록 통화정책을 운용해 나갈 것이다.”
은행들에게 대출을 독려하겠다는 내용은 고사하고 기업의 자금사정마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구태의연하게 물가만을 떠들고 있는 것이다. 한은이 철저히 금융기관 입장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다. 한은이 얼마나 금융기관 입장에서 정책을 펴는지는 기업이나 가계의 자금사정을 판단할 때조차 자금수요나 어려움을 따지기보다 금융기관 연체율로 보는 데서 알 수 있다.
지난 6월 한은이 공개한 5월 금통위 회의록을 보면 기업이나 가계 자금사정에 대해 “은행 중소기업대출 연체율은 3월 말 연체채권 상각·매각으로 전월동기보다 하락”했고 “대기업대출 연체율은 일부 구조조정 기업의 일시 연체 등으로 상승했으나 월말 기준으로는 전월 말 수준으로 반락한 것으로 추정”됐다거나 “은행 가계대출 연체율은 안정적 수준을 유지”했다는 식으로 나와 있다.
일부 금통위원이 최근 몇 년간 국내 경기가 상고하저를 반복하고 있는데 국내 요인이 없는지 묻는 데 대해서조차 한국은행은 “특별히 대내적인 요인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대외여건 악화로 국내 가계나 기업들의 심리가 악화되면서 내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경기의 상고하저 현상은 예금은행의 기업대출에서 읽을 수 있다. 2009년 이후 매년 4분기가 되면 은행들이 대출을 회수했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최근 4년간 매해 4분기가 되면 대출을 회수했는데 자금 회수 규모는 2009년이 9조9000억원이었고 2010년 7조4000억원, 2011년 8000억원, 2012년 9조4000억원으로 나타났다.
무원칙한 금융정책은 시장금리조차 왜곡시키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5월 기준금리를 내렸지만 대출을 독려하기는커녕 은행의 남는 자금을 끌어들여 시중의 여유자금이 어려운 기업에 가는 것을 막아왔다. 지난 6월 13일 7일물 환매조건부채권(RP) 매각으로 12조5000억원, 14일물로 3조원의 돈을 은행들로부터 맡았던 한은은 이튿날인 14일에도 20일물 RP로 또 5조9400억원을 끌어들였다.
이런 한은의 태도는 지난 5월 기준금리 인하로 단기금리는 내렸지만 장기금리는 오히려 상승하도록 했다. 한은의 금리조정 후 2%대에서 머물던 3년물 회사채 기준금리는 6월 12일 3.24%까지 뛴 바 있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은 지난 4월 종액한도 대출 한도를 3조원 늘리는 등 중소기업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해명했다.
한은과 함께 금융정책의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는 금융위 역시 원활한 자금공급에 대해선 거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부동산 버블이 하늘을 찌를 듯 부풀던 상황에서도 금융기관의 무분별한 대출을 방조했던 금감위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자금흐름이 급격히 악화되는 상황에선 금융기관의 건전성 확보나 모럴 해저드 방지만을 강조하며 시중자금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도록 했다. 오죽했으면 이명박 전 대통령이 “비올 때 우산 뺏지말라”고 나서기까지 했지만 그들은 철저히 금융기관 편이었다. 중소기업들의 자금사정을 보면 은행들이 대출에 얼마나 인색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무원칙 금융정책 시장금리 왜곡
금융위기가 일어났던 2008년 1026조원이었던 한국의 GDP가 지난해엔 1272조원으로 24%나 늘었지만 이 기간 동안 기업은행을 제외한 일반은행의 중소기업 원화대출 잔액은 고작 1% 늘어나는 데 그쳤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할 때 실질적으로 대출을 계속 회수했다는 얘기다.
금융위가 얼마나 은행 편향적인지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출자 책임’을 강조하며 내세운 행복기금 규모를 10분의 1로 쭈그러뜨린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했던 김석동 전 위원장에 이어 금감위를 맡은 신제윤 위원장 역시 ‘창조금융’이나 ‘따뜻한 금융’ 등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한 정책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자금의 선순환’을 통한 전반적 경제활동 지원이라는 금융의 가장 큰 역할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강만수 행장 재임 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STX그룹의 대출을 회수해 공중분해 위기로 몰고 한국의 조선 기술을 통째로 중국에 넘길 지경까지 몰아간 것도 따지고 보면 금융당국의 의식 없는 금융정책 때문이다. 한국의 금융당국은 입만 열면 채무자들의 모럴 해저드 방지를 외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금융기관들의 과도한 경기순응성의 폐해가 더 크다고 주장한다.
뉴욕대 알트만 교수는 경기가 급랭할 때 무분별하게 자금을 회수하는 한국 은행들의 행태에 대해 “그건 금융이 아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최근 모피아들이 은행 수뇌부를 장악하면서 관치금융 논란이 벌어지자 조원동 경제수석은 “좋은 관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좋은 관치를 언급할 만큼 금융의 속성을 이해하는 관리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조 수석 스스로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는 게 금융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행복기금의 왜곡을 방치한 데는 조 수석의 책임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