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삼성전자 사장단의 이색 출장이 시작됐다. 명목은 실리콘밸리 벤치마킹 출장. 윤부근 사장, 신종균 사장, 김현석 부사장 등 삼성전자 주요 사업부장을 비롯한 고위 임원들이 대거 미국 서부로 건너가 구글을 비롯한 미국 실리콘밸리 대기업과 중견 벤처기업체들을 잇달아 방문했다. 이들이 이러한 여행을 기획한 것은 조직에 혁신 DNA와 창조 문화를 수혈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는 이처럼 혁신 문화를 이식하려는 파격 실험을 지난해부터 본격화했고 사장단들이 실리콘밸리 출장을 다녀온 뒤로 혁신 조직과 제도를 속도감 있게 확충하고 있다. 유연성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사고의 틀을 깨야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전자업계 고위 관계자는 “실리콘밸리는 첨단산업의 중심지이자 세계 정보통신 산업의 요람”이라며 “미국의 10%가 넘는 특허 출원이 실리콘밸리 한 지역에서 이뤄질 정도”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실리콘밸리 배우기 열풍을 감지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가 삼성전자 서초사옥 지하에 마련된 ‘실리콘밸리식 창고’ 만들기다. 삼성그룹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서초사옥 빌딩의 지하 2층에는 외부인도 깜짝 놀랄 파격적 공간이 연출됐다.
혁신 DNA와 창조 문화 수혈나서
160㎡(약 50평)에 불과한 작은 규모지만 애플 구글 HP 등의 실리콘밸리식 창고를 연상케 하는 개방형 연구 공간이 만들어진 것. ‘크리에이티브랩’(일명 C랩)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대기업의 번듯하고 사무적인 연구시설과 180도 다르다.
우선 드릴, 톱, 드라이버 등 각종 전동공구를 잔뜩 걸쳐놓은 벽면이 눈에 들어온다. 창고형 콘셉에 충실하기 위해 시멘트 벽면과 컨테이너 박스, 검은색 파이프 기둥으로 전체 공간을 꾸몄다. 하지만 창고형 공간이라고 해서 기자재도 19세기 스타일은 아니다. 디자인한 물건을 입체로 출력할 수 있는 3D 프린터를 비롯해 나무나 플라스틱을 용이하게 절단할 수 있는 레이저커터, 첨단 프린터 등 연구에 필요한 편의장비를 갖췄다.
나선형 계단에 오르면 팀원들과 자유롭게 토론하고 사색할 수 있는 2층 다락방이 마련돼 있다. 또한 젊은 발명가가 머무를 법한 골방 같은 연구실부터 사방이 메모판으로 변신하는 스마트글래스 회의실까지 5개의 폐쇄 공간도 눈길을 끈다. C랩의 중앙홀에는 300인치 대형 스크린과 이동식 커튼을 장착해 소규모 세미나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저녁 8시, C랩으로 삼성전자 직원 5명과 외부인 5명이 들어섰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햇빛 영화관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빈민국 말라위에 이동식 태양광 프로젝터를 연내 보내줄 계획을 세웠다. 말라위 주민들이 TV조차 제대로 못 보는 등 문화, 교육에 철저히 소외돼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 특히 전기 공급이 원활치 않아 태양광 모듈로 전력을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이를 위해 삼성의 태양전지 관련 엔지니어, 영상시스템 관련 엔지니어, 산업디자이너 등이 가세했고 사회적 기업 관계자와 대학생 3명이 모여 한 팀을 이뤘다. 삼성전자는 이 팀을 포함한 5~6개 팀에 C랩을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창고형으로 꾸민 이 연구실을 팀원들 모두가 무척 좋아한다. 이런 뜬금없는 공간이 삼성 본사에 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영순 삼성전자 부장은 “사내 직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수렴해 C랩의 어느 한구석도 놓치지 않고 의미 있게 꾸몄다. 창의력과 영감이 샘솟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실리콘밸리의 벤처식 혁신에 목말랐던 것은 글로벌 선두기업들을 빠르게 추격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에 일대 수정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삼성이 전자업계 선두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이제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세상에 없는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에게는 혁신과 창의가 핵심 키워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창조경영을 연신 강조하는 이유다.
사무공간 재배치 창의성 높이기 노력
원기찬 삼성전자 부사장은 “창의적 근무 공간인 C랩 구축은 혁신과 개방을 표방하는 삼성의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 공간을 외부에도 개방해 오픈 이노베이션을 활성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C랩에서 진행되는 개발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면 상업화와 특허 출원 등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또한 수원 구미 등 삼성전자 주요 사업장에도 C랩을 구축해 창의적인 연구 활동을 독려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삼성전자는 실리콘밸리와 뉴욕 등에 스타트업 인큐베이팅센터인 ‘액셀러레이터팀’을 신설해 스타트업 기업의 기술, 인재, 벤처문화가 조직에 수혈될 수 있도록 했다. 실리콘밸리 현지에 ‘삼성 전략&혁신센터’(손영권 사장), 오픈 이노베이션센터(데이비드 은 부사장)를 연이어 설립한 데 이어 연구소, 기술원, 사업부에도 대응 조직을 운영해 글로벌 협업 네트워크를 강화한 점도 눈길을 끈다. LG전자도 최근 실리콘밸리 지역에 신규 연구거점을 마련했다. 연구기술(R&D) 인재를 확보하고 최신 기술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혁신 DNA를 조직에 전파하려는 기대감이 깔려 있다.
안승권 LG전자 사장은 “HP의 웹OS(webOS) 개발 인력을 인수하면서 혁신적 R&D 역량이 밀집된 실리콘밸리에 새로운 R&D 연구소를 운영하게 됐다. 웹OS와 LG전자의 기술력을 결합해 LG 스마트 TV의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LG전자는 임직원들이 딱딱한 사무공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창의성을 발휘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색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LG전자 서초R&D캠퍼스 디자인센터 내에는 ‘크레페룸(Crafe Room)’이 있다. 크레페(Crafe)는 크리에이티브(Creative)와 카페(Cafe)의 합성어다. 크레페룸은 디자이너를 위한 휴식 토의 공간으로 디자인 관련 서적, 안락한 의자 등이 구비돼 있다. LG트윈타워 서관 33층에는 ‘아이디어 공작소’를 마련해 직원들이 각종 아이디어와 전략 구상에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LG는 실리콘밸리 지역에 그룹 차원의 LG북미기술센터를 지난해 오픈했다. 이곳에서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이노텍 등 각 계열사에서 파견된 연구원들이 기술 동향을 조사 연구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미국 컨트롤러업체인 LAMD 인수를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다. 낸드플래시 경쟁력을 한층 높이기 위한 컨트롤러 기술 확보가 1차 목적이지만 실리콘밸리에 소재한 LAMD를 흡수해 기업의 혁신 잠재력이 배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실리콘밸리 지역에 SK하이닉스 미국법인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곳 개발 인력과 기업을 수혈하려는 시도를 계속 모색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