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8월 24일 스티브 잡스가 애플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 뒤 많은 사람들이 애플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리고 정확히 6주 뒤 잡스는 사망했다. 스티브 잡스가 없는 애플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잡스는 애플의 처음이자 끝인 존재였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잡스 사망 직후 애플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하기도 했다.
디즈니의 경우 창업자인 월트 디즈니가 세상을 떠난 후 모든 사람들이 ‘월트라면 어떻게 했을까’만을 생각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회사가 망가지는 걸 지켜봐야 했다. 디즈니가 다시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애플도 디즈니와 같은 길을 가지 않을까 하는 예측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스티브 잡스도 월트 디즈니의 선례를 밟을까봐 걱정했다.
잡스가 떠난 뒤 1~2년이 지나면 애플은 어떻게 될까? 계속 최고 기업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물론 2014~2015년이 돼야 ‘팀 쿡 시대’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 센터에서 열린 ‘세계개발자컨퍼런스(WWDC) 2012’는 팀 쿡 시대가 어떤 모습일지 추측할 수 있는 무대가 됐다. 올해 WWDC는 과거의 애플과 미래의 애플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 컨퍼런스였다는 평가다.
애플의 시대는 계속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만들었던 로마제국. 로마제국을 만든 사람은 영웅 카이사르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카이사르가 한 이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은 로마제국과 카이사르를 동일시했다.
하지만 로마제국을 완성한 사람은 카이사르가 아닌 아우구스투스였다는 사실은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로마사를 연구하거나 당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카이사르보다 때론 아우구스투스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아우구스투스의 로마를 건드리지 못했다.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지금 애플 내부에서는 애플을 로마 시대와 비유하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애플 제국을 만든 사람은 스티브 잡스지만 애플의 태평성대를 이끌 사람은 팀 쿡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 사후 1년이 안됐음에도 애플 주가는 크게 뛰었다. 잡스가 사망한 지난해 10월 초만 하더라도 애플 주가는 400달러를 밑돌았으나 이제는 600달러를 넘었다. 올 연말에는 1000달러까지 간다는 얘기도 나온다.
미국의 한 애널리스트는 올 크리스마스 전에 ‘아이폰5’와 ‘애플TV’가 나올 것이라며 애플 주가는 1000달러가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애플이 세계 최대 이통사 차이나모바일과 손잡고 중국에 아이폰을 공급하는 것에 대한 시너지도 애플 주가에 호재가 될 것으로 관측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올해 WWDC에서는 이 같은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엔 WWDC 이후 온통 스티브 잡스 얘기뿐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환상적인 프레젠테이션이 화두가 됐고 제품은 뒷전으로 밀린 감도 없지 않았다. 아예 스티브 잡스의 키노트 등장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가 등장한 키노트와 그렇지 않은 키노트의 뉴스 밸류 차이는 컸다. 그가 소개한 제품과 소개 하지 않은 제품에 대해 미디어와 애플 팬보이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올해 WWDC의 주인공은 팀 쿡이 아니라 ‘제품’ 과 ‘서비스’였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WWDC를 마친 후 개발자와 언론 누구도 팀 쿡의 키노트 스타일이나 그의 카리스마 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플은 올해 WWDC에서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장착한 맥북프로, iOS6, 맥의 새로운 운영체제 OS X(10), 새로운 지도 서비스 맵스 등을 선보였다.
애플의 지도 서비스 ‘맵스’는 이미 구글맵이 장악하고 있는 지도 시장에서 후발 주자임이 분명하지만 3차원 지도를 내장해 마치 새로운 서비스인 것처럼 보이게 해 애플 특유의 포장술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애플을 이끄는 주요 경영진이 각각 제품을 소개했다. iOS 담당 수석부사장 스콧 포스톨이 새로운 모바일 운영체제(OS) iOS6를 소개했으며 글로벌 마케팅을 책임지는 수석부사장 필립 실러는 애플의 새로운 하드웨어 제품군 출시를 안내했다.
디자인 책임자 조나단 아이브는 영상으로 나와 새로운 맥북 시리즈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고 디자인됐는지 소개했다. WWDC에 참가한 개발자들은 아마 조나단 아이브도 무대에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자세히 소개했다.
이 가운데 팀 쿡의 역할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직 애플만이 이렇게 완벽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결합한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라는 오프닝 소개와 클로징 멘트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었다. 무엇보다 스티브 잡스가 키노트 마지막에 하던 ‘한 가지 더(One more Thing)’도 없었다. One More Thing을 기대했던 개발자들은 적잖이 실망했지만 이것이 팀 쿡의 스타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개발자들이 적응해야 했다.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애플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결정했다. 아이폰, 아이패드에 들어가는 디자인에서부터 부품, 제품의 이름조차 직접 결정했다. 특히 애플의 비밀주의는 유명하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애플 내부에서 벌어진 일을 지키지 못하면 해당 직원은 해고된다. 제품 발표 전에도 홍보를 삼가는 것은 애플의 오랜 전통이다.
팀 쿡이 CEO를 맡은 이후 애플은 이 같은 카리스마가 아닌 ‘시스템’에 의해 굴러간다는 징후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
이제 애플은 예측 가능한 회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애플의 장점은 철저한 비밀주의에 이은 깜짝쇼에 있었지만 이제 비밀주의도 점차 지키기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올해 WWDC에 나온 제품은 거의 미디어들의 예측이 들어맞았다. 엔가젯, 기즈모도, 올씽스디와 같은 전문 매체들이 각자의 소스를 토대로 만든 기사 대부분이 정확했다.
올해 WWDC 전에 언론들은 맥북의 제품군 6가지 중 5가지에 대해 메이저 업데이트가 있을 것으로 예측했으며 애플이 지도 서비스를 내놓을 것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iOS6도 많이 바뀔 것으로 보는 미디어가 많았다.
이 같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애플은 그대로 제품을 내놨다. 스티브 잡스였으면 ‘대로’하고 뒤집었을 일이다.
팀 쿡 CEO는 올씽스디가 주최한 ‘D10 컨퍼런스’에 나와 “점차 비밀주의를 지키기 어렵게 됐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애플이 내놓을 제품을 예측하는 것은 이제 특종이 아닌 상황이 된 것이다.
애플의 핵심 제품 주기도 예측 가능한 수준에 접근했다. 애플은 지난해부터 아이패드는 1월, 맥북 시리즈와 iOS 등 운영체제는 6월 WWDC에서, 아이폰은 9~10월 이벤트에서 발표하는 주기를 고정시키고 있다. 예전에는 아이폰도 WWDC에서 발표하고 맥북은 발표가 없는 등 혼선이 많았다. 특히 아이폰은 새 제품 출시 후 1년 전에는 제품을 내놓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도 지키고 있다.
외신에서 아이폰5가 9~10월쯤 내놓을 것이란 예측을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올해는 2년 만에 ‘폼팩터(제품의 외형이 되는 기본 틀)’가 바뀌는 해다. 아이폰3G가 둥근 모양의 뒤태에서 아이폰4, 4S에서는 사각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후 2년이 지난 올 연말에 폼팩터가 완전히 바뀔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때문에 아이폰5(가칭)가 올 연말 출시되고 내년에는 아이폰5S, 내후년에는 아이폰6가 나오는 순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뀐 애플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