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 <설국열차> <오피스> <항거:유관순 이야기>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자체발광 오피스> <라이프 온 마스> 등. 배우 고아성(28)이 인생의 절반을 넘게 배우로 살아오며 쌓아온 묵직한 필모그래피다. 아역 배우로 카메라 앞에 처음 섰지만 성인 배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도 이렇다 할 부침 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온 그는 어느새 자신만의 결이 살아있는, 남다른 깊이를 지닌 차세대 ‘국가대표’ 여배우로 성장했다.
<항거> <풍문으로 들었소> <라이프 온 마스> 등 최근 몇 년 사이 진중한 톤의 작품으로 주로 대중을 만나 온 고아성이지만 올 가을엔 다소 힘을 빼고 편안한 분위기로 스크린 앞에 나선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을 통해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 입사 8년 차, 업무능력은 베테랑이지만 늘 말단이라 회사 영어토익반을 다니며 승진을 꿈꾸는 세 친구가 힘을 합쳐 회사가 저지른 비리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생산관리2부 자영(고아성 분)과 마케팅부 유나(이솜 분), 회계부 보람(박혜수 분)이 우연히 회사의 폐수 방류 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회사라는 거대한 장벽에 용감하게 맞선다.
1995년이 시대적 배경인, 20세기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이수(?)한 고아성은 배우로서도, 인간적으로도 한 뼘 더 성장한 모습이다.
전작 <항거>에서 유관순 역을 맡아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고아성이 스크린 복귀작으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항거> 촬영을 마치고 다음 연기로는 명랑한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던 중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찾아왔죠. 제목부터 독특해 끌렸는데, 시나리오가 재미있고 귀여웠고, 또래 배우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나리오라 좋았어요. 세 친구가 에너지를 모아 씩씩하게 일을 이뤄가는 내용이 와 닿았죠.”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는 과정마저도 밝은 톤으로 진행된, 전반적으로 무게감을 뺀 작품인 것은 맞지만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소 묵직하다. 고아성은 “오히려 그런 지점에서 더 끌린 것 같다”며 “반전까지는 아니어도, 사건의 이면에 사회 고발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고 했다.
“밝고 명랑한 매력이 전부가 아니었어요. 그 안에 진중한 메시지도 있고, 뭉클한 지점들도 많았죠. 20대 후반 여성들이 가진 성장 스토리가 담겨있어서 알찬 영화다 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데뷔 23년 차, 겁나지만 ‘기특하다’ 말해주고파”
고아성이 맡은 이자영은 동기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입사 8년 차 베테랑 중 베테랑. 유리천장과도 같은 출신의 한계에 부딪치지만 능력만큼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팀 내 ‘에이스’다. 긍정 마인드는 기본, 오지랖은 선택이지만 그 ‘선택’ 사항이 영화 속 사건과 결부되면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시나리오에서 느낀 자영의 첫인상은 되게 매력적이었어요. 선하고 정의로운데 뻔하지만은 않고, 같이 옆에 있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 떠올랐어요. 제가 느꼈던 주변의 선한 사람들의 매력을 복합적으로 모아서 자영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극중 유쾌하고 씩씩한 자영과 달리 실제 성격은 내성적이라는 고아성. 하지만 자영을 만난 이후엔 “많이 바뀌었다”며 배시시 웃는다. “사실 자영과 비슷한 점은 많이 없어요. 원래는 내성적인 편인데, 자영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면서는 저를 바꾸려고 노력했어요. 의도적으로 에너지를 끌어올려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도 하고, 좀 더 외향적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그런 자영을 만났기 때문일까. 고아성은 영화가 지닌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앞서, 자영이라는 인물 자체가 지닌 매력을 관객에게 잘 보여주고 싶었다는 ‘배우’로서 기본이 되는 목표를 갖고 작업에 임했다. “자영이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을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자영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 생각했죠. 8년째 말단 사원이고, 진짜 해야 할 일은 못하는 상황인데도 자기 일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영화에 잘 드러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화 하나 받을 때도 만족스럽게 받고, 서류를 찾고 정리하는 것도 꼼꼼하게 정성스럽게 하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1992년생인 고아성에게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95년은 사진을 접해야 어렴풋하게 기억날 만한 시절이다. 때문에 당시 사회상에 대한 학습은 필수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도움이 된 존재는 이모였다. “이모가 1995년도에 큰 회사에서 일하셨는데,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 가보면 이모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어요. 잔상일 수도 있지만, 그 시대 의상을 입고 분장을 마치고 보니 당시의 커리어우먼이라는 사람들이 자료화면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뇌리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모에게 회사 생활할 때 찍은 사진도 보여달라고 하고,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1990년대가 과거이긴 하지만 그리 먼 과거가 아니고, 실제로 당시를 겪은 분들이 많기 때문에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영화에서 눈에 띄는 장면은 학력과 성별에 따른 차별이 만연해 있던 사회상. 제일 먼저 출근해 커피 프림 설탕을 팀원들의 취향별로 맞춰 모닝커피를 준비해야 하고, 남성 직원의 구두를 닦아오는 게 당연시되는 직무 중 하나인 ‘고졸 출신’ 말단 사원들이 사복 아닌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도 꽤나 인상적이다.
“연기를 하면서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이 있어요. 자영이 폐수 무단방류 현장에 대한 증언을 하기 위해 검사에게 다가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라고 하는데, 돌아온 답은 ‘아가씨, 담배 좀 사다줄래?’였어요. 진심으로 서운했어요. 시대극이나 당시 상황을 다루는 작품을 할 때 고증과 만드는 사람의 태도가 병행돼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영화 초반에 자영이 회사에 출근해서 쓰레기부터 치우고 심부름을 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 장면만 제시됐다면 고증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을 거예요. 그 장면에서 김원해 선배가 타 부서와 전화통화를 끊으며 ‘왜 남의 일을 우리한테 시키고 그래?’라고 하는 대사가 겹쳐지는데, 아 이게 감독님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죠. 작품의 결을 그때 알게 됐어요.”
▶“내부비리 파헤치다 보니 잠재된 정의감 나와”
이와 같은 결을 보여주는 과정은 고아성의 ‘원맨쇼’ 아닌, 함께 그려가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국내 굴지의 기업의 비리를 파헤치는 과정에서는 영어토익반 구성원들의 연대가 돋보이는데, 촬영 현장에도 ‘함께’의 분위기와 가치가 자연스럽게 스며있었다.
“작품을 할 때마다 배우들이 각자 준비해가는 게 많겠지만, 현장에 가면 예상치 못한 변수도 많고 달라지는 게 많아요. 그런 환경이다 보니 공간과 사람이 주는 기운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인데, 이 영화는 호화찬란한 대기업 사무실, 로비에서 을지로 낡은 공간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전환도 새로웠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결속되는 느낌이 있었죠.”
영어토익반 3인방으로 함께 활약한 이솜, 박혜수의 존재 역시 든든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행복한 촬영 현장이었어요. 또래 배우들이 함께하니 에너지가 넘쳤죠. 이솜, 저, 박혜수 모두 두 살 터울이지만 영화의 취지에 맞게 아메리칸 스타일로 다 친구로 지냈어요. 진짜 친구처럼 지내서 정말 저희의 친한 모습이 담긴 느낌이었죠.”
사건이 해결되는 결정적 순간은 다소 판타지적이기도 하지만, 고아성, 이솜, 박혜수뿐 아니라 영어토익반 전원의 연대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뭉클함을 준다. 하나의 뜻을 향해 나아가면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 이에 대해 고아성은 “그게 이 영화의 특징인 것 같다”면서 “자영의 내면과 사건을 해결해가는 추진력도 중요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이뤄낸다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며 연기했다”고 말했다.
풀릴 듯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사건이었지만 결국엔 승리를 쟁취하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고아성은 “아무래도 결말을 알고 연기하는 것이지만 연기하는 과정에서 (풀리지 않을 때의) 감정이 쌓일 때가 있다”면서 “그래서 아무래도 엔딩 장면을 찍을 때, 연기 외적으로 통쾌한 심정도 있었다”며 밝게 웃었다.
그의 눈빛, 그가 선봉에 선 행동에서 정의로운 결말이 나온다는 점. 그러한 작품이 최근 들어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선 고아성의 작품 선택 시 ‘선구안’도 일정 몫을 했을 터. 이에 고아성은 “사실 의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돌이켜보면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며 “뭔가 의미 있는 캐릭터에 더 끌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캐릭터란 무엇일까. 답변에 앞서 잠시 숨을 고른 고아성은 “사실 명확한 기준은 모르겠다”며 “시나리오를 보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연기하는 재미가 두 가지인데, 그걸 내부에서 찾을 때도 있고 외부에서 찾을 때도 있어요. 내부란, 내가 느껴왔던 인간의 진짜 모습을 연기로 표현했을 때 느끼는 쾌감이고, 외부는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 때 내가 정성들인 숨은 의미를 알아주셨을 때 보람을 느끼죠. 그 모든 과정에서 캐릭터에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아요. 제가 믿고 있는 세상의 일부분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캐릭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고아성에게 영화 <오피스>로 시작해 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 <라이프 온 마스>를 지나 네 번째로 만난 오피스물이다. “작품마다 소품으로 사용된 사원증을 다 모아놨다”며 뿌듯함을 드러낸 고아성. 오피스물마다 ‘을(乙)’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데 대한 부담은 없는지 묻자 “할 때마다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네 번째 오피스물… 사원증 다 모아뒀죠”
“일단 그런 캐릭터를 좋아해서 하게 되긴 하는데, 할 때마다 쉽지 않은 일이긴 해요. 이자영도 어떻게 보면 비슷한 환경이지만, 더 든든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은 좀 달랐죠. 그래서 연기할 때도, 기존 캐릭터와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전반적으로 선(善)의 기운이 강한 캐릭터일 때 줄 수 있는 이미지 변신의 한계에 대한 지적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며 “딱 하나만 밝은 작품 하고 악역을 하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런 것만 하면 작품이나 인물 선택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는 경각심이 생기네요. 그런데 어쨌든, 이번엔 밝은 영화가 너무 오랜만이라 너무 좋았어요 하하.”
작품이 지닌 기분 좋은 기운은 외적으로도 퍼져나가고 있다. 올 한 해 대한민국 전체를 잠식했던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가 심각한 확산세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어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극장가도 활기를 찾을 준비 중인 것. 고아성은 “아무래도 영화가 시대극이기도 하고,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나이대 분들을 많이 생각하면서 준비하긴 했다. 그런데 홍보하다 보니 오히려 젊은 친구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더라”면서 “그 점이 놀랍기도 한데, 뭔가 저희 영화가, 요즘처럼 힘든 시기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눈을 반짝였다.
‘자영’ 입장에서 특별한 관전 포인트도 남겼다. “자영을 연기한 사람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한 사람의 작은 성장이 있어요. 물론 힘들게 들어간 회사에서, 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회사를 ‘배신’해야 한다는 고민이 있는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고 고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영이 작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커졌구나, 큰 인물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영화 속 대사에도 나오는 표현인데,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어’랄까요? 관객 분들도 그런 부분을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영화 <괴물>(2006)로 두각을 보인 이후 고아성의 작품 활동에 특별한 ‘쉼’이란 없었다. 오랜 배우 생활이 지금 그에게 장단으로 다가오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
“음… 장점은 분명히 있어요. 아무래도 성인이 되고 연기자가 된 친구들보다는 대중에 드는 막연한 두려움은 덜해요. 어려서부터 나를 봐준 사람들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어요. 하지만 단점이라고 하면… 흑역사가 많죠. (웃음) 옛날에 한마디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요.”
서른을 바라보는 이 시점, 누군가에겐 완연한 ‘배우’의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아역 시절 준 임팩트가 워낙 강하다 보니 아직도 혹자는 그를 어리게 바라보기도 한다. 이에 대해 고아성 스스로의 느낌은 어떤지 묻자 “여전히 다양한 반응이 있어서 단정은 못 하겠지만 20대 중반 이후엔 그래도 많이들 성인 배우로 봐주신 것 같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고등학생 역할은 안 들어오더라”며 배시시 웃기도 했다.
올해 스물아홉 살. 소위 ‘아홉수’라고도 하지만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은근하게 대중과 교감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고아성에게 30대를 앞둔 속내를 묻자 “크게 달라지는 게 있을까 싶으면서도 은근히 기대가 된다”며 싱긋 웃는다.
지나온 20대의 시간도 담담하게 돌아봤다. “일단 20대 안에서도 변화는 있었던 것 같아요. 20대 초반에는 장르적으로도 캐릭터적으로도 다양한 도전을 했어요. 악역도 하고 살인마도 하고요. 그런데 20대 후반 들어서는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 닮고 싶은 사람을 연기하게 된 것 같아요. 이자영도 마찬가지였고요. 뭔가 한동안 근 몇 년간은 선한 기운을 주는 사람에게 많이 빠져있는 것 같아요.”
‘연기’와 ‘작품’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변화 한편에, 내면과 마음가짐의 변화도 있단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경계하는 태도는, 대중을 하나의 객체로 보는 거예요. 무슨 일이든 많은 반응이 존재하게 되는데, 하나의 사람에 하나의 반응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하거든요. 그런 걸 경계하게 됐죠. 오랜 세월 막연하게 그런 대상을 생각하면서, 되게 고마운 게 있어요.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고, 자영이처럼 누군가에게 내가 하는 일이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