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도연(42)은 코끝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 20여 년 전, 데뷔 초창기부터 그녀를 설명하는 것이었으니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한 매력 포인트다. 아직도 남성들 여럿은 그녀가 코끝을 찡긋거릴 때, 본인이 영화 <너는 내 운명>의 황정민이나 드라마 <별을 쏘다>의 조인성이 된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린다.
신작 영화 <무뢰한>(감독 오승욱)을 들고 관객을 찾아온 전도연은 이번에는 그 살가운 코 찡긋 웃음을 온전히 전하진 않는다. 거칠고 투박하며 다소 무거운 영화이기 때문이다. 형사와 살인자의 여자라는 어쩌면, 양극단의 남녀가 만나 엇갈리는 진심과 거짓을 그린 하드보일드 멜로. 장르는 멜로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드라이하고 퍽퍽하다는 말이다. 불친절하고, 어떤 이에게는 불편하게 비칠 수도 있다.
진심을 숨긴 형사와 거짓이라도 믿고 싶은 살인자의 여자, 두 남녀의 피할 수 없는 감정이 ‘무뢰한’ 러닝타임 전반에 흐른다. 전도연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간 애인을 기다리는 술집 여자 김혜경 역을 맡아 절망과 퇴폐, 순수와 강단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선보인다. 김남길이 혜경의 애인인 살인자를 잡으려는 형사 정재곤 역을 맡아 글자 그대로 ‘무뢰한’으로 변신한다.
칸의 여왕, 무뢰한의 여자
현실에서 만난 전도연은 영화가 설명하는 김혜경과는 달랐다. 매번 그렇지만 작품 속 그녀와 캐릭터들은 다른 부분이 꽤 많다. 극 중 인물에 ‘빙의’됐을 뿐이다. 이번에도 그녀는 김혜경으로 완벽히 변신, 관객들에게 몰입감을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칸의 여왕’이 괜히 붙은 별명이 아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믿고 보는 배우’ 중 한 명인 전도연은 ‘무뢰한’ 속의 김혜경으로 또다시 관객을 사로잡는다. 에이즈 보균자인 다방 아가씨(너는 내 운명), 천연덕스러운 사기꾼(카운트다운), 순수했으나 점점 욕망에 물들어가는 하녀(하녀), 평범한 주부였으나 마약밀수범에 속아 이국땅에서 2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여성(집으로 가는 길) 등 최근작만 봐도 탄탄한 연기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역할을 맡아 호평을 끌어냈던 이 여배우. 연기력을 칭찬하자, 전도연은 “연기력도 있어야 하지만 미모도 있어야 한다”고 농을 치며 웃었다. 큰 스크린을 통해 영화 <무뢰한>을 처음 본 뒤 느낌은 ‘대만족’이었다. “궁금했는데 잘 나온 것 같다”고 코 찡긋 웃음을 보냈다.
전도연은 몰입하고 또 몰입했다. 처음 받아본 <무뢰한>의 시나리오가 거칠고 투박했기 때문이다. 2000년 영화 <킬리만자로>를 연출한 경험이 있는 오승욱 감독이 시나리오를 직접 쓰긴 했지만, 그의 초반 시나리오 속에서 여성 캐릭터는 그리 두드러지진 않았다. 오 감독도 그렇고, <신세계>와 <남자가 사랑할 때> 등 남자이야기에 특화된 영화제작사 사나이픽쳐스가 제작을 맡아 남성성이 강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 속 김혜경의 삶의 고난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이된다. 전도연의 공이 상당하다.
제작진과 스태프에 따르면 전도연은 오 감독과 함께 현장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오 감독이 여자를 잘 몰랐기에 전도연이 나섰다. 오 감독이 “현장에서 전도연 씨에게 많이 혼났다”고 할 정도다. 물론 장난이 반쯤 섞여 있는 말이긴 하지만, 베테랑 여배우에게 일정 부분 빚졌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하드보일드 안에 녹아 있는 멜로 장르가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했는데, 극 중 김혜경은 사랑이나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희망이 없는 여자로 보였어요. 하지만 전 꿈을 가지고 사는 김혜경을 표현하고 싶었죠. 그리고 그 안에서, 이런 힘겨운 삶 속에도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했죠.(웃음)”
시나리오 속에 빙의된 여배우
무뢰한들에게 이용당하는 인상이 강한 김혜경. 전도연은 그녀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김혜경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냉정하고 아픔을 못 느낄 것 같은 차가운 여자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시나리오를 읽으며 알았죠. 만약에 누군가의 사랑을 믿지 않고 이용만 당한다고 했으면, 김혜경 같은 행동들은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김혜경은 겉모습과 다르게 누군가에게 안주하고 싶은 여린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혼자서도 살 수 있지만 사랑과 함께 미래를 꿈꾸는 여자라고 생각했죠.”
전도연은 이번 연기를 하면서 “‘절대 김혜경이 다른 남자 영화처럼 대상화되지는 말자’, ‘그렇게 그리지 말자’고 감독과 얘기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감독은 여주인공의 말처럼, 김혜경을 소비되는 여성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모두에게 당하기만 하는 그녀의 삶이 비루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강단은 있다. 끝까지 살아갈 힘도 전해진다. 크레디트가 올라간 뒤 김혜경의 훗날 이야기가 궁금해질 정도다. 전도연은 “나도 영화를 보고 난 후 비로소 김혜경이 어떤 여자인지 알 것 같았다”며 “마음이 아파 울음이 났지만 간신히 참아냈다”고 했다.
연기 베테랑임에도 스태프들에게 “나 잘하고 있어?”라며 끊임없이 되물으며 만족할 때까지 연습하고 촬영하기를 반복했던 전도연은 “김혜경이 대사가 많은데 그것에 구애를 받기 시작하면 연기하는데 방해가 되고 내가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계속 대본을 보고 한 번 볼 것을 두 번, 세 번 반복적으로 보게 됐다”고 했다. ‘칸의 여왕’은 진정한 연습의 여왕이어야 또 따라붙을 수 있는 수식어이기도 한 듯하다.
빨간색 원피스가 바로 민폐 패션
전도연의 패션 감각도 김혜경을 연기하는 데 한몫했다. 본인의 의상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상 중 일부가 김혜경을 더 김혜경답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혜경이라는 인물은 외형적으로도 보이는 모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의상이 많은 걸 표현할 수 있거든요. 특히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지만, 결코 구질구질한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사비를 들여 산 옷도 있어요(웃음). 스타일리스트와 상의해서 극 중 인물과 어울리는 의상을 골라냈죠.”
극 중 등장한 3벌 정도가 본인의 옷이다. 빨간색 원피스가 유독 눈에 띈다. 그녀는 “민폐하객 패션으로 지적받았던 바로 그 옷”이라고 폭소했다. 지난 2013년 배우 이병헌과 이민정이 결혼했을 때 이 원피스를 입고 가 플래시 세례를 잔뜩 받았다. 이번에는 적재적소 선택이다. 전도연은 연기뿐 아니라, 극 중 외모(혹은 미모)에도 만족한 듯 보였다. 속된 말로 한물 간 ‘텐프로’지만 무뢰한이 넘쳐나는 삶에서 꿋꿋하게 걸어 나가는, 누가 시비를 걸고 무시하면 “나, 김혜경이야!”를 외칠 것 같은 모습이 잘 표현됐으니까.
전도연은 후배 김남길을 칭찬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처음에는 ‘실망’이었다. 김남길로부터 풍겨지는 나쁜 남자 이미지가 정재곤 형사와 어울렸는데, 보기와는 달리 현실 속 김남길은 아이 같았고 장난을 많이 쳤으며 애교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았다. “이 친구가 과연 정재곤 형사 역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까지 됐다. 하지만 배우는 “레디, 액션!” 사인이 들어가면 변하는가 보다. 실망이 만족으로 바뀌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좋은 배우는 평상시 어떤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연기할 때 집중력 있게 몰입해서 극 중 인물화되는 것 같아요. 또 좋은 배우들은 나만이 아니라 상대방이 빛이 나야 자신도 빛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은데, 남길 씨도 그걸 잘 아는 배우였죠. 김남길이라는 배우 때문에 웃으면서 촬영했던 것 같아요.”
칸에서 받는 자극은 설레고 기뻐
올해 제68회 칸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됐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지난 2007년 ‘칸의 꽃’이 됐던 전도연은 2010년에는 영화 <하녀>가 경쟁 부문에 진출했고, 지난해엔 심사위원 자격으로 다녀왔다. 국내 배우가 칸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건 최초였다. 우쭐할 법하지만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올해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전도연은 “칸 초청은 항상 감사하고 영광스럽다”며 “그곳에서 받을 자극에 대해 또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올 내 자신에 대해 설레기도 하고 기쁘다”고 좋아했다. 그러면서 “주목할 만한 시선은 배우보다는 감독님을 향한 관심이 더 높은 부문”이라며 “감독님의 15년 내공이 칸에서도 긍정적으로 보인 게 아닐까 한다”고 공을 돌렸다.
상을 타든 못 타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제 역을 톡톡히 해냈으니 후회는 없다. 그녀는 “사실 지난해 칸의 심사위원이 마지막 칸 여행이 될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은퇴를 선언하지 않는 한 칸은 전도연을 언제고 또 불러내 레드카펫 위에 세울 것 같다. 나아가 또 한 번 칸의 주인공이 돼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전도연은 올해 영화 <협녀:칼의 기억>으로도 돌아온다. 이병헌, 김고은과 함께한 액션 사극이다. 김고은이 이 영화 때문에 영화 <차이나타운>의 액션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액션의 강도가 높고, 땀 흘리고 운동하는 걸 좋아한다는 전도연도 연기하기 꽤 힘들었다고 하는 등 배우들 모두 고생한 작품이다. 영화계에서는 ‘이병헌의 불미스러운 이슈’가 흥행에 영향을 미칠지 설왕설래다. 같은 소속사 후배인 배우 공유와 함께한 멜로 <남과 여>도 올가을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전도연도 말 많고 탈 많은 <협녀:칼의 기억>의 대중 반응이 더 궁금할 듯하다.
전도연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제 또 다른 모습을 보여드려야죠. 역할은 잘 모르겠고, 재미있는 코미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전도연의 코미디 기대되시나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