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수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부원장 | 6촌 이내 서울공대 20명 동문가족 “카멜레온 같은 변화무쌍함이 공학도의 미덕이죠”
입력 : 2015.06.05 14:15:02
“저 같은 사람이 인터뷰감이 될까요? 저희 같은 집도 사실 찾아보면 많을 텐데요.(웃음)”
수차례 같은 이유로 인터뷰를 고사한 임진수 해양수산개발원 부원장의 마음을 힘들게 돌렸다. 흥미로운 인터뷰인 동시에 요즘 세상에 드문 가풍을 지닌 가문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임 부원장의 집안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공학도가 득실한 명문가다. 임 부원장과 그의 아버지와 아들을 포함해 6촌 이내에 서울공대 출신(재학생 포함)만 20명이다.
명절에 한자리에 모이면 웬만큼 큰 지역 동문회에 참석하는 인원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한적한 시골마을에는 ‘축 서울공대 입학’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리고 잔치가 벌어진다. 한 가문에서 하나 나오기도 힘들다는 일류 공학도가 많이도 배출됐지만 정작 임 부원장 본인은 인터뷰 내내 “큰일도 아니다”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절마다 열리는 공대 동문회
“아버님이 처음이시죠. 당시 경성제대와 고등공업학교가 있다가 두 개가 합쳐졌는데 저희 부친이 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해 1950년에 졸업하셨습니다. 서울공대 토목과 4회 격이시죠. 저 역시 같은 학교에 입학했지만 특별히 공대에 들어가라고 권하시진 않았어요. 크면서 보고 자란 것 때문에 으레 ‘공대 가야겠다’고 생각은 했던 것 같습니다.”
다소 뻔하지만 많은 학부모들이 궁금할 법한 질문인 문턱 높은 명문대학 입학 비결을 물었더니 허무한 대답이 돌아왔다.
“학원도 보내고 과외도 하고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도록 시키죠.(웃음) 무조건 공대가라는 분위기는 절대 아니에요. 그런데 가족들이 이과적 성향이 강하긴 한 것 같습니다. 다들 수학을 좋아해요. 저희 할아버님이 개성 분이신데 상인 마인드가 있으셔서 상당히 실용적인 분이셨어요. 약간씩은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3대라는 세월 동안 세상도 많이 바뀌었다. 특히 공대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과거와 현재의 온도차가 커진 것도 실감하는지 물었다.
“사실 저희 때는 큰 고민 없이 공대 갔거든요.(웃음) 예비고사 수석이 자연계에서 나왔고 서울대 물리학과 혹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어요. 외환위기 이후 먹고살기 힘들어지면서 의대 진학률이 높아진 것이죠.”
살림살이 빡빡해진 세상에 임 부원장의 자녀나 조카들은 취업전선에서 홀대 받는 공대를 고수하고 있는 연유는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제 기준으로 처가, 외가, 친가까지 6촌 이내만 따져보니 20명이더라고요. 특별히 자녀들에게 절대 공대 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하는 편인데 집안 분위기가 그런 것 같아요. 공교롭게 제 사위도 공대생인데 어떻게 알고 고를 수 있겠습니까?(웃음) 어쩌다 보니 딸아이가 우연찮게 그렇게 만나고 있더라고요.”
공대생들이 득실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DNA를 물려받지 않은 이가 있으니 바로 임 부원장의 딸이다. 워싱턴 주립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딸 역시 상당한 인재인데 본의 아닌 오해도 받았다고 한다.
“몇 년 전 서울대학교 교내 언론사에 가족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기사 댓글에 누가 ‘이 집은 공부 못하면 유학 보내는 구나’라고 써놓은 거예요. 그걸 어떻게 보고 딸아이의 친구가 이거 ‘네 얘기다. 네 얘기’라고 놀렸다고 하더라고요. 가족들이 다 같이 한바탕 웃고 넘겼습니다.”
임진수 부원장의 가족사진
공학도는 카멜레온이 돼야 한다
임 부원장은 조선업이 창창했던 1979년 유수의 인재들이 모인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다. 졸업 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후 몇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미국 MIT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공대생들이 으레 선택한 엔지니어의 삶을 접어두고 그는 해양·정책 분야를 파기 시작했다.
“직장에 들어가서 조선소에서 선박 설계나 건축 분야 등 엔지니어로서 일했죠. 당시는 선박산업이 워낙 발전하던 시기라 조선업에 투신하는 공대생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유학을 결심하면서 엔지니어를 백그라운드로 하고 다른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해운이나 항만 정책 등을 연구하는 쪽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요즘처럼 학문 간 융합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이었던지라 주변에서 몇몇은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분야를 파며 유학길에서 돌아와 1989년부터 해양수산개발원에서 지금까지 연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 조선과 해운 분야의 엔지니어로서 소양을 갖춘 그는 현재 해운 정책, 항만운영 정책, 해양플랜트 산업, 북극해 정책 등의 분야를 섭렵하며 국내에 손꼽히는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대학시절 교수님 한 분이 하신 얘기가 인상 깊었어요. 자연과학과 공학이 어떻게 다르냐고 자문하시고는 ‘물리학자는 태엽을 잘 정교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나 공학도는 태엽을 어디에 쓸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장난감에 쓸 것인지 시계에 들어갈 태엽인지 정확도와 비용을 생각하는 경영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이 요지였죠.”
공학도로서 자부심과 비전에 대한 임 부원장의 소신은 확고했다. 숫자나 논리에 밝은 엔지니어는 어떤 분야에서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 교수들에게 들어 보니 한국이 크게 발전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다른 나라보다 공대 출신 CEO가 많아서라고 하더라고요. 경제가 크게 발전하는 시기에는 기술 습득이 빠른 엔지니어들이 경영 마인드를 갖춰 조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거죠. 원로들을 보면 이공계 CEO들이 많잖아요? 대표적으로 제 장인(이춘림 전 현대중공업 회장)도 서울공대 토목과를 나오셨는데 50~60년 한 그룹에 다니시며 회장에도 오르셨거든요. 공학 베이스를 가지고 사업적인 마인드를 갖추셨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엔지니어가 사업에 성공하기 위한 필수요건으로 산업 트렌드를 읽는 센스와 타 분야와의 융합 능력을 들었다.
“김택진, 이찬진 씨 등은 엔지니어가 베이스가 됐지만 비즈니스 마인드가 잘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분야에 진출했어도 분명 성공했을 것 같아요. 스티브 잡스 같은 경우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사람이지 온전한 엔지니어라고 보기 힘들거든요. 그렇지만 공학적 베이스를 잘 아는 상태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던 것이죠.”
이어서 그는 이 시대 청춘들이 지나치게 유행을 좇아 진로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예전에 서울대 섬유공학과가 최고로 잘나갈 때가 있었어요. 제 동기들이 졸업해서 회사 중역자리에 갔을 때 회사가 어려워져 물러나야 했죠. 신입생이라 치면 4년 공부하고 군대 가고 해서 사회에 나갈 때 보면 이미 산업 동향은 바뀔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자기가 원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특히 임 부원장은 공대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이나 현재 공대생들에게 현재 산업 트렌드에 얽매이지 말라는 뼈 있는 조언을 잊지 않았다.
“번개라는 별명으로 중식 분야에서 성공한 사장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사실 중국집은 로우 테크놀로지라고 할 수 있고 많은 경쟁자가 상주한다는 점에서 레드오션에 가깝죠. 그런데 이분은 성공요인이 충분한 전략이 있었어요. 짜장면, 탕수육 등 푸짐하게 요리를 시키는 경우 일반적으로 군만두를 서비스하는 대신 같은 값의 고량주를 주더라고요. 이분처럼 많은 사람들이 뛰어드는 분야에 진출해서 성공하려면 자신만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경쟁이 치열해진 분야는 레드오션으로 갈 가능성이 큰 것이죠. 스티브 잡스는 수백 수천만명 중에 하나거든요. 복권에 투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죠. 현재 잘되는 산업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는 것이 가장 최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