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의 흥행몰이가 심상치 않다. 지난 2월 22일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이미 관객 수 1000만명을 넘어섰고, 역대 관객 수 2위를 기록했던 <아바타>를 넘어 1400만명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 기세라면 국내 최대 관객 동원을 기록한 <명량>의 기록까지 넘볼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국제시장>이 이처럼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한국전쟁부터 시작되는 한국 근현대사를 영화 곳곳에 녹인 윤제균 감독의 탄탄한 시나리오와 주연배우로 나선 황정민·김윤진의 열연 덕분이다. 특히 극중에서 ‘영자’를 맡은 김윤진은 과거 <쉬리>에서 보여줬던 여전사 이미지에서 사랑스럽고 푸근한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그녀가 오는 3월에는 가슴속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배역으로 미국 시청자들 앞에 등장한다. 미국 드라마 <미스트리스> 시즌3의 주인공 카렌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여전사에서 모성애 강한 어머니로 변신하며, 가장 한국적인 여배우란 찬사를 받고 있는 배우 김윤진.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그녀의 발자취를 살펴봤다.
2002년 청룡영화제 남녀주연상을 수상한 김윤진과 설경구
여전사에서 월드 스타로 변신 또 변신
미국 이민 1.5세대인 배우 김윤진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20대 중반에 연예계에 데뷔했다. 첫 작품은 5·18민주화운동을 모티브로 삼은 1996년 드라마 <화려한 휴가>였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우울증에 시달리는 강미림 역을 맡아 정신적인 아픔을 겪다가 자살까지 하는 비련의 여인을 잘 연기했다.
<화려한 휴가>를 통해 가능성을 입증한 그녀는 곧바로 강제규 감독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트로 평가받는 <쉬리>의 여주인공에 낙점됐다.
당시 최고 인기 배우였던 한석규와 함께 열연한 그녀는 극중에서 남파 간첩 역을 맡아 사랑과 조국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주인공의 내면적인 아픔을 잘 표현해냈다. 뒤이어 그녀는 변영주 감독의 <밀애>에 출연하며 파격적인 정사신을 감행, 2002년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윤진은 대표 여전사 캐릭터와 관능미를 모두 갖춘 국내 대표 여배우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가 이듬해인 2003년 급작스레 국내 활동을 정리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자신이 유년을 보낸 미국으로 돌아가 여배우로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겠다고 밝힌 것이다. 당시 연예계에서는 그녀의 이 같은 도전을 신선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실제 김윤진은 미국으로 건너간 뒤 배역을 따기 위해 수차례 오디션을 봤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대표 여배우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미국에서는 한국에서의 필모그래피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오디션을 보며 도전을 계속했다. 그 결과 2004년 미국 ABC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시즌제 드라마 <로스트>의 권선화 역을 따내며 할리우드에 당당히 입성했다. 시즌 6까지 방송된 이 드라마를 통해 김윤진은 미 새턴어워즈 여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로스트>의 성공은 그녀에게 월드 스타로서의 명예를 안겨줬다. 그녀는 <로스트>가 방영되는 내내 할리우드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2007년에는 MSN이 선정한 ‘세계 정상급 미녀 22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랑받는 여인과 아내로의 변신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녀는 2010년이 되어서 비로소 한 템포 쉬어 간다. 자신과 함께 8년 넘게 일해 온 파트너인 박정혁 자이온엔터테인먼트 대표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아 결혼했다. 당시 그녀의 소속사는 “2007년 출간한 자서전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란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서로 가까워졌다”고 밝혔다. 박정혁 씨는 이후 김윤진이 주연한 영화 <하모니>의 제작자로도 참여했다.
결혼 이후에도 여전히 미드 <로스트>와 국내의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녀가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에 참여한다고 하자 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이전까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의 여주인공을 주로 맡아왔던 그녀가 조연급에 불과한 <국제시장>의 ‘영자’ 역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감독님이 ‘너 아니면 안 된다’며 시나리오를 주셨다. 대본을 읽는 내내 다른 여배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극중에서 영자는 어린 나이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서독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아마도 감독님은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갔던 내가 그런 영자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영자 역할에 빠진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영자가 덕수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점이 끌렸다. 이전까지 나는 주로 강한 여성을 연기했지만, 사실 사랑받는 여자를 연기하고 싶었다. 영자는 그런 점에서 내 마음을 꽉 잡은 역할이었다.”
김윤진은 영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영자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 같이 밝혔다. 언제나 강한 여전사와 모성애 강한 어머니를 연기했지만, 자신도 사랑받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실제 김윤진은 <국제시장>에서 영자라는 인물의 20대에서 70대까지를 연기했다. 영화를 봤던 이들이라면 여전사 이미지가 강했던 선입견과 달리 김윤진이라는 배우가 ‘이렇게 사랑스러웠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20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지켜만 봐도 뭉클한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도 같이 보여준다. 그야말로 완벽한 영자의 헌신이다.
영화 속 영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서독에 간호사로 갔고, 역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파독 광부로 온 덕수를 만나게 된다. 이런 상황을 김윤진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제대로 표현해냈다. 그녀는 이민 1.5세대로 10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시 미국에서 부모님을 도와 장사를 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 휴관한 경마장에 펼쳐진 플라마켓(벼룩시장)에서 텐트를 치고 물건을 팔았다”고 회상했다. 도회적인 이미지에 가려졌지만, 그녀 역시 어려움을 딛고 살아온 세대였던 것이다.
또 다른 도전, <미스트리스> 카렌
<국제시장> 영자를 통해 여전사에서 사랑스런 여인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김윤진은 오는 3월 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미국 ABC방송국에서 방영될 예정인 시즌제 드라마 <미스트리스>의 주연인 카렌 역으로 캐스팅됐기 때문이다. 김윤진은 이 드라마에서 가슴속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카렌 역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계획이다.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동양인에게 액션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 살 때도 동양인들에 대해서 그런 편견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쪽은 좀 거부감이 생기더라고요. 정말 연기를 할 수 있는 역할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한국 대표 여전사에서 아이를 향한 모성애 강한 엄마로의 변신에 이어,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대표 여배우로 성장한 배우 김윤진.
정상의 자리에서 안주하지 않고, 미국 할리우드에서 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그녀의 앞날이 <국제시장>의 영자처럼 행복하길 기대한다.
[서종열 기자 사진 매경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