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진주에 자리한 접착제 제조업체 제이알(JR)이 조용히 주목받고 있다. 2006년부터 친환경 소재로 연구를 시작해 2012년 말 문구용 제품을 선보인 JR의 근간은 마늘. 접착제 제조업체의 주원료가 어떻게 마늘일까 내심 미덥지 않지만 막상 제품을 들여다보면 알싸한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고분자화학 석사 논문을 앞두고 있을 때 담당 교수님께 천연재료에 대한 의견을 말씀드렸는데 장기간 보관이나 접착강도 때문에 어렵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우연히 마늘을 구울 때 끈끈한 진액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이거다 싶었습니다. 2006년 개발을 시작하고선 2008년에 완성했어요. 그 동안 벌크로 납품했는데, 디자인을 가미한 문구용 제품을 2012년 12월에 출시했습니다.”
2009년 법인 설립 이후 묵묵히 JR을 이끌고 있는 이진화 대표는 드라마틱한 창업스토리가 알려지며 청년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여성경영인이다. 그녀가 강연을 위해 강단에 오른 건 2012년 말, 환경부가 주최한 ‘TED×ITAEWON’ 무대에 오르며 관심을 모았고, 그해 한국여성발명협회와 특허청이 주최한 여성발명인상을 수상했다. 최근엔 TV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초대돼 가감 없이 소개한 창업 도전기가 잔잔한 감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동안 JR도 작지만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2010년에 완공한 제1공장에 이어 2012년 제2공장을 완공했고, ‘경남 글로벌 IP 스타기업’(2011년 특허청), ‘창업스토리 공모전 대상’(2011년 중소기업청) 등을 수상하며 그해 지식경제부에서 녹색기술을 인정받았다.
“2009년 12월 16일에 법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사업은 2010년 1월 1일부터 시작했어요. 기존에 없던 제품을 만들다보니 공장이 급선무였죠. 2011년까진 건물신축하고 설비를 갖추느라 별다른 매출이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아직은 매출이 보잘 것 없습니다. 2012년에 4억원, 지난해 6억원을 올렸는데 그래도 40%나 성장했습니다.(웃음)”
JRN이란 브랜드로 출시된 문구용 3종세트
마늘항균 화학첨가물 없어
물론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늘 위기다. JR설립 전부터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던 이 대표는 창업 당시 가족, 친지, 창업멤버들이 십시일반으로 투자한 돈에 대출금을 얹어 대들보를 올렸다. 하지만 실험실에선 별 문제없이 생산되던 접착제가 대량생산에 들어가자 불량품이 나왔다. 무려 10개월이나 점검해 적절한 배합을 찾아야만 했다.
“마늘 천연접착제는 일반 화합접착제에 비해 결코 성능이 뒤처지지 않습니다. 공인 실험기관을 통해 유해성분이 없다는 결과도 얻었어요. 아이들이 쓰기에 더없이 좋은 문구죠. 미국이나 유럽에서 전분이나 설탕으로 만든 식물성 접착제가 개발되긴 했어도 곰팡이 때문에 화학첨가물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저희가 만든 접착제는 마늘의 항균성분 덕분에 화학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았습니다.”
각 기관을 통해 제품의 질과 기술력은 인정받았지만 막상 제품을 출시하고 보니 홍보나 유통경로에 대한 투자금이 문제였다.
“지난해는 굉장히 힘든 한 해였어요.(웃음) 많은 업체가 제품을 보고 연락해오는데 막상 산업용으로 적용되려면 오랜 테스트 기간이 필요하더군요. 예를 들어 가구용 접착제를 문의하면 실험실이 아니라 가구공장에서 직접 가구를 완성해야 합니다. 완성된 가구가 틀어짐은 없는지 1~2년간 지켜봐야 하니 창업기업 입장에선 짧게는 6개월, 길게는 수년 동안 버틸 여력이 없어요. 그래서 현재 문구용과 생활 분야에 주력하고 있는데, 홍보나 마케팅에 대한 투자가 절실합니다.”
필요한 자금을 투자받기 위해 일주일에 서너 번은 서울과 수도권, 진주를 오갔다. 하지만 현실과 이론은 전혀 달랐다. 국책은행이나 유명 벤처캐피털에선 기술력은 인정하면서도 매출이 오르는 시점을 되물었다. 돈이 벌리기 시작하면 왜 돈을 꾸러 다니겠냐고 반문하자 오로지 매출액만을 반복해서 물었다.
이러한 상황은 금융사의 기술담보대출도 마찬가지. 전 세계에서 선구자적 입장인 친환경 천연재료 접착제는 인정하지만 기술가치평가는 현재의 매출과 관련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매출 때문에 받으려던 대출은 결국 매출이 걸림돌이 됐다. 아무리 취지가 좋은 제도도 이 대표 입장에선 빛 좋은 개살구였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이나 기술보증기금도 다르지 않더군요. 그분들 입장도 이해가 되긴 합니다. 투자한 회사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문책당할 위험도 있으니… 저희처럼 당장 밥그릇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창업육성프로그램은 넘쳐나는데 실제 창업 후 고용을 창출하고 제품을 유통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투자는 거의 없는 것 같더군요.”
본사가 지방인 점도 핸디캡이었다. 진주에서 나고 자라 학교를 마친 이 대표가 진주에서 사업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하지만 서울과 수도권에서 JR의 제품에 관심을 가진 업체들은 본사가 진주라고 하자 난색을 표했다.
“처음엔 진주 말고 다른 곳에 공장을 짓는 다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웃음) 지금은 주로 중국산 마늘을 사용하지만 실험단계에선 남해의 마늘을 썼기 때문에 원료수급도 좋았고. 하지만 진주와 수도권은 거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꽤 먼 곳이더군요. 거래를 원하던 업체나 투자하려던 회사도 본사가 진주라고 하니 1년에 한번가기도 힘든 곳이란 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서울에 사무소를 두려고 합니다.”
까르띠에 여성창업어워드에 참가한 이진화 대표(왼쪽 세번째)와 드케르시스 까르띠에 CEO(왼쪽 여섯번째)
까르띠에 여성 창업 어워드 최종 결선 올라
발을 동동 구르던 이 대표에게 잠시 숨 쉴 틈을 내준 건 아이러니하지만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서의 창업어워드였다.
‘TED×ITAEWON’으로 JR을 알게 된 까르띠에 코리아가 ‘까르띠에 여성 창업 어워드(Cartier Woman’s Initiative Awards·여성초기창업가를 위한 비즈니스플랜 경진대회)’ 참가를 주선한 것. 1라운드 경쟁을 뚫고 아시아대륙의 최종결선 진출자로 선발된 이 대표는 프랑스 도빌에서 세계 각국 17명의 여성창업자들과 자웅을 가렸다.
“저를 포함해 세계 각국에서 온 18명이 호텔에 모였는데 누구랄 것도 없이 친해졌어요.(웃음) 전 영어가 서툴러서 같이 간 친구가 통역을 해줬는데, 언어가 그리 큰 장벽은 아니더라고요. 프레젠테이션이 부족해서 수상으로 이어지진 못했는데 미국에서 온 친구가 3M을 소개해줘서 서로 관심을 갖고 비즈니스를 진행 중입니다.”
어워드 참가 당시 프랑스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인생역정도 다시금 화제를 낳았다. 올해 우리 나이로 39살이 된 이 대표에게 19살 큰 딸과 17살, 12살이 된 아들이 있었던 것. 이혼 후 홀로 삼남매를 키우던 이 대표에게 창업은 꿈이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 얘기를 할 필요 있을까 싶었는데, 어워드 측에서 발송한 질문에 그런 내용이 있었어요. 어릴 적 패션디자이너가 꿈이어서 서울의 한 대학 의류학과에 합격했는데, 부모님이 외지에 나가는 걸 반대해 포기해야만 했어요. 당시 후기대였던 진주산업대(현 경남과기대)에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는데, 적응이 쉽지 않아 다 늦게 방황했습니다. 그렇게 아이가 생기고 부모님도 참석치 않는 결혼식을 올렸는데… 지금은 부모님께서 많이 응원해주십니다. 먹고 살기 위해 창업했으니 정말 잘 먹고 잘 살아야죠.(웃음)”
이 대표는 올해 매출 목표를 50억원으로 확 높였다. 2013년에 비해 약 10배나 많은 액수다. 여기엔 대기업 등이 의뢰한 제품 테스트와 문구제품 판매, 수출 등의 예상 매출 30억원, 중국과 유럽 등지의 기술이전 비용 20억원이 포함됐다.
“접착제는 대부분 글로벌 대기업이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접착제 시장의 60%를 점유하고 있는 기업이 독일의 헹켈이에요. 그들은 화학제품에 대한 원천기술을 갖고 있고 우린 천연접착제에 대한 원천기술이 있습니다. 친환경 시장이 서서히 열리는 시점에 점유율을 최대한 높이는 게 JR의 목표죠. 언젠가는 헹켈을 따라 잡을 겁니다.”
까르띠에와 국제여성포럼, 맥킨지 앤 컴퍼니, INSEAD 비즈니스 스쿨이 제휴해 2006년 발족한 ‘까르띠에 여성 창업 어워드’는 여성 사업가들의 프로젝트 발굴 및 지원을 위한 비즈니스 플랜 경진대회다. 아시아, 유럽, 라틴 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중동과 북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각각 한 명씩, 매년 여섯 명의 수상자가 배출된다. 이들에겐 1년간 비즈니스 코칭, 미화 2만달러, 까르띠에가 특별히 디자인한 트로피, 여성 포럼 연례회의 초청 등의 다양한 혜택이 마련된다. 올해는 오는 2월 28일까지 지원자들의 대회 참가서를 접수받고 있다.
www.cartierwomensinitiative.com을 방문해 2014년 대회 참가서를 작성하면 되고 온라인으로만 지원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