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오후, 아직은 푸릇한 은행나무를 따라 남산에 오르다 경리단길로 들어섰다. 분위기 멋스러운 맛집이 드문드문 자리한 이곳은 삼청동, 가로수길에 이어 요즘 핫하게 떠오른 산책로다. 그 길을 걷다 중턱에 이르면 하얀 3층 건물에 ‘시·화·담’이란 로고가 눈에 들어온다. 갤러리가 연상되는 건물 문턱을 넘으면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 살짝 갸웃하다. 1층부터 3층까지 고려, 신라, 가야, 조선 시대 유물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도예가 이인진, 이헌정의 작품이 곳곳에 자리했다. 정말 갤러리인가 둘러보다 동선을 따라 2층에 오르면 실체가 드러난다. 마티스, 피카소 등의 이름을 단 방문을 열면 테이블 위에 단아한 보와 예스러운 컵이 오롯하다. 시 제목을 따다 붙인 3층의 각 방 앞엔 갖가지 도자기가 전시돼 있고, 방 안은 테라스 너머 남산이 그림이자 풍경이다.
말 그대로 시(詩)와 그림(畵), 이야기(談)가 있는 이곳은 ‘신선설농탕’으로 유명한 외식업체 쿠드가 운영하는 한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다. 고개를 돌려 시선이 머무는 곳에 한국이 있고 문화와 역사에 대해 묻고 답하다 보면 저절로 대화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낮 1시가 조금 넘어선 시각에 레스토랑이 조용하다. 셰프들의 움직임은 분주한데 테이블은 적막강산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시·화·담’은 꿈이자 희망 그리고 비전
“예약제로 운영하는데 오늘은 점심 예약이 없네요. 시·화·담은 우리음식문화와 한식을 외국 분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만든 공간입니다. 개발한 레시피만 200여 가지가 넘는데 퓨전이 아니라 전통 한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2층의 널찍한 룸에서 마주한 오청 쿠드 대표는 “처음부터 VIP 고객을 대상으로 문을 열었다”며 “애초에 수익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이곳은 수익보다 비전이 앞서는 공간이다. 대놓고 말하면 예약이 꽉 차더라도 수익은 거의 없다. 아니 적자다. 하지만 식사를 마친 이들의 평가와 표정에 쿠드의 자부심이 담겨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 도전의 시작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선설농탕을 비롯해 소고기 구이 전문점 ‘우소보소’, 자연주의 정식 ‘수련’ 등을 운영하는 오 대표는 해외여행에서 접한 생계형 한식당을 보고 찬란한 한국의 음식문화가 안타까웠다. 맛은 둘째치고 곰방대와 갓이 전부인 식당 내부는 서글펐다. 그 때부터 세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한식의 우수성을 어떻게 알릴지 고민했다.
“우린 사계절이 뚜렷하고 삼면이 바다잖아요. 게다가 조상님들은 소가 먹는 건 사람도 먹을 수 있다며 수많은 풀뿌리를 식재료로 사용했어요. 여기에 문화적 스토리를 접목하면 세계 어디에 내놔도 한식만큼 훌륭한 요리가 없습니다. 쿠드는 한식이 전문이고 아무리 돈이 된다 해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한식에 문화를 담아내죠. 그렇다고 너무 한국적인 것만 고집하는 건 아니에요. 서양의 식재료나 레시피,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음식을 내기도 합니다. 그걸 퓨전이라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 보단 ‘뉴코리언’이죠. 100%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구상을 끝내고선 함께 근무하는 아내 박경원 이사와 시와 그림, 이야기를 연출해 나갔다. 미술을 전공한 박 이사가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를 연출했다면 오 대표는 아내를 도와 조율에 나섰다.
전 세계 도서관과 문화원, 정부기관에 보내려고 1억원을 들여 한식관련 화보집을 내기도 했다. <아름다운 한국음식 세계를 향해 날다>란 화보집에는 시·화·담에서 직접 맛볼 수 있는 음식과 스토리를 한글과 영어로 담았다. 누구하나 해야 한다고 떠미는 이 없었지만 불어나는 적자에도 부부는 꿈적하지 않았다.
“무모하지만 이건 우리의 꿈이자 희망이고 또 비전입니다. 2년 동안 적자도 줄어들고 있고.(웃음) 신선설농탕으로 사랑받았으니 한식을 알리는 것도 당연히 우리가 해야죠.”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8호(2013년 11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