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별안간 미국과 영국의 유력 일간지에 한국 가로수길의 한 건물이 등장했다. 뉴욕타임스에서 ‘서울에 간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으로 시몬느의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를 소개한 것이다. 같은 달 13일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 역시 ‘핸드백에 바쳐진 성전’이란 수식과 함께 시몬느 백스테이지 개관 소식을 다뤘다.
한 달 여가 지난 7월. 한국수출입은행에서는 ‘한국형 히든 챔피언 7개사’를 선정해 발표했다. 발표된 기업들은 세계시장 점유율 5위 이내인 제품을 보유한 것은 물론 평균 매출액 5530억원에 달하는 수출역군들이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패션 관련기업이 속해 있었다. 바로 시몬느였다.
시몬느는 25년 넘는 긴 시간 동안 마이클코어스, 마크제이콥스, 버버리, DKNY, 셀린느 등 수많은 글로벌 명품브랜드의 협력사로 묵묵히 무대 뒤에서 핸드백을 제작하며 ‘이름 없는 주역’으로 활동해왔다. 그러던 시몬느가 변했다. 최근 자체 브랜드 ‘0914’를 내놓음과 동시에 글로벌 시장을 노크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새롭게 스타트라인에 선 시몬느의 ‘산 역사’ 박은관 회장을 경기 의왕시 고천동 본사에서 만났다.
최초의 ‘Made In Korea’산 명품 핸드백을 만들기까지
국내 대중들에게는 생소할지 모르나 사실 해외 명품 핸드백시장에서 시몬느는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단순히 브랜드에서 요청하는 대로 제작해주는 OEM방식만이 아니다.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 브랜드에 제안하는 제조업자개발생산(ODM)방식으로 한 해 벌어들이는 돈만 3억 달러를 훌쩍 넘는다.
“시몬느는 쉽게 말해 명품브랜드의 풀서비스 컴퍼니라 할 수 있습니다. 하드웨어인 제조 노하우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격인 소재와 디자인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비율로 치면 지금은 ODM이 60~70%까지 올라왔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새롭게 탄생하는 브랜드의 기획도 맡아서 해줍니다. 적절한 포지셔닝과 마케팅전략을 구상해 어떤 콘셉트로 브랜드를 론칭해야 하는지를 컨설팅해 주는 거죠. 그렇게 여러 브랜드가 탄생했습니다.”
박 회장의 설명대로 시몬느는 브랜드 기획부터 디자인 개발, 제작, 마케팅까지 명품 핸드백 브랜드의 모든 영역에 관여한다. 다만 무대 뒤에서 이름 없이 묵묵히 해왔을 뿐. 심하게 이야기하면 수많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은 시몬느가 만든 핸드백에 라벨만 붙이고 포장해 10배 넘는 가격을 받아온 셈이다.
핸드백 하나에 인생을 건 그는 알게 모르게 ‘대한민국 최초’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Made In Korea’, 더 나아가 ‘Made in Asia’산 명품 핸드백을 만든 최초의 인물이 바로 박 회장이다.
“시몬느를 만들고 DKNY 제품 7개를 구입해 이탈리아에서 가죽 구해다 견본을 만들어 무작정 바이어를 찾아갔어요. 제품을 보고는 진짜 한국에서 만든 거냐고 놀라더군요. 품질은 훌륭한데 유럽산의 30~40% 가격으로 공급하겠다고 하니 솔깃해했습니다. 그런데 마케팅부서에서 고객들이 ‘Made In France, Italy’를 선호한다며 거절을 해오더군요. 다음날 다시 찾아가 ‘당신들 거래처인 이탈리아 공장이 지금이야 3대째라지만 1대 할아버지는 우리와 같이 맨땅에서 시작했을 거 아니냐. 아시아에서 고급 핸드백 생산을 기획한 최초의 브랜드가 되고 싶지 않냐’고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매달려 일부 납품을 약속받아 판매를 시작했는데 다행히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주문량을 점차 늘리더니 아예 디자이너를 보내서 새 제품을 한번 개발해보라 하더군요. 아시아에서 세계적 명품 핸드백을 제조·기획·디자인한 첫 사례였습니다.”
한국판 ‘샤넬’ ‘에르메스’의 탄생을 위해서는
시몬느의 ‘비범함’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며 다른 업체들에게도 주문이 밀려들었다. 사세가 확장되며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 공장이 들어섰고 수십개의 명품 브랜드가 시몬느의 협력사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오랫동안 개발한 디자인의 수는 14만 가지가 넘고 직원들의 핸드백 제조와 디자인 관련 경력을 다 합치면 시간으로 2700여 년에 이른다. 이러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기업이라면 자체 브랜드를 만들 욕심을 낼 법도 한데 시몬느는 25년 넘는 시간 동안 칼을 갈아왔다.
“왜 시몬느가 그동안 브랜드를 만들지 않았나?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먼저 글로벌 명품브랜드는 백화점의 기획상품이나 월마트에서 파는 브랜드랑 다릅니다. 누구나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를 하려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기본적인 제품력이고 둘째는 기업과 개인의 영역을 넘어 나라의 사회적인 성숙도와 ‘국격’이 얼마나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사실 두 번째 조건 충족이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글로벌 명품브랜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제품의 품질 외에 국가브랜드가 중요하다는 것이 박 회장의 설명이다. 뛰어난 기술로 제품의 질을 인정받을 수는 있으나 브랜드 정체성을 인정받기 힘들었다는 것이 요지다.
“우리는 훌륭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 일본의 경우 임진왜란 때 데려간 한국의 2000여명 도공이 만들기 시작한 채색자기가 중국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며 청자의 질이 떨어지자 그 자리를 메웠습니다. 유럽지역에 아프리카의 커피문화가 들어옴과 동시에 손잡이 달린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의 채색자기 역시 급격하게 전파됐죠. 서양만큼은 아니지만 일본의 브랜드가 세계시장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채색자기와 같은 문화가 일찍이 전파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산’ 글로벌 명품브랜드가 탄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일까?
“일본의 경우 1980년대 소니, 도요타가 일류상품으로 각광받으며 문화적 성숙도를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고장 없는 퍼스트클래스 상품을 만드는 나라로 국격과 네이션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면서 세계가 일본의 디자이너와 브랜드에 주목했습니다. 일본 내 브랜드가 유럽에서 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과거 일본 브랜드가 세계시장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던 박 회장은 한국 역시 글로벌 명품브랜드가 탄생할 수 있는 여건이 무르익었다고 단언했다.
“15년 전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명품 럭셔리 브랜드가 나온다는 주장은 씨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였죠. 제품의 질은 차치하더라도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인정받기 힘들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가 탄생할 환경이 갖춰졌습니다. K-POP 열풍과 박지성, 김연아 같은 글로벌 스포츠 스타의 탄생은 한국의 네이션 브랜드 가치를 높였고, 삼성은 품질 면에서 소니를 앞지르고 있습니다. 점차 한국의 국격이 세계에서 인정받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며 한국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진 거죠. 게다가 15년 전부터 전 세계 유명한 디자이너 스쿨에 한국 한생들이 25%가량을 차지하고 있고 유력 브랜드에 한국인 디자이너 3~4명은 반드시 속해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인재풀은 한국이 전 세계 넘버원이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의 선전, 다양한 문화콘텐츠 전파 등을 통해 높아진 국가 위상은 글로벌 명품브랜드가 탄생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설명이다. 덧붙여 그는 브랜드에 필수적인 전통과 스토리에 있어 문화적 유산(Cultural Heritage) 못지않게 산업적 전통(Industrial Heritage) 역시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소프트웨어를 갖춘 BTO(Back To On) 브랜드들이 무대 뒤에서 앞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프랑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축적된 노하우와 경험을 바탕으로 자체브랜드를 통해 글로벌 명품시장을 두드리는 거죠. 핸드백에서는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웃음)”
자체브랜드 ‘0914’ 2년 뒤 글로벌 시장 접수한다
박 회장은 많은 글로벌 명품브랜드들의 탄생 배경과 브랜드 전략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많은 브랜드는 국가적인 지원과 산업자본이 결합돼 스토리와 판타지를 불어넣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지금 유명한 명품브랜드들도 실상 200~300년 된 것이 아니에요. 대가 끊기거나 연명만 하던 역사를 자본이 들어가 이은 것들이 많죠. 예를 들어 루이비통 같은 경우 마차·마부가 없어지고 100년 동안 역사가 끊긴 것을 1960~70년에 자본이 들어가 쉬운 말로 족보를 쓴 거예요. 왕실과 귀족들의 프리스티지 문화를 아이덴티티로 잡아 새롭게 탄생한 거죠.”
국내에 글로벌 명품브랜드가 탄생할 만한 비옥한 토지와 양분이 갖춰졌다면 무슨 씨앗을 어떠한 방식으로 뿌리고 가꿔야 할까?
“기술, 디자인, 국격… 한국도 여건은 갖춰졌어요. 단 하나 없는 게 속된말로 대가리(브랜드)죠. 브랜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앞의 여건만으로는 부족하고 제대로 된 투자자와 광고· 마케팅 전문가, 비즈니스 오퍼레이팅 CEO 모두가 잘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즉 좋은 디자인은 브랜드 성공에 하나의 필수요소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닌 거죠. 지금 유명세를 날리고 있는 디자이너보다 더 능력 있고 좋은 디자인으로 브랜드를 만들어 실패한 케이스가 수두룩하거든요.”
그렇기에 박 회장은 자체브랜드 ‘0914’의 론칭을 신중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도산공원에 플래그십스토어가 완성되는 2년 뒤부터 ‘조용하지만 강하게’ ‘천천히’ 세계시장의 문을 두드린다는 전략이다. 그런데 다소 의외였던 것은 이들의 첫 번째 공략 대상은 성장시장인 아시아가 아닌 유럽과 미국의 선진시장이라는 점이었다.
“아직까지 한국 브랜드를 가지고 중국 등 신흥시장에서 경쟁하기는 힘듭니다. 전통적인 고가 명품 브랜드의 마케팅 전략이 적어도 20~30년 동안 통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반면 선진시장은 합리적 명품소비 문화가 퍼지면서 ‘어포더블 럭셔리(Affordable Luxury)’가 각광받고 있습니다. 이는 시몬느의 강점과 잘 맞아 떨어져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시몬느의 글로벌 브랜드로의 안착시점에 대해 물었더니 느긋한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 봅니다.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브랜드를 사들여 성공시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돈, 시간, 노력이 몇 배, 몇 십 배 소요됩니다. 분명 제 생애에 꽃은 보지 못하더라도 새싹 정도는 볼 요량으로 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