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개인연금 예금·보험 치중… 은퇴맞춤형 자산배분 필요 연금 1000조 시대 노후 준비 어떻게
최재원 기자
입력 : 2017.04.21 16:18:54
수정 : 2017.04.24 10:15:39
노후 대비 3층 연금 체계인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을 합한 국내 연금 총자산 규모가 작년 말 기준 처음으로 1000조원을 돌파했다. 미국·호주 등 연금 선진국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지만, 빠른 증가 속도를 감안하면 국내 연금자산이 향후 10년 안에 선진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연금이 예금·채권 등 안전자산으로 90%가량 쏠려 있어 노후준비 수단으로써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은 문제로 지적된다. 전문가들은 연금자산의 안정성을 확보하면서도 기대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주식·채권·원자재 등 다양한 자산에 분산투자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국민연금의 경우 현재 절반이 넘는 과도한 채권 비중을 낮춰야 하고, 퇴직연금이나 개인연금의 경우 개인별 은퇴시기 맞춤형 자동 자산배분 상품 가입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연금자산 1000조원 돌파
수익률은 내리막
금융감독원과 국민연금공단 등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국민연금 누적적립금은 558조원, 퇴직연금은 147조원, 개인연금은 307조원(2016년 9월말 기준)으로 3대 연금자산이 총 1012조원으로 집계됐다. 연금자산 규모는 2015년 말 930조원에 비해 1년 사이 82조원이 늘었다. 2012년 말 기준 3대 연금 자산 합계 675조원과 비교하면 불과 4년 만에 50%가 늘어난 것이다. 빠른 고령화를 맞아 노후 대비용 연금자산도 가파르게 증가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국내 연금자산이 빠르게 늘고 있지만 아직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미흡한 수준이다. 자본시장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을 포함한 주요 5개국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금자산 비율을 파악한 결과 평균 80%로 나타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3년도 통계에 따르면 GDP 대비 연금자산 비율은 호주(102%), 미국(100%), 캐나다(85%), 일본(52%)순이다. 한국은 2015년도 기준 명목 GDP(1559조원) 대비 연금자산(932조원) 비율이 60%다. 대상 연도가 다소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미국, 호주 등 연금선진국과 비교하면 아직 절반 수준인 셈이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 선임연구위원은 “연금제도 도입이 오래된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아직 우리나라 연금자산은 초기 성장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면서 “20~60대 초반 경제활동 가능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만큼 앞으로 상당기간 연금자산이 굉장히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금자산 규모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절반 이상이 예금·채권 등 안전자산에 쏠려 있어 저금리 상황에서 효율적인 노후자금 마련이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전체 연금 적립금 1012조원 가운데 70%인 713조원은 예금·채권 등 안전자산에 쏠려 있다. 사적연금 위주로 연금제도가 발달한 미국과 호주의 연금자산 가운데 주식 자산 비중이 2012년도 기준 각각 49%와 46%인 것과 비교하면 국내 연금자산의 안전자산 쏠림이 매우 심한 것이다.
강창희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교육포럼 대표는 “고령화와 저금리가 심각한 상황에서 연금자산을 예금과 같은 원금보장형 상품에만 투자해서는 노후 자금을 효율적으로 불리기 힘들다”면서 “국내외 다양한 자산으로의 분산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채권의 저주’ 시작…
해외·대체투자 늘린다
지난달 말 기금운용본부가 전주로 이전하면서 국민 노후의 최종 보루로 꼽히는 국민연금 운용에 대한 우려가 크다. 최근 1년 사이 기금운용 전문인력 50여 명이 이탈했다. 인력 이탈 못지않게 심각한 건 국민연금 전체 투자자산에서 채권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이상으로 높다는 데 있다. 올해부터 본격화되는 글로벌 금리인상 국면에 따라 채권에서의 수익률 악화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말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공개한 ‘2016년 말 국민연금기금 운용현황’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지난해 전체 수익률은 4.7%로 잠정 집계됐다. 직전 3년(2013~2015년) 평균 수익률 4.7%과 같은 수준이다. 자산군별로 수익률을 따져보면 국내주식 5.6%, 해외주식 10.1%, 국내채권 1.8%, 해외채권 4.0%, 국내대체투자 5.7%, 해외대체투자 12.3%를 각각 기록했다. 주식투자 수익률은 국내와 해외 모두 전년도에 비해 4%포인트 이상 높아졌다. 반면 전체자산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국내채권 수익률은 전년도 4.4%에서 1.8%로 2.6%포인트나 하락했다. 국민연금은 작년 말 기준 전체 적립금 558조원 가운데 채권이 306조원으로 비중이 54.9%(국내채권 50.7%, 해외채권 4.2%)를 차지한다. 전체 적립금의 절반이 넘는 국내채권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금리인하 국면에서 지난 2015년까지 투자위험이 낮으면서도 연간 4% 이상의 안정적 수익을 내는 ‘효자’ 역할을 해왔지만 작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 국면으로 돌아선 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인플레이션 기대가 반영된 탓이다. 올해도 미국이 3차례 안팎 기준금리를 올릴 것으로 예상되면서 국내채권도 금리인상 리스크에 노출됐다는 지적이다.
저성장·저금리로 국내 주식과 채권 모두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어진 만큼 국민연금은 해외 및 대체투자 비중을 지속적으로 높여나간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말 기준 전체 기금의 27%에 해당하는 150조원을 해외에 투자하고 있는데 5년 뒤인 2021년 말까지 해외투자 비중을 35% 이상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강면욱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은 “트럼프 당선 이후 금리가 오르면서 지난해 10월까지 채권 부문에서 벌었던 이익 상당부분이 연말에 날아갔다”면서 “수익률 제고를 위해 국내채권 비중은 줄이고 해외와 대체투자를 늘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인력 이탈과 관련해선 현재 금융투자업계 평균 수준인 기금운용직의 보수를 시장 상위 25% 평균 수준으로 단계적 인상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기금운용본부장과 실장급 사이에 증권부문장과 대체투자부문장 자리 2개를 신설(실장 및 팀장급의 승진 기회 부여)해 사기를 진작시킬 방침이다.
국민연금 상담
▶퇴직연금 수익률 1%대 뚝…
은퇴맞춤 자산배분펀드 주목
지난해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이 처음으로 1%대 중반으로 ‘뚝’ 떨어졌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익률은 확정급여(DB)형 평균 1.68%, 확정기여(DC)형은 평균 1.44%로 집계됐다. 전년도 DB형 수익률은 2.16%, DC형은 2.21%였다. 1년 사이 DB형 수익률은 평균 0.48%포인트, DC형 수익률은 0.77%포인트 각각 낮아진 것이다. 민주영 KEB하나은행 연금사업부 차장은 “퇴직연금은 보통 예금이나 채권 등 주로 안전자산에 투자하는데 기준금리가 낮아지면 수익률이 함께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퇴직연금은 지난해 6월 말 기준 예금이나 국공채 등 안전자산 위주로 투자하는 DB형이 86조원으로 전체 적립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7%에 달한다. DB형은 근로자에게 퇴직 직전 평균월급을 기준으로 퇴직금을 지급하는 대신 기업이 책임을 지고 자금을 굴리는 형태의 퇴직연금이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금리수준이 높았고 채권값도 상승하는 국면에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 기업들이 DB형태로 예금·채권 투자에 의존해왔다. 근로자가 회사로부터 매년 퇴직금을 중간 정산받아 직접 굴리는 DC형에 포함된 원리금 보장 상품까지 포함하면 안전자산 비중이 89%에 달한다.
지난해 300조원을 넘어선 개인연금도 투자자산 가운데 원리금 보장형 비중이 높은 보험 상품이 90%에 달한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개인연금 적립금 292조원 가운데 10년 이상 납입 때 연금수령 비과세 혜택이 있는 세제비적격 연금보험이 183조원, 매년 납입액 400만원까지 세액공제 혜택이 있는 연금저축보험이 81조원이다.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개인연금 상품별 연평균 수익률을 비교해보면 연금펀드가 8.9%인 반면 연금보험은 4.3%로 절반에 불과하다. 2015년 이후 국내 기준금리가 빠른 속도로 하향하면서 공시이율에 연동되는 연금보험 평균수익률은 작년부터 2%대로 떨어졌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사적연금의 90% 이상이 원리금 보장 금융상품에 쏠려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면서 “수익성을 고려해 개인이 손쉽게 자산배분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퇴직연금이나 개인연금에 ‘디폴트 옵션(Default Opt ion)’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디폴트 옵션은 연금 가입자가 별도 상품을 선택하지 않으면 금융회사별 대표 연금상품으로 자동 운용되는 제도다. 금융위원회는 개인연금법 개정을 추진 중이어서 이르면 내년 말 개인연금에는 디폴트 옵션 제도가 도입될 예정이다.
특히 저금리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기준금리 이상의 초과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주식, 채권, 부동산 등 다양한 자산에 자동으로 분산투자하는 ‘타깃데이트펀드(TDF)’ 형태 상품을 활용해 볼 만하다고 조언한다. 손성동 한국연금연구소 소장은 “노후 자금을 준비하는 데 있어 높은 수익을 위해 하나의 자산에 투자하는 건 너무 위험할 수 있다”면서 “생애주기별로 자산배분 비중을 자동적으로 조절해주는 TDF 상품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2006년 퇴직연금에 디폴트 옵션 제도를 도입한 미국의 경우 DC형 퇴직연금 가입 기업의 86%가 디폴트 옵션 상품으로 TDF를 선택하고 있다.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최근 TDF 상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업계 1위 삼성자산운용은 지난해 4월 미국 캐피털그룹과 손잡고 ‘삼성한국형TDF’ 시리즈를 출시했고, 업계 4위 한국투자신탁운용은 지난달 말 ‘한국투자TDF알아서펀드’ 시리즈를 내놨다. 업계 3위 KB자산운용은 세계 최대 TDF 1위 사업자 뱅가드와 손잡고 올 상반기 상품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업계 2위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지난 2011년 출시한 ‘미래에셋평생월급만들기’ 펀드 이름을 최근 ‘미래에셋자산배분형TDF’로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시장 공략에 나섰다.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로보어드바이저(Robo-Advisor)’ 연금상품도 주목할 만하다. 키움투자자산운용이 지난해 ‘키움쿼터백글로벌로보어드바이저’ 연금펀드를 내놨고, 트러스톤자산운용도 조만간 퇴직연금 전용 로보어드바이저 펀드를 내놓을 예정이다. 로보어드바이저 퇴직연금 펀드는 로봇 알고리즘을 활용해 인간보다 낮은 비용으로 시장상황 변화에 따라 적극적인 자산배분으로 연 4~6% 수익률을 추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