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이동제·복합점포·인터넷은행 등 새로운 제도가 연이어 도입되면서 금융권이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하고 있다. 과거 이통사 간 보조금 경쟁 못지않은 ‘고객 뺏기’ 경쟁이 금융회사들 간에 치열하게 펼쳐질 전망이다.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금융사들은 신규 서비스 개발 등 영업 전략을 세우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고객들은 늘어나는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됐다.
계좌 갈아타기 쉬워진다
은행 주거래 계좌를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는 ‘계좌이동제’가 2016년 금융권에 본격 도입된다. 은행권은 계좌이동제에 대비해 벌써부터 ‘산토끼(신규고객)’를 잡고 ‘집토끼(기존고객)’를 지키기 위한 주거래 고객 확보 경쟁에 들어갔다.
계좌이동제란 고객이 은행 주거래 계좌를 다른 은행으로 옮길 경우, 기존 계좌에 연결돼 있는 공과금, 급여이체 등 각종 내역까지 별도 신청 없이 자동으로 이전되는 시스템이다.
기존에는 주거래 계좌를 이동할 때 줄줄이 엮여 있는 자동이체를 고객이 일일이 옮겨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계좌이동제가 도입되면 각종 출금이체 내역을 조회한 뒤 간단히 변경·해지할 수 있어 ‘계좌 갈아타기’가 수월해질 전망이다.
계좌이동제는 금융위원회가 지난 2013년 11월 금융회사 간 경쟁 촉진을 유도하고자 도입한 서비스다. 은행들에겐 기존 고객을 뺏기거나 혹은 신규 고객을 확보하는 ‘위기이자 기회’인 셈이다.
계좌이동제 준비에 가장 적극적인 은행은 우리은행이다. 우리은행은 입출식 통장·신용카드 및 신용대출 상품으로 구성된 ‘우리 주거래 고객 상품 패키지’를 선보였다.
이 패키지는 계좌이동제를 대비해 주거래 고객에 대한 혜택을 늘린 것이 핵심이다. 급여와 연금이체, 관리비·공과금 자동이체, 우리카드 결제계좌 등 세 가지 조건 중 두 가지가 해당되면 우리 주거래 통장, 우리 주거래 카드, 우리 주거래 신용대출·직장인 대출 이용 시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은행들도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IBK기업은행은 계좌이동제를 취약점인 개인고객 부문을 보강할 기회로 보고 관련 팀을 만들어 대응전략을 준비하고 있다. 권선주 기업은행장은 이와 관련 “평생 고객화는 IBK가 1등 은행이 되기 위한 강력한 무기”라며 “고객 맞춤 금융서비스 제공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은 계좌이동제 태스크포스(TFT)를 구성했으며, 한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은 박종복 은행장이 직접 나서 계좌이동제 대비방안을 논의하는 회의를 주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지방은행들은 계좌이동제 시행에 별로 개의치 않고 있는 분위기다. 대구은행, 전북은행 등 지방은행들은 해당 지역민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계좌이동제가 도입돼도 고객들의 이탈이 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한 지방은행 관계자는 “주로 지역민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기 때문에 계좌이동제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며 “별도의 태스크포스를 꾸린다거나 상품을 개발하는 방안은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은행 증권 창구벽 허문 신복합점포
올해부터 활성화되고 있는 신복합점포 설립도 금융권 간 ‘벽 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요소다. 저금리 장기화, 저출산·고령화 등 악재로 예대마진이 급격히 줄고 있는 은행들이 신복합점포를 앞세워 자산관리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신복합점포는 한 공간 안에 은행, 증권 등 다양한 금융사들이 함께 입점해 고객이 한꺼번에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점포다. 기존에도 같은 건물에 은행과 증권사가 붙어 있는 복합점포가 있었지만 물리적 제약이 많아 시너지를 내기 힘들었다. 은행·증권사 창구 사이를 벽으로 막아 고객이 은행 업무를 보다가 증권 상담을 받으려면 은행 출입구로 나가서 증권 출입구로 다시 들어오는 방식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또 고객정보 공유가 사실상 불가능해 제대로 된 종합자산관리 서비스를 할 수 없었다. 은행과 증권사 간 고객정보가 오갈 때마다 1건에 한 번씩 고객 동의를 일일이 받아야 해 정보 공유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이런 규제를 없애 벽을 허물어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은행·증권사 창구가 놓이도록 했다. 일정기간을 정해놓고 고객의 동의를 받으면 그 기간 안에는 얼마든지 고객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은행들은 규제 완화를 반기며 신복합점포 개점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지난 4월 말 서울 청담동에 신복합점포 1호점인 ‘청담PB센터’를 개점했다.
IBK기업은행은 최근 은행에서 운영하던 PB(프라이빗뱅킹)센터 9곳 중 4곳을 IBK투자증권과 결합한 WM센터로 전환했다. 증권 계열사가 없는 우리은행은 지난 5월 서울 회현동 본점에 삼성증권 직원 5명을 받고, 서초동 삼성증권 삼성센터점에 은행 직원 5명을 투입했다. NH농협금융지주도 최근 경기 성남시에 ‘NH농협금융플러스센터’ 분당점을 냈다. 현재는 신복합점포에 보험업까지 추가하려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위에서 부터) 우리은행 ‘우리 주거래고객 상품 패키지’ 출시,
이광구 우리은행장이 금융권 최초로 인터넷 전문은행 시범모델로 설립한 ‘위비뱅크 출범식’에서 간편송금서비스인 위비 모바일 페이 시연을 하고 있다.
인터넷은행 설립 발걸음 빨라져
인터넷은행의 도입도 금융권의 존폐를 가를 만한 이슈다. 금융당국의 인터넷 전문은행 도입 방안 발표에 따라 경기도 등 지자체와 금융회사, IT기업들이 인터넷 전문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경기도는 미국, 일본, 독일 등 해외 인터넷 전문은행 사례를 조사하고 인터넷 전문은행 환경 및 규제를 검토할 방침이다. 또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추진전략을 수립하고 인터넷 전문은행 도입에 따른 효과도 분석할 예정이다.
초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금융회사들과 IT업체 등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우리은행은 인터넷 전문은행 설립에 앞서 시범 모델인 모바일 전문은행 ‘위비뱅크’를 출범시켰다. 인터넷 전문은행과 같은 서비스를 우선적으로 선보여 검증하고 도입이 허용되면 이를 전환하겠다는 포석이다.
IBK기업은행도 인터넷 전문은행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원뱅크’를 선보였다. IBK기업은행 관계자는 “원뱅크 운영을 통해 인터넷 전문은행 설립에 필요한 노하우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다른 은행들도 비슷한 서비스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증권사와 다른 기관들도 인터넷 전문은행 도입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키움증권은 인터넷 전문은행에 관심이 있다고 밝힌 바 있으며, 금융투자협회는 증권사들과 공동으로 인터넷 전문은행 설립을 위한 태스크포스(TF)팀을 운영 중이다. 기업들의 관심도 높다.
SK C&C 관계자는 “인터넷 전문은행 특화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발표한 후 여러 기업·기관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자체, 은행, 증권사, 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터넷 은행 참여를 준비하면서 경쟁과 논란이 예상된다.
저축은행 캐피털도 무한 경쟁
제2금융권 역시 시중은행 못지않은 무한경쟁에 돌입했다. 특히 자동차 할부·개인 신용대출 시장을 놓고 저축은행·대부업·캐피털 업체들이 업종을 뛰어넘는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다.
최근 카드와 캐피털이 결합된 형태인 자동차 복합 할부가 사실상 폐지 수순을 밟으면서 카드업계는 자체 복합 할부 상품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과거의 복합 할부는 카드사가 캐피털을 끼고 하는 방식이라 별 문제가 없었으나 지금은 카드사의 자체적인 복합 할부로 캐피털과 연계점이 없다. 오히려 캐피털의 주력상품인 오토론과 자동차금융시장에서 충돌할 수 있는 구도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는 회사는 신한카드다. 신한카드로 자동차 대금 일시불 결제 시 1%를 현금으로 돌려주고 1000원당 1마일리지를 추가로 적립해준다. 신한카드는 기존의 카드, 자체 복합 할부(오토플러스), 일반 할부(다이렉트할부) 등과 함께 자동차 구입에 대한 완벽한 상품체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다.
다른 카드사들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카드는 최근 할부 금융업 라이선스를 신청해 여신전문 금융업법 상의 할부 금융업 등록을 완료했다. KB국민카드 또한 할부 금융업 라이선스를 신청하고 등록이 완료되는 데로 자체 복합 할부 영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카드사 자체 복합 할부 등장에 따라 캐피털사들의 행보도 바빠지고 있다. 자동차구매대출(오토론) 금리인하를 비롯해 일각에서는 로비전까지 벌이고 있다. 한때 복합 할부로 동업자의 길을 걸었던 카드사와 캐피털사는 자동차 금융시장을 두고 이제 경쟁자로 돌변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셈이다.
일부 캐피털사들은 오토론 금리인하 방안까지 고려하고 있다. 카드사가 1.9%의 가맹점 수수료로 복합 할부 상품을 내놓으면 현재 오토론 금리로는 경쟁이 안 된다는 판단이다. 한 캐피털사 관계자는 “자동차 할부 시장의 경쟁은 곧 금리싸움인데 현재 캐피털사의 금리로는 카드사의 복합 할부 상품을 상대할 수 없다”며 “중간 대출 모집 단계를 없애는 등 금리를 최대한 낮출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갈수록 커지는 개인 소액신용대출 시장을 놓고 제1금융권(은행)과 대부업체·저축은행의 신경전도 뜨겁다. 최근 우리은행이 선보인 모바일 전문은행 ‘위비뱅크’가 출범 5일 만에 대출 취급액 13억원을 돌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형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그동안 신용등급 1~4등급의 고객들은 은행에서 저금리 대출을 이용하고, 신용등급 5~10등급의 저신용자들은 저축은행·대부업체 등 2금융권을 찾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핀테크를 활용한 모바일·인터넷 전문은행 등을 통해 다시 은행이 중금리 대출을 선보이면서 저축은행 업계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시중은행은 조달금리가 저축은행보다 크게 낮아 같은 신용등급의 고객에게도 낮은 금리 제공이 가능하다”며 “은행들이 중금리 대출 시장까지 뛰어드는 것은 저축은행이 더 이상 서민 금융사업을 하지 말라는 얘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축은행들이 위기감을 느끼는 것과는 달리 대부업계는 은행들의 움직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다. 대부업의 경우 주로 신용등급 6~9등급에 해당하는 저신용자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 은행과 고객층이 겹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저신용자 대상 대출의 높은 부실률 등을 고려할 때 대부업 고객에게는 모바일 대출의 중금리 적용이 어렵다는 평가다.
한 대부업계 관계자는 “대부업체의 대출 금리는 높은 조달금리 외에도 부실률과 대손충당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해지는 것”이라며 “시중은행은 저신용자 신용대출 관련 리스크 관리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한 만큼 딱히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진 않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