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사장님, 귀사의 퇴직연금에 대해 관심 없으시죠. 지금까지 하셨던 것처럼 그냥 신경 끄세요. 저희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이제까지 하던 대로 은행 예·적금이나 금리형 보험상품에 묻어둘 테니까요. 공연히 수익률 좀 더 내려고 주식이나 고수익 채권에 투자했다가 자칫 손실이라도 생기면 저희 입장도 곤란하지만 회장님이나 사장님도 난처할 게 아닙니까. 정부가 강제로 하라는 것이라서 어쩔 수 없어 금융기관에 원금보장형으로 맡긴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수익률 욕심 내지 말고 그저 깨지지만 않게 관리하는 게 피차 좋을 것 같네요. 수익률이 좀 더 낫다고 저희나 여러분 같은 월급쟁이 주머니에 더 들어올 것도 없지 않습니까.”
2005년에 시작된 퇴직연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지난 연말 107조원을 넘어선 데 이어 2월 말엔 어림잡아 110조원도 훌쩍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그 퇴직연금 운용의 현주소를 금융기관 퇴직연금 담당자들에게 솔직하게 설명하라고 하면 대략 이 정도로 요약하지 않을까. 지금 각 금융기관의 퇴직연금 운용 실태가 딱 그 모양이다.
금융감독원이 퇴직연금 안내 사이트에 공개한 지난 12월 말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현황에 따르면 전체 적립금의 55.73%가 예· 적금이나 원금보장형 ELS 등에 들어갔고, 34.91%는 금리형 보험상품에 넣은 것으로 나타났다. 펀드나 주식 같은 금융투자 상품엔 고작 5.56%가 들어갔다. 시중금리가 낮다보니 퇴직연금 초기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국공채 비중은 현재는 0.27%에 불과하며 실적배당형 보험상품도 0.2%에 그쳤다.
대신 환매조건부채권(RP)이나 표지어음 또는 대기성 자금 등 단기로 굴리는 비중이 그보다 훨씬 높은 3.34%나 됐다. 언제 퇴직금을 달라고 할지 모르니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반박하겠지만 사실 연간 퇴직금 지급액은 전체 퇴직연금의 2% 미만이니 단기로 굴리는 자금이 그렇게 많을 필요는 없다.
퇴직연금 대부분 단기로 굴려
그 뿐만이 아니다. 사실은 퇴직연금 대부분이 단기로 운용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전체 퇴직연금의 92.2%가 원리금보장형인데 이 부분이 거의 단기로 돌아가고 있다.
은행권의 경우 50조원 가까운 93.2%가 원리금보장형인데 이 중 79.8%를 1년 만기 예·적금 등에 쑤셔 넣었고 1년 미만도 4.8%나 된다. 3년 초과 상품은 고작 4.3%에 불과하다. 근로복지공단 퇴직연금은 더욱 심각해서 97.1%가 원리금보장형인데 이 자금의 97.1%가 1년 만기이고 1.9%는 1년 미만으로 운용되고 있다. 만기가 짧으니 수익률이 낮은 것은 당연하다.
업종의 특성상 자금을 장기로 운용한다는 생명보험사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그래도 만족하기엔 이른 수준이다. 생보사 퇴직연금의 95.5%가 원리금보장형인데 이 부분의 64.6%는 1년 만기로, 0.9%는 1년 미만으로 운용하고 있다. 3년 초과 상품에 넣은 것은 6.7%에 불과하다.
그렇게 굴리는 상품의 수익률은 얼마나 될까.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1년 만기 원리금보장형의 평균금리는 확정급여(DB)형이 2.76%, 확정기여(DC)형이 2.81%, 개인 또는 기업형 퇴직연금계좌(IRP)가 2.80%다.
개인들이 수익률을 더 달라고 하면 눈곱만큼씩 얹어주고 기업들이 맡겨놓은 DB형엔 그나마도 주지 않고 있는 셈이다. 종합할 때 퇴직연금 사업자들의 투자는 거의 낙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잘못된 출발이 운용 왜곡
이처럼 각 기관이 퇴직연금의 대부분을 수익률 낮은 금융상품으로 운용하고 있는 것은 정부가 과도하게 원금보장을 요구하는 규정을 만들어 운용을 제약한 데다 많은 기업들이 거래 금융기관에다 꺾기 관행에 따라 맡겼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제도를 만들어낸 고용노동부는 지급의 안전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초기 퇴직연금 운용을 거의 예·적금이나 국공채로 운용하도록 강요했다. 기업들 역시 과거 퇴직급여충당금의 상당 부분을 사실상 양건예금(꺾기) 형태로 금융기관에 넣어놓았기 때문에 퇴직연금 도입 이후에도 수익률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부가 강제로 퇴직급여충당금을 연금화하면서 국가 전체 부의 상당부분이 수익률 낮은 연금에 잠겨 있는 상태다. 이처럼 투자자원의 상당부분이 비효율적으로 잠겨 있다는 비난이 빗발치자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지난해 8월 하순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이나 IRP에 대해 위험자산 보유한도를 확정급여형(DB)과 동일한 70% 정도로 상향 조정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현장의 공무원들은 즉각 반기를 들었다. 최 부총리의 발표 직후인 9월 초 금융위는 DC형이나 IRP의 주식투자를 계속 금지하는 내용의 퇴직연금 감독규정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금융위는 올 1월까지 DC형이나 IRP 퇴직연금에 대해 주식형펀드를 통한 투자를 일부 확대하겠다고 했으나 아직까지 추가 제도개선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정부는 DC형이나 IRP 퇴직연금에 대해선 주식투자는 물론이고 고수익채권펀드나 파생상품펀드, 부동산펀드 등의 투자까지 전면 금지했고, 주식형 또는 혼합형 펀드에만 전체 적립금의 40%까지 투자하도록 했다. 인심을 써서 외국 투자등급 채권에는 30%까지 투자하도록 허용했지만 외국 금리가 낮기 때문에 사실상 의미가 없다.
DB형의 경우도 예·적금이나 국공채 등에 30% 이상을 투자해야 하며 나머지 70%에 대해선 주식이나 혼합형 펀드 등으로 운용하되 주식 직접투자는 30%를 넘지 못하도록 묶어두고 있다. 그나마도 초기보다는 많이 완화됐다는 게 이 정도다.
게다가 현장에선 초기 규정에 따라 예·적금 상품 위주로 퇴직연금을 운용하던 관행에 익숙해진 각 금융기관 운용 담당자들이 여전히 자금을 단기로 굴리고 있다. 이 때문에 각 기관이 운용하는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전체적으로 자산운용사의 퇴직연금펀드에 비해 훨씬 낮게 나오고 있다.
퇴직연금펀드보다 수익률 훨씬 낮아
Fn가이드에 따르면 자산운용사들이 운용하는 371개 퇴직연금펀드의 5년 평균 수익률은 30.33%로 나타났다. 반면 은행이나 증권, 생보, 손보사의 퇴직연금 중엔 어떤 형태로도 5년 수익률이 25%를 넘은 게 없다. 특히 손보사의 비원리금보장형 퇴직연금 5년 평균 수익률은 DB형이 15.71%이고 DC형은 15.04%에 불과해 자산운용사 퇴직연금펀드 평균 수익률의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문제는 각 금융권 퇴직연금과 퇴직연금펀드의 수익률 격차가 갈수록 크게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퇴직연금이 1~2년 운용하고 끝내는 상품이 아니라 20년, 30년 이어가는 상품이란 점에서 처음부터 규제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설정한 지 7년이 넘은 127개 퇴직연금펀드의 7년 수익률은 42.65%나 된다. 이들 펀드의 설정 후 수익률 평균은 60.78%이다. 반면에 퇴직연금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은행 퇴직연금의 7년 수익률은 30.01%(원금보장 DC형 기준)에서부터 31.96%(비원금보장 DC형 기준)에 머물고 있다. 운용기간이 7년 남짓이며 설정액이 1조1060억원에 달하는 한국밸류자산운용의 ‘10년투자퇴직연금(채권혼합)’ 펀드의 설정 후 수익률이 88.36%라는 점을 생각하면 규제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더욱 잘 드러난다.
김후정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퇴직연금은 장기 은퇴자금이란 점에서 지나치게 안전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위험자산을 반영하며 수익성을 추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주식이나 주식관련 상품을 적극 편입해야 한다는 얘기다.
운용성적 증권 ‘양호’ 손보 ‘저조’
수익률을 금융권역별로 들여다보면 잘하는 곳과 못하는 곳의 성과 차이가 뚜렷이 나타나 정부의 퇴직연금 사업자 선정에도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DB형과 DC형, IRP 등 3종류의 퇴직연금을 원리금보장형과 비원리금보장형으로 구분하면 금융권역별로 6개 유형의 퇴직연금이 있다. 이들 유형의 평균 수익률을 전체 금융권역에서 비교한 결과 ‘증권사의 비원리금보장 DC형’ 퇴직연금이 3년과 5년, 7년에서 모두 1위를 달렸다. 1년 수익률에선 ‘증권사의 DB형 원금보장형’이 1위를 차지했다. 권역별 수익률 2위도 3년, 5년, 7년은 증권사가 차지했고 1년에서만 생보사가 2위에 올랐다. ‘생보사의 원금보장 DB형’ 퇴직연금은 1년 수익률 2위, 3년 수익률 4위, 5년, 7년 수익률은 각각 3위로 나타나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조적으로 손해보험사의 비원리금보장형 퇴직연금은 1년, 3년, 5년, 7년 모든 기간에서 전체 금융권역 중 최하위에 머물러 자산운용 역량을 의심케 했다. 손해보험사에 퇴직연금을 가입했다면 기업이건 개인이건 자기가 맡긴 회사의 실제 운용성적을 반드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금융권역별 평균 수익률 최상위와 최하위 실적을 비교해보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바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7년 수익률만 놓고 보더라도 증권사의 비원리금보장 DC형 평균은 38.75%인 반면에 손보사 평균은 16.29%에 불과하다. 5년 수익률의 경우도 증권사 비원리금보장 DC형 평균은 24.23%였는데 손보사의 비원리금보장 DC형 평균 수익률은 15.04%에 그쳤다.
한화생명 ‘양호’ 동부생명 ‘저조’
개별 금융기관별로 들어가면 상위와 하위 회사의 격차는 훨씬 크게 벌어진다.
대표적인 실적추구형 퇴직연금이라고 할 수 있는 비원리금보장 DC형의 7년 수익률에서 최고 성적을 낸 한화생명의 수익률이 46.94%로 나타난 반면에 최하위인 동부생명의 수익률은 10.72%에 불과했다. 또 NH투자증권(46.13%)과 한국투자증권(43.53%), 신한생명(42.93%), 국민은행(40.99%) 등이 수익률 상위에 이름을 올렸고 롯데손보(11.87%)나 현대해상(15.42%), 동부화재(17.17%), 흥국생명(22.52%), LIG손보(24.68%) 등은 수익률이 저조한 회사군에 속했다.
안정추구 퇴직연금의 대표적 상품으로 꼽히는 원금보장 DB형의 경우 적립금의 큰 부분이 은행권으로 몰렸지만 수익률은 증권사와 생명보험 쪽이 훨씬 높았다. 이 부문에선 대신증권(37.49%)과 하나대투증권(36.36%), 메트라이프(36.31%), KDB대우증권(36.12%), 신한금융투자(35.91%), 동부생명(35.78%) 등이 수익률 상위에 이름을 올렸다.
반면에 현대라이프(28.12%)나 기업은행(28.59%), 광주은행(29.58%), 경남은행(29.61%), 농협은행(29.9%) 등은 수익률이 비교적 낮은 축에 들었다.
단기성적에서도 운용을 잘하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1년 수익률(2014년 성적)에서 부산은행(비원리금보장 DB형)과 KDB생명(비원리금보장 DC형) LIG손보(비원리금보장 DB형) 롯데손보(비원리금보장 DC형) 현대해상(비원리금보장 DC형) 등이 마이너스 성적을 냈다. 퇴직연금이 장기상품이라지만 한 번 실적이 마이너스로 떨어지면 다음 운용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는 점에서 이들 회사의 투자컨설팅 능력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퇴직연금은 올해 도입 10주년을 맞는다. 그렇지만 제도나 운용은 여전히 미숙하기 짝이 없다. 전문가가 없고 평가도 허술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제도가 기업의 이익을 갉아먹고 근로자들의 노후를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는지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