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이 10조55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을 쏟아부으며 서울 삼성동 한전 부지를 인수키로 하면서 한때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등의 주가가 출렁댔다. 그동안 소규모 합병과 매각만을 해오던 그룹이 왜 이 땅을 덥석 안았을까. 이번 결정이 그룹의 사업재편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현대차그룹은 오너가가 현대모비스를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순환출자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모비스 주가의 향방은 이 그룹 지배구조와 관련해 주목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업재편, 정의선이 중심
현대차그룹의 올해 지배구조 관련 움직임은 ▲4월 1일 현대엔지니어링이 현대엠코를 흡수합병해 통합법인 출범 ▲8월 7일 정의선 부회장이 이노션 지분 30% 매각해 지분율을 10%로 줄임 ▲8월 20일 현대위아의 현대위스코와 현대메티아 흡수합병, 현대오토에버의 현대씨엔아이 흡수합병, 현대건설의 현대건설인재개발원 흡수합병(11월 1일 합병 단행) 등으로 요약된다.
특이한 점은 세 차례 지배구조 개편 때마다 모두 정의선 부회장의 보유 지분이 있는 계열사가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 현대엠코 지분 25.06%를 보유했던 정 부회장의 통합 현대엔지니어링 출범 이후 지분율은 11.72%로 낮아졌다. 이노션 지분 매각과 관련해서는 정 부회장이 모건스탠리PE 등에 지분을 넘겨 3000억원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11월 1일자로 정 부회장의 현대위스코 지분(57.87%)은 통합 현대위아 지분 1.95%로, 현대오토에버 지분 20.1%는 19.5%로 바뀌게 된다. 정 부회장이 보유한 상장사 현대위아 지분 1.95%는 합병가액으로 계산할 경우 1000억원가량이다.
결국 올해 들어 일어난 일련의 계열사 통합과 매각으로 정 부회장은 4000억원가량의 실탄을 손에 쥔 셈이다. 시장에서는 앞으로 현대엔지니어링, 이노션, 현대오토에버 상장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 경우 정 부회장 보유 지분 가치는 확 올라갈 수 있다.
특히 현대차그룹의 IT서비스업체인 현대오토에버의는 향후 삼성SDS, SK C&C처럼 그룹의 알짜 IT업체로 부각될 가능성도 회자되고 있다.
세 마리 토끼 잡기 목적
현대차그룹에서는 그룹 계열사 간 합병을 “연관 혹은 중복사업 통합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이에 대해 일감몰아주기 규제 회피와 후계 승계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는 목적도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올해 2월 공정거래법 시행령이 적용되면서 그룹 총수와 특수관계인이 비상장 계열사 지분 20% 이상을 보유한 경우 일감몰아주기 규제가 적용되고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간 합병으로 현대위아 등은 이 규제를 피해가거나 완화할 수 있게 됐다.
주식시장에서는 지난 8월 20일 합병 발표 직후 상장사인 현대위아 주가가 급등한 것을 주목한다.
우선 회사 측 설명대로 경영 효율성이 높아져 실적 개선 정도가 기대치를 넘어설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류연화 아이엠투자증권 연구원은 “피합병 법인들은 외부 매출 비중이 90%에 달하기 때문에 합병 후 현대위아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그는 합병효과가 발휘되는 내년에는 순이익 전망치가 14%, 주당순이익(EPS)이 8% 정도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지배구조 측면의 반사이익을 기대하는 분석도 많다. 현대위아는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그룹 지배구조 핵심 축에서는 벗어나 있다. 하지만 정의선 부회장이 이번 합병을 계기로 현대위아 지분을 보유하게 된 점이 호재라는 분석도 등장했다.
박영호 KDB대우증권 연구원은 “기아차의 경우 정의선 부회장이 새롭게 지분을 취득했던 2005년 중 주가가 저점 대비 최고 169% 상승한 전례가 있다”며 “대주주가 지분을 보유하게 된 그룹 내 회사가 된 것은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주가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승승장구’ 현대글로비스
현대위아의 현대위스코·현대메티아 흡수합병에 대한 ‘은밀한’ 해석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배구조 담당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정의선 부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활용해 현대모비스 최대주주가 돼야 하는 그룹 지배구조 개편 시나리오상 의도적으로 현대모비스 대신 현대위아를 키우는 것 같다”며 “현대위아가 크면서 현대모비스 주가가 상대적 약세를 보여야 대주주에 유리한 합병 또는 주식교환 비율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의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의도 증권가에 돌고 있는 세 가지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 시나리오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첫째, 현대모비스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방식을 꼽을 수 있다. 현대모비스(또는 현대모비스, 현대차, 기아차)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분할한 뒤 지주 부문과 현대글로비스를 합병하는 시나리오다.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정 부회장이 지분을 매각하거나 팔지 않고 손쉽게 지배력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증손자회사 지분 100%를 보유해야하는 지주회사법상 복잡한 계열사 지분 교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둘째, 정의선 부회장이 상장사인 현대글로비스 등 보유지분을 매각해 ‘실탄’을 마련한 뒤 현대모비스 지분을 물려받는 방식이다. 현대글로비스 주가가 30만원일 경우 정 부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 가치는 3조6000억원이다. 증여세 50%를 내고도 정몽구 회장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주가 27만원 가정, 1조8000억원 어치)을 받을 수 있는 돈이다.
마지막 세 번째 시나리오는 현대모비스가 보유한 현대차 지분과 정의선 부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시장가치로 맞교환하는 방식이다. 단순하지만 현대모비스의 다른 주주 가치를 하락시킬 수 있고, 현대글로비스 기업가치를 현재보다 훨씬 높여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시나리오에 비해 가능성이 낮은 편이다.
세 가지 시나리오 모두 오너 일가 입장에서는 향후 현대글로비스 기업가치가 높아져야 하고 현대모비스 주가는 낮아져야 유리하다.
그래야 더 적은 돈(지분 가치)으로 더 많은 현대모비스 주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증권가에서 현대모비스 주가 전망을 낮게 보는 것도 그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