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주와 성장주, 어느 쪽이 더 우월한가’는 국내외 증시를 막론하고 단골로 논의되는 주제 중 하나다. 시장에서 말하는 가치주와 성장주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치주는 낮은 주가수익비율(PER) 또는 낮은 주가자산비율(PBR)로 대표되는 주식이고 성장주는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 가치투자 교과서’로 불리는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은 가치주를 결정하는 3대 요소로 성장성, 수익성, 안정성을 꼽았다. 성장성은 산업 전망 등 미래에 관한 것이고 수익성은 현재 이익, 현금을 얼마나 버느냐에 관한 것이다. 안정성은 과거 영업활동으로 쌓은 자산가치를 뜻한다. 결국 가치주는 성장성, 수익성, 안정성 등 내재가치보다 시장가격이 저평가된 주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가치주로 분류됐다고 해서 영원히 가치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이 부사장은 “시장 상황에 따라 가치주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며 “삼성전자 주가가 100만원이라면 가치주가 맞지만 300만원까지 올라가면 더 이상 가치주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내수·소비재주와 중소형 가치주가 활약했다. 그러나 이제 가격이 너무 올라 누구도 내수·소비재주나 중소형주를 가치주로 꼽지 않는다. 기업 내재가치는 그대로인데 투자 트렌드, 수급, 시장의 오해 등으로 일시적으로 저평가될 때가 있다. 그때 가치주 투자자에게 기회가 생긴다. 성장주는 지금보다는 앞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큰 종목을 뜻한다. 가치주에 비해 현재 창출하는 이익은 작지만 향후 성장 가능성에 대해 높은 주가 프리미엄이 붙어 PER과 PBR은 높은 편이다. 김태홍 그로쓰힐투자자문 대표는 “회사 자체적으로 2~3년 동안 연평균 20%씩 실적이 성장하는 기업을 성장주로 평가하고 있다”며 “3년 뒤까지 이익이 좋아지는 기업을 발굴해 분산 투자하는 게 주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성장주 투자자들이 꼽는 최고의 투자전략은 ‘산업 구조나 소비 트렌드 변화를 한발 앞서 읽고 성장이 기대되는 업종과 기업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이채원 부사장
가치주와 성장주 투자 중 어느 것이 좋은 투자방법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경기 사이클이나 시장 상황에 따라 때로는 가치주가, 때로는 성장주가 높은 수익을 내기 때문이다. PER이나 PBR 수치에 따라 가치주나 성장주로 구분할 수는 있지만 수치가 낮다고 반드시 저평가됐다고 단정할 수 없고 수치가 높다고 고평가됐다고 볼 수도 없다. 무턱대고 PBR이 낮은 주식에 투자하게 되는 경우 자칫 주가가 오르지 않아 장기간 보유하게 되는 ‘가치함정(value trap)’에 빠질 위험도 크다.
가치투자 전문가들은 기업 내재가치와 할인율을 종합해 적정 주가를 산출해내고 이것을 실제 시장주가 수준과 비교해 저평가된 주식을 발굴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업종이나 개별 기업에 따라 적정 할인율 수준이 다른데 이를 도출해내는 것이 투자 성패를 가르는 핵심적 부분이다.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가치주와 성장주, 투자자의 기호는 모두 다르겠지만 기업 내재가치와 비교해 저평가된 주식을 발굴해 장기투자하는 것이 경기나 시황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꾸준한 수익을 내는 비결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증시에 불어온 ‘가치투자’ 훈풍
매미는 땅속에서 7년을 견딘 후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하지만 오랜 인고의 세월에 비해 매미 일생은 짧다. 가치주도 비슷하다. 내재가치에 비해 저평가되긴 했지만 언제 시장에서 인정을 받아 다시 주가가 오를지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몇 년이 될지 모르는 긴 저평가 기간을 견딘 후에야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시장에서 인정을 받더라도 주가가 오르는 기간은 길지 않다.
그런 점에서 가치주는 매미와 닮았다. 2013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는 매미 울음소리가 우렁찼던 시기였다. 그간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던 가치주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박스권 증시의 답답한 흐름 속에서도 가치주 투자는 차별화된 수익을 냈고 환매 행렬이 지속되는 국내주식형 펀드와 달리 가치주 펀드로는 투자자금이 몰렸다. 펀드 평가사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연초 이후 지난 6월 12일까지 가치주 펀드로는 9503억원의 자금이 더 들어왔다. 반면 국내주식형 펀드에서는 4조5384억원의 자금이 빠져나갔다. 전문가들은 내재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종목에 투자하는 가치투자 전략은 향후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부사장은 “가치주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내재가치에 비해 싸게 거래되는 종목”이라며 “저평가 종목을 찾아 투자하는 전략은 내년에도 꾸준한 성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부사장도 “최고 투자목표는 안 팔아도 될 종목을 찾는 것”이라며 “수익률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지만 가치주 펀드는 내년에도 올해와 비슷한 성과를 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준철 VIP 투자자문 대표
이들이 종목을 발굴하는 비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해당 회사 과거·현재·미래 수익으로 기업가치를 평가하고 기업가치와 주가를 비교해 가치에 비해 주가가 싼 주식을 산다. 주가가 충분히 올라 가치와 비슷한 수준이 되면 주식을 판다. 이 부사장과 허 부사장 역시 오랜 시간 ‘한 우물’을 판 후에야 성과를 인정받았다.
가치투자가들은 매년 쏟아지는 종합주가지수 전망을 믿지 않는다. 설령 맞다 해도 지수 전망이 투자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도 일치된 의견을 내놨다. 이 부사장은 “지수 예측에 매달리는 순간 투자가 투기로 바뀐다”고 했고 허 부사장은 “지수는 예측과 거꾸로 갈 때가 많고, 그게 바로 시장”이라고 했다. 지수보다는 기업이 문제라는 것이다. 향후 투자전략은 어떻게 세워야 할까. 이 부사장은 “모르는 주식에 투자하는 것은 금물”이라며 “잘할 수 있는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 부사장은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 적극적으로 분산투자를 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다.
허남권 부사장
버블 논란… 가치주는 변신 중
지난 1년간 가치주 펀드로 수 조원 자금이 몰리고 내수·소비재주와 중소형주 주가가 급등하면서 일각에선 ‘가치주 펀드’ 버블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가치투자 성과가 고점에 다다른 것이 아니냐고 염려하는 쪽에서는 2010년 하반기부터 1년여 동안 지속된 대형주 장세 속 가치투자 펀드가 타격을 입었던 전례가 반복될 가능성을 거론한다. 대형주가 각광을 받았던 2010년 하반기부터 2011년 상반기까지 가치투자 펀드에선 급속한 자금 이탈과 수익률 하락이 나타났다.
이 기간 소위 ‘차·화·정’으로 불린 자동차·화학·정유 업종 내 대형주들이 각광을 받으면서 대형주 투자에 불이 붙었고 현대차 등 대표주들은 이 기간 2~3배씩 뛰면서 시중 자금을 흡수했다. 이 여파로 중소형주를 중심으로 포트폴리오가 구성돼 있던 ‘신영밸류고배당증권투자신탁(주식)C형’은 2009년 49.23%에 이르던 연 수익률이 대형주 인기가 시작된 2010년에는 19.83%로 내려갔고, 2011년에는 -8.01%를 기록하며 마이너스 수익률로 전환됐다. 이미 알짜 중소형주에 대한 투자가 포화상태에 이른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실제로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의 경우 130여 개 투자 종목 중 10%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종목이 20개 가까이 된다. 신영자산운용도 약 20개 종목 지분율이 10%를 넘고 KB자산운용도 30개 가까운 종목에 대해 10% 이상 지분을 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형주가 다시 주목받으면서 가치주 펀드에서 자금 이탈이 이뤄질 경우 이들 펀드 수익률은 급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치주 투자 열풍이 지속될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박래신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사장은 “가치투자는 단기간에 그칠 유행이 아니라 선진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는 정석 투자의 원칙인 만큼 국내시장에서도 대세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치투자 전략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쪽에선 과거 저평가 중소형주, 내수주에만 국한돼 있던 가치주 개념이 최근 대형주, 경기민감주 등으로 확대됐다는 데 주목한다. 최준철 VIP투자자문 대표는 “가치주와 대형주, 경기민감주를 대결 구도로 봐선 안 되고 내재 가치보다 저평가된 종목이라면 어떤 주식이든 가치주”라고 강조했다. 신영자산운용,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KB운용 등 가치투자 명가로 정평이 난 운용사들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내수소비재주, 중소형주 비중을 낮추고 건설, 은행, 조선 등 경기민감주를 펀드에 담고 있다. 중소형주, 내수주가 지난 3년간 호시절을 누린 만큼 기업가치 대비 주가가 많이 비싸졌다는 판단에서다.
가치주 펀드들이 경기민감주를 쓸어 모으는 이유로는 내년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와 밸류에이션 매력이 꼽힌다. 가치주 펀드를 운용하는 매니저들은 “과거 대표적 성장주로 꼽혔던 소재·산업재, 조선, 기계 등이 주가 하락으로 인해 지금은 가치주가 됐다”며 “올해 실적이 바닥을 찍고 개선될 것으로 전망되는 데다 주가 밸류에이션도 낮아 펀드 내 경기민감주 비중을 높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경기민감업종들의 주가가 바닥을 찍고 30~40% 가까이 오르긴 했지만 아직은 고점 대비 반토막이 나 있는 종목도 많아 투자기회가 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