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펀드 투자로 큰 아픔을 본 박준희 씨(39). 하지만 금리가 3% 수준으로 떨어진 은행 정기예금은 영 맘에 차지가 않는다. 결국 박씨는 다시 펀드 투자를 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 그가 찾아간 곳은 주거래 은행 창구. 펀드 투자를 하겠다는 말을 꺼내자 창구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추천 펀드 리스트를 내민다.
○○펀드, △△펀드, ◇◇펀드 등 수익률이 다른 펀드보다 뛰어난 펀드들이 눈길을 끈다. 고민하던 박씨는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다른 고객들도 많이 찾는 ‘인기펀드’라고 하니 왠지 모를 안도감도 들었다.
# 나름 펀드 투자에 대해 좀 안다고 자부하는 최정훈 씨(43)는 펀드 가입을 위해 증권사 지점을 찾았다. 그는 증권사 창구 직원이 추천 펀드를 권유하기 전에 먼저 “○○펀드에 가입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이미 점찍어 둔 펀드가 있었던 것이다. 그 펀드는 다른 비슷한 종류의 펀드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며 한창 인기를 끄는 펀드였다. 이 때문에 언론은 물론 시장에서도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최씨는 앞으로도 이 펀드가 과거처럼 좋은 수익률을 기록해주기를 마음속으로 기대했다.
인기가 많으면 좋은 펀드일까
많은 펀드 투자자들이 펀드에 가입할 때 시류의 흐름을 탄다. 높은 수익률 등으로 인기가 있는 펀드를 고르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기가 좋은 펀드에 가입하는 것이 투자자에게 최선을 선택일까.
우선 국내 펀드 판매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은행을 분석해 보자. 은행은 전략적으로 미는 펀드들이 있고 고객들은 대부분 이런 은행의 추천 펀드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 펀드들의 성적표는 어떨까.
펀드평가사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민, 신한, 우리, 하나은행 등 국내 4대 은행에서 지난해 상반기에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 펀드’ 3개씩 총 12개의 펀드 성적표를 비교해본 결과 각 분야별로 수익률이 상위 10위권 안에 드는 펀드는 2개에 불과했다.
우선 지난해 상반기 4대 은행 창구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펀드는 주식형 펀드였다. 총 12개 중 10개 펀드가 국내 주식형 펀드였다. 2011년 하반기부터 주식시장이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은행들이 당시 주식형 펀드를 전략적으로 많이 판매한 것이다.
하지만 이 중 최근 1년 수익률(4월 15일 기준)이 전체 국내 주식형 펀드 중 10위권 안에 드는 상품은 KB국민은행에서 판매한 ‘KB중소형주 포커스 증권투자신탁’이 유일했다. KB중소형주 포커스 증권투자신탁의 최근 1년간 수익률은 15.11%로 국내 주식형 펀드 수익률(1년 기준) 10위권에 겨우 턱걸이를 했다.
나머지 국내 9개 주식형 펀드들은 모두 10위권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특히 이 중 8개 펀드가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했다. 은행의 추천에 마음을 놓았던 고객들은 오히려 원금을 까먹은 것이다.
하나은행에서 판매한 ‘하나UBS블루칩바스켓증권투자신탁’이 -11.86%, 우리은행의 ‘칸서스하베서트적립식증권투자신탁1호’가 -6.41%를 기록했다. 특히 신한은행의 경우 판매순위 1~3위 펀드가 모두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해 은행 창구에서 채권형 펀드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은행들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스트3’ 펀드 12개 중 채권형 펀드는 단 2개였다. 우리은행의 ‘프랭클린템플턴 베스트국공채증권투자신탁’과 하나은행의 ‘AB글로벌 고수익증권투자신탁’ 등이다.
4대 은행 베스트셀링 펀드 성적표 살펴보니
2개의 채권형 펀드 중 ‘AB글로벌 고수익증권투자신탁’은 1년 수익률이 16.10%로 채권형 펀드 상위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프랭클린템플턴 베스트국공채증권투자신탁’도 4.62%의 수익률을 기록해 주식형 펀드보다 나은 성적을 보였다.
은행이 추천하는 펀드라고 해서 투자자가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올해 들어 은행들의 판매 행태를 봐도 드러난다. 4대 은행은 올해 들어 채권형 펀드를 전략적으로 밀고 있다. 지난해 채권형 펀드들이 수익률이 좋았다는 이유로 뒤늦게 채권형 펀드를 적극적으로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은행의 경우 올해 1분기에 가장 많이 팔린 펀드 3개가 모두 채권형 펀드다. 우리은행과 신한은행도 1위를 채권형 펀드가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 채권시장 일각에서 버블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시점에 오히려 은행들은 분주히 채권형 펀드를 고객들에게 권하고 있는 것이다. 고객들의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인기 펀드가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신호’는 돈이 몰린 대형 펀드의 수익률에서도 드러난다.
이를 위해 2010년 펀드자금 유입액이 1000억원 이상이었던 12개 펀드의 수익률을 살펴보자. 1000억원 이상의 돈이 몰린 만큼 다들 인기 펀드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펀드의 2년 3개월 동안의 수익률을 보면 3개를 제외한 9개 펀드가 모두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했다.
2010년 가장 ‘핫한 펀드’로 인기를 끌며 50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유입됐던 ‘알리안츠 기업가치향상펀드’는 당해 수익률이 33.21%를 기록했지만 이듬해인 2011년부터 현재까지 누적 수익률은 -12% 수준이다. 투자금이 4000억원 이상 몰린 한국투자삼성그룹펀드, 한국투자한국의힘, KB한국대표그룹주 펀드들도 당해에는 30% 안팎의 높은 수익률을 냈지만 이듬해부터 현재까지 모두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펀드 전문가들은 돈의 유입과 펀드 수익률의 관계에 주목한다. 투자 당시 시장 트렌드와 펀드 매니저의 철학이 맞으면 수익률이 좋아지고 수익률이 좋아지면 돈이 들어오는 구조인데 이 과정에서 들어온 돈으로 기존에 펀드에 담았던 주식을 더 사기 때문에 수익률이 더 좋아지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시장 트렌드가 바뀌면 수익률이 하락하게 되고 펀드 투자자들이 돈을 빼 가면 관련 종목을 매도하면서 펀드 수익률이 더 빠른 속도로 하락하는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펀드 투자의 색깔이 아주 분명한 펀드의 경우 투자자가 보다 신중해져야 하는 이유다.
이런 이유로 시류의 흐름을 타지 않고 장기 투자를 지향하는 펀드들을 보다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예가 가치주 투자다. 실제로 한국밸류자산운용이나 KB자산운용의 가치투자 펀드들은 2010년에 높은 수익률을 낸 이후에도 이듬해부터 현재까지 20~30%의 누적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무조건 인기 펀드라고 맹신하는 것은 투자자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며 “무조건 장기 투자하기보다는 자신의 투자기간 등을 고려해 시류에 따라 펀드를 갈아타기 하는 것도 하나의 요령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