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산업은 2030년까지 한국에서만 46조원의 경제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관련 일자리도 15만 개 이상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관련 규제와 제도를 정비하고, 법인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가상자산 산업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블록체인 산업 기반이 공고해지고 있고, 실물 자산이 디지털화되는 추세에 맞춰 꽃을 피울 것이라는 낙관론이 우세하다. 물론 그 전에 글로벌 거버넌스가 구축돼야 하고 국내외 관련 규제도 정비해야 한다. 전문가들이 첫 번째 선결조건으로 꼽는 것은 ‘법인 참여’다. 기업들이 투자자로 국내 주식시장에 들어오면서 제대로 된 투자문화가 뿌리내린 것처럼, 가상자산 시장도 비슷한 행보를 보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올해는 국내 가상자산 산업 태동 10주년이자, 국회에서 업권법이 통과된 원년이다. 매일경제신문사와 블록체인 자회사 엠블록은 이를 기념해 지난 8월 ‘제1회 MK 가상자산 컨퍼런스’를 개최한 바 있다. 이 행사에서 발표자와 토론자들은 국내 가상자산 시장이 걸어온 10년을 돌아보고, 향후 10년을 조망하는 생산적인 의견들을 내놨다. 이날 오갔던 논의들과 가상자산 시장의 미래와 발전방향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모았다. 주요 키워드는 ‘비트코인 반감기’ ‘STO 제도권 편입’ ‘각국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발행’ 등이다.
‘비트코인 백서’는 2008년 10월 31일 등장했다. 탈중앙화된 디지털화폐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담긴 보고서 같은 논문, 저자는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정체 모를 인물이었다. 약 3개월이 지난 2009년 1월 3일 비트코인 네트워크가 시작됐다. 첫 가격은 0.0008달러(약 1원)였다. 당시만 해도 이 문서와 네트워크가 만든 것이 ‘금(金)’에 비견될 만큼 존재감이 커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비트코인 역대 최고가는 지난해 4월 14일 기록한 6만3503달러, 한화로는 김치 프리미엄을 더해 8199만원에 달했다.
한국에서는 국내 최초 거래소 ‘코빗’이 문을 연 2013년 4월을 가상자산 산업 시작으로 본다. 이후 10년간 가상자산 시장에 일어난 일들을 정리하면 흥망성쇠를 압축한 ‘대하 드라마’가 따로 없다. 수백 개의 코인들이 화려하게, 혹은 존재감 없이 상장했다가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거래소가 문을 닫았다. 일부 전통 금융권은 거래소와 제휴하거나 관련 상품을 제한적으로 출시하는 식으로 잠깐 발을 담갔다 빼기를 반복했고, 국내외 정부와 감독당국은 ‘자산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가끔 엄포를 놓는 수밖에 없었다. 올 들어서야 유럽연합(EU)이 ‘가상자산 포괄적 규제법안(MiCA)’을 통과시켰고, 한국에서도 지난 7월 국무회의에서 가상자산 이용자보호법이 의결됐다.
그러나 국내에 가상자산 산업이 자리잡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투자보다는 ‘투기’에 가까운 개인투자자들의 관행, 규제가 없는 틈을 타 한탕 해보려는 세력, 거래소를 둘러싼 가격 펌핑과 상장 관련 의혹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가격까지 하락세를 보이면서 시장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향후 10년간 가상자산 시장의 가장 큰 이정표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이 한목소리로 꼽는 것은 ‘법인의 시장 참여’다. 이와 관련해 정석문 코빗리서치센터장은 MK 가상자산 컨퍼런스에서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는 법인이 블록체인 산업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56년 국내 주식시장이 출범(대한증권거래소)한 이후 한동안 개인투자자들만 투자한 기간이 있었다. 정 센터장은 “당시 주식시장은 지금 코인처럼 펀더멘털에 대한 분석 없이 루머로만 거래가 됐다”고 말했다. 주식시장이 지금처럼 성숙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법인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코인 시장에도 법인이 들어오면 비슷하게 변동성이 줄어들고 제대로 된 투자문화가 자리잡을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정 센터장은 법인 유입으로 인한 경제효과가 2030년까지 46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식시장에 법인 투자가 들어오면서 국내 기업들의 주가수익비율(PER)이 1배에서 10배로 뛴 것과 같은 이유다.
강형구 한양대 경영대학 교수도 같은 행사 주제발표에서 기관투자자 유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강 교수는 “현재 국내 코인 시장은 개인투자자만 거래할 수 있고, 전문투자자의 자본인 ‘스마트 머니’가 참여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여러 부정적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들이 시장을 주도하다 보니 소위 ‘상장빔’ ‘상폐빔’처럼 재미 위주의 투기 현상이 심화되고, 건전한 자산보다는 변동성이 큰 자산 위주로 흥행한다는 것이다. 투기 현상이 빈번한 거래소에 더 많은 투자자들이 몰리는 악순환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가상자산 업계의 관심은 금융시장 새 먹거리로 떠오른 ‘토큰증권발행(STO)’이다. 코인과는 결이 다르지만 실물 자산이 디지털화되는 계기이고, 은행과 증권사 등 전통 금융권이 진출하면서 디지털 자산이 제도권에 편입되는 신호탄이 될 전망이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5대 시중은행이 모두 STO 컨소시엄에 참여하기로 했다. 4대 지주가 은행권 컨소시엄을 꾸렸고, 이 분야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하나금융지주도 미래에셋, SK텔레콤과 손을 잡았다. 증권사들은 한발 먼저 STO 전담조직을 마련하고, 다양한 회사와 제휴하며 협업 모델을 만드는 중이다.
은행들은 4분기에 구체적인 시장 참여 방안을 협의하고, 토큰증권을 발행하기 위한 플랫폼 구축에 나설 계획이다. 대형 기업 고객을 확보하고 있는 시중은행들이 매력적인 실물 자산을 토큰증권으로 선보이면 디지털자산 산업도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2024년 국내 토큰증권 시장이 출범하면 2030년까지 시장 규모가 367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STO의 제도권 편입을 바라보는 가상자산 업계의 속내는 복잡하다. 산업 저변이 확대되는 것은 반갑지만, 기존 거래소들이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금융권이 진출하면 자칫 선수를 빼앗길 수도 있어서다. 핀테크 기업들은 전통 금융권 진출에 긴장하고 있다. 이들은 8월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STO 생태계를 확장하려면 금융당국이 정책 지원과 인프개선에 힘을 보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앞으로 많은 우여곡절과 부침이 있겠지만 가상자산 산업이 어떤 식으로든 성장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각국 정부가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발행을 준비하고 있고, 무엇보다 블록체인이라는 기반 기술의 확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블록체인 기술이 인터넷과 스마트폰만큼 인류의 삶을 바꿀 혁신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MK 가상자산 컨퍼런스 기조연설자로 나선 김용범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는 “기존 금융이 블록체인의 도전에 잘 대응하고 한계를 이겨내면 블록체인의 설 자리가 줄어들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블록체인을 무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 6월 ‘미래 통화 시스템의 청사진’이라
는 제목의 연차 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 시스템의 중심이 되겠다고 선언했다”며 “과거 블록체인 분산원장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보수적인 금융기관마저 이제 블록체인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블록체인 기술 발달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가상자산 산업이 성장하겠지만, 현재 시장 상황으로 볼 때 극심한 성장통은 불가피하다. 전 세계 감독 당국이 규제 체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격 급등락과 시장 참여자들의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한진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디지털 자산의 법적 성격부터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디지털 자산은 블록체인상에 데이터 형태로 있는데, 기존 자산과는 성격이 다르기에 어떤 자산인지 법에서 정해주지 않으면 법적 안정성도 없고 신뢰도 없는, 국민들을 속이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거대한 방향은 정해졌지만 투자자들의 관심은 오로지 가격 상승에 쏠려있다. 초 단위로 요동치는 가상화폐 급등락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시장은 내년으로 예정된 ‘비트코인 반감기’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비트코인 발행량은 한정돼 있고, 역사적으로 반감기마다 가격 상승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시장은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이 비트코인 매수를 시작하기에 적기라는 말들이 나온다. 비트코인 투자에 관심이 있다면, 지금부터 소액적립식으로 분할 매수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전략”이라고 귀띔했다. 다만 국내 투자자들이 몰리는 알트코인 매수는 신중해야 한다. 또 다른 거래소 관계자는 “올 4분기는 물론 내년 1분기까지 알트코인 매수는 권하지 않는다. 자칫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면서 “특히 우리나라 투자자들은 알트코인을 선호하기 때문에 가격 쏠림과 부침도 더 큰데 반감기까지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단기적으로는 3년째 이어지고 있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가상화폐 리플의 소송 결과가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SEC는 지난 7월 뉴욕지방법원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며 항소를 요청한 상태다. 이에 리플은 끝까지 소송에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장기적으로는 각국 정부가 추진 중인 CBDC 발행이 중대한 이정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행도 발전전략을 담은 ‘BOK2030’ 보고서에서 일부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 도입을 추진 중이며 한국은행도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고, 디지털 혁신 전략으로 CBDC를 집중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각국 중앙은행이 자체적으로 디지털 화폐를 발행할 경우, 블록체인 생태계와 디지털 경제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지만 기존 코인 사업자들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과거 정보기술(IT) 버블이 꺼질 때처럼, 옥석이 가려지고 확장성 있는 사업 모델만 남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신찬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