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이 될 것 같다는 기대감에 매수 문의가 곧잘 들어오지만 압구정 일대는 원체 매물이 희귀하다. 그러다보니 그야말로 ‘부르는게 값’인 상황이 됐다.”(서울 압구정동 공인중개사 A씨)
지난해 윤석열 정부 취임 이후 서울노후단지의 최대 관심사는 ‘재건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선되면서 재건축에 속도를 내는 단지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정비 사업지는 전임 정부와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등을 거치면서 사실상 멈춰 섰다는 지적이 나왔다. 매일경제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를 통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국에서 111개 단지·10만 7799가구가 안전진단 문턱을 넘었다.
이는 안전진단 기준 강화가 이뤄지기 전인 2015~2018년 2월의 전국 연평균 안전진단 통과 단지 49개와 비교해도 월등히 많은 수준이다.
이처럼 정비사업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시장의 시선이 가장 많이 쏠리는 지역은 역시 압구정(서울 강남구)이다. ‘전통적 부촌’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이곳은 서울시 신속통합기획(신통기획)과 맞물려 재건축 사업에 조금씩 활력이 붙는 모양새다.
이 같은 기대감은 가격에서도 잘 드러난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들어 서울에서는 50억원 이상 초고가 아파트 거래가 70건(8월 15일 기준) 이뤄졌다. 이 가운데 26건이 압구정 구현대, 신현대, 한양아파트 등 압구정 재건축 단지가 위치한 압구정동에서 나왔다.
압구정동의 26건은 신축 고가 아파트와 재건축 단지가 함께 위치한 서초구 반포동 23건을 웃돈다. 서울시의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여 있음에도 재건축에 대한 기대감만으로 거래가 몰리는 셈이다.
압구정 현대 1·2차 전용면적 160.51㎡는 지난 5월 54억5000만원에 매매되며 신고가를 기록했다. 2020년 4월에 발생한 직전 매매금액 36억원보다 18억5000만원 가격이 뛰었다. 인근의 한 공인중개사는 “재건축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집주인들이 웬만해서는 매물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반대로 훗날 들어설 압구정동 신축 단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문의는 꾸준히 들어온다”고 밝혔다.
늘어난 압구정 일대의 거래는 그동안 강남 초고가 아파트 거래를 주도한 대치동·도곡동의 거래 비중 감소로 이어졌다. 올해 대치동·도곡동의 50억원 이상 아파트 매매는 3건으로 지난해 12건 대비 큰 폭으로 감소했다.
대치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강남이나 서초의 초고가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들은 어차피 언제든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며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재건축이 될 것 같은 압구정에 몰리지 않겠냐”고 말했다.
압구정 일대 아파트는 정비사업이 완료되면 가치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글로벌 주요 도시들은 이미 입지 등 모든 측면에서 하이엔드 아파트로 수요가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서울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며 “아파트 가격과 가치 상승은 문화적 요소와 수변 공간 여부 등이 중요한데 압구정은 이에 제일 부합하는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압구정동 재건축사업은 1~6구역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곳은 이른바 ‘구현대’로 알려진 3구역이다. 서울시 신통기획을 진행 중인 3구역은 현재 재건축 설계를 놓고 서울시와 갈등을 벌이고 있다.
부동산업계에서는 서울시와 압구정3구역 간 갈등의 핵심은 용적률과 소셜 믹스(Social Mix)로 보고 있다. 압구정3구역 조합은 2021년 말 서울시 신통기획 참여를 결정했다. 재건축을 비롯한 정비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속도인 만큼 사업 공공성을 어느 정도 강화하고, 행정 절차 처리 속도를 빠르게 하기로 했다. 압구정3구역 조합은 지난 6월 말 재건축 설계 공모전을 진행했다. 설계 공모전에는 희림건축컨소시엄(이하 희림)과 해안건축컨소시엄(이하 해안)이 참여했다.
설계공모안이 공개된 이후인 7월 초해안은 희림 설계안이 용적률 300%가 아닌 360%가 적용됐다며 지침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서울시 역시 희림을 사기미수 혐의로 고발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후 압구정3구역 조합이 7월 15일 주민 투표 끝에 희림을 설계사로 선정했고, 서울시가 이틀 뒤인 17일 “희림 선정은 무효”라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양측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서울시 신통기획에 따르면 압구정3구역과 같은 3종 일반주거지역의 최대 용적률은 300%다. 희림이 조합에 용적률 360% 방안이 담긴 제안서를 제출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친환경 단지, 창의·혁신 디자인 시범사업 등이 적용되면 용적률 20%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지만 압구정3구역은 이 같은 사항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희림은 설계 공모 조합원 투표 당일 용적률을 300%로 적용하겠다고 밝혔고, 조합도 이를 수용했지만 서울시와의 갈등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서울시는 7월 말 압구정3구역 조합에 대한 현장 실태 점검에 돌입했다. 설계사 선정 과정의 위법성 여부와 절차상의 문제점 등을 판단하기 위해서다. 서울시는 현장 실태 점검을 8월 9일까지 일주일 더 연장하겠다고 밝히는 등 강경 대응 기조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에 압구정3구역은 ‘서울시가 신통기획 실적을 위해 표적 감사를 밀어 붙이고 있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압구정3구역 단지에는 ‘허위사실로 주민을 선동, 불안케 하는 것은 명백한 조합 업무 방해’, ‘조합이 무엇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냐’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조합원 중 일부는 신통기획이 아닌 압구정3구역 단독으로 재건축을 추진하자는 목소리도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논란 초기만 해도 용적률 문제는 사실 조합, 건축사, 서울시가 합의하면 잘 풀릴 것으로 봤는데 생각보다 갈등이 깊어지는 것 같다”며 “서울시 입장에서 압구정과 같은 주요 지역에 신통기획 성과를 내는 것 이상으로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시 내부에서는 압구정 집값 등을 감안할 때 용적률이 60%포인트 상향되면 수조원의 사업 수익이 예상되는 만큼 재산상 이익을 부풀린 사기 행위라는 주장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용적률뿐만 아니라 ‘소셜 믹스’ 논란이야말로 서울시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반적으로 정부, 지방자치단체는 정비사업을 허가하는 과정에서 사업지의 공공기여 여부를 비중 있게 점검한다. 임대주택 물량이 늘어나면 용적률을 높여주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압구정3구역을 둘러싼 갈등 가운데 하나가 조합이 채택한 설계안이 소셜 믹스 취지를 어겼다고 서울시가 판단하는 것이다. 희림이 최초에 제출한 설계안에 따르면 기존 조합원이 분양받을 단지와 임대주택, 일반분양분 단지가 분리돼 있다. 공공보행로가 단지 내부를 관통하는 것이 아닌 바깥쪽으로 우회하면서 일반인 통행이 제한됐다는 점도 서울시가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오세훈 서울시장의 핵심 정비사업 정책은 7월 말 기준 82곳에서 추진 중이다. 여의도 한양·시범아파트뿐만 아니라 목동신시가지 7·8·10·12·13·14단지 등 서울 주요 재건축 단지들이 신통기획에 합류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합원 단지와 일반분양·임대주택 단지가 분리되고, 공공보행로도 기존 취지와 달리 단지 바깥으로 만들어지면 서울시는 향후 다른 재건축 단지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 서울시 관계자는 “한 곳에서 예외가 허용되면 서울 모든 지역에서도 같은 조건이 허용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압구정3구역이 서울시와 갈등을 빚는 동안 다른 구역의 재건축사업은 조금씩 속도를 내고 있다.
압구정 재건축사업에서 후발주자로 평가받은 4구역과 5구역은 최근 설계 공모전 절차를 밟고 있다. 4구역과 5구역 역시 신통기획을 통해 재건축을 진행하겠다는 방침이다.
정비업계에 따르면 5구역 설계 공모전에는 해안, 건원건축, ANU건축 등이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 공모전 참여 여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서울시 신통기획 기준에서 사업성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고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4구역 역시 신통기획을 기준으로 한 공모지침을 바탕으로 설계사 선정을 앞두고 있다. 건원건축, 토문건축, DA건축, 정림건축이 공모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조합은 신통기획을 기준으로 세부 내용을 검토 중이다. 조합은 결격 사유가 있을 경우 8월 26일 예정된 홍보부스개관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이른바 ‘신현대’로 알려진 압구정2구역은 지난 6월 말 정기총회를 열고 재건축 설계를 DA건축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DA건축은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와 함께 재건축 설계도를 만들었다.
제3회 서울 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이기도 한 페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독일 베를린올림픽 벨로드롬 등의 설계를 맡았다. DA건축은 “압구정2구역 디자인 테마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차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압구정 2구역을 시작으로 압구정 재건축 단지에 고급화 경쟁이 촉발될 가능성이 높다”며 “서울의 대표적 부촌이고, 오랜 기간 재건축을 기다려온 만큼 외관에서부터 차별화를 강조하려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성 1차, 2차로 구성된 1구역도 재건축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높다. 다만 단지별 용적률 등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이 향후 재건축사업의 변수로 꼽힌다.
정석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