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종목 엔비디아가 쏘아 올린 인공지능(AI) 특수발 호황에 반도체 관련주 주가가 신바람이 났다. 올해 1분기 엔비디아가 깜짝 실적을 기록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경기가 시장의 예상보다 빠르게 바닥권을 지나 반등할 것이란 기대감이 반영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월가에선 AI 챗봇인 ‘챗GPT’를 비롯한 AI 열풍이 데이터센터 반도체 수요를 늘리는 효과가 눈으로 확인됐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한국이 주력으로 삼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까지 끌어올리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국내 반도체 대표 종목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주가도 이후 상승세를 유지 중이다.
미국 증시에 따르면 6월 중순 기준 엔비디아 주가는 연중 175% 급등했다. 주요국 증시 약세장이 지속되던 지난해 10월 기록한 저점 대비 265%나 올랐다.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어느새 1조달러에 육박했다. 또 다른 반도체 종목인 어드밴스트마이크로디바이시스(AMD) 및 브로드컴 주가도 연중 각각 101%, 54% 올랐다.
미국의 반도체 종목 주가가 급등한 건 엔비디아가 월가 예상을 크게 웃도는 1분기 호실적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미국 회계연도 기준 1분기(2~4월) 실적 발표를 통해 매출이 전년 동기에 비해 13% 감소했지만 AI 반도체가 포함된 데이터센터 사업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14%나 증가했다고 밝혔다.
엔비디아는 세계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시장이 주목한 건 향후 데이터센터 사업 부문 실적 가이던스다. 엔비디아는 2분기에도 시장 전망보다 54%나 많은 110억달러의 매출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당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데이터 산업이 가속 컴퓨팅과 생성형 AI라는 두 가지 전환을 동시에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엔비디아의 호실적에는 데이터센터 인프라스트럭처 확충으로 인한 수요 증가가 주효했다. 엔비디아의 데이터센터 부문 매출은 42억8000만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14% 늘었다. 월가 전망치(39억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데이터센터의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기업들의 GPU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문준호 삼성증권 연구원은 “실적, 가이던스를 통해 AI 수요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더 강력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엔비디아는 몸소 증명했다”며 “유저 확대에 따른 수익을 다시 기술 개발에 투자해 더욱 유저를 확대하는 이상적인 선순환 구조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통계 업체인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글로벌 데이터센터의 매출액은 올해 3421억달러(약 45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전년 대비 6.5% 증가한 수치다. 데이터센터 시장 규모는 2024년 3575억달러에서 2027년엔 4000억달러를 무난히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얼라이드마켓리서치는 2030년까지 데이터센터 산업의 연평균성장률(CAGR)이 10.5%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실제 최근 들어 대다수 글로벌 기업은 전사적인 디지털 전환을 준비 중이다. 특히 급증한 데이터를 분석하기 위해 효율성과 연산 처리 속도가 중요해지면서 제품 수요가 늘고 있다.
이미 지난해 엔비디아의 AI 반도체칩이 포함된 데이터센터 매출액은 2021년 대비 43.4%나 급증한 바 있다. 가트너에 따르면 AI 반도체 시장 규모도 지난해 444억달러에서 2026년 861억달러로 4년 동안 2배가량 성장할 것으로 추정됐다. 2030년엔 시스템반도체 중 30% 이상을 AI 반도체가 차지할 것으로도 기대된다.
엔비디아 실적 발표로 비메모리 외 메모리반도체 종목들에도 훈풍이 불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도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에 따른 수혜를 입게 될 전망이다. 생성형 AI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 학습이 필요하다. 이는 대량 데이터 처리를 위한 차세대 메모리반도체 수요 확대로 이어진다.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1위 종목인 삼성전자 주가는 6월 중순 기준 연중 29% 오르며 ‘7만전자’ 복귀에 성공했다. SK하이닉스 주가도 57%나 상승했다. 시가총액 상위 종목들의 도약에 코스피는 1년 만에 2600선을 돌파했다.
반도체 업황 개선은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가격 반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만의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올해 2분기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각각 1분기 대비 13~18%, 8~13%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하락 폭은 당초 예상치인 20%, 10~15% 대비 소폭 감소하면서 업황 반등에 대한 기대감이 나오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의 감산 효과가 나타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트렌드포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글로벌 D램 공급량이 2Gb(기가비트) 칩 환산 기준 1043억 6200만 개로 총수요인 1054억 1900만 개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올해 공급이 1055억 5400만 개로 수요 예상치인 1046억 6200만 개를 웃돌 것으로 봤는데, 연간 전망치가 ‘공급 초과’에서 ‘수요 초과’로 바뀐 것이다. 트렌드포스는 7월부터는 수요가 공급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2분기 D램 출하량은 직전 분기 대비 20% 증가하며 재고 감소가 시작될 것으로 추정된다”며 “올해 영업이익을 11조원으로 4.7%, 내년 이익도 41조원으로 20.1% 상향 조정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차세대 메모리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업계 최선단 12나노급 공정으로 16Gb DDR5 D램 양산을 시작했다. 이전 4세대(14나노급) 대비 생산성이 향상됐고 소비전력이 23%나 개선됐다. 전력 소요량이 많은 글로벌 데이터센터 운용 기업에 유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SK하이닉스의 낸드플래시 자회사 솔리다임도 데이터센터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신제품을 출시했다. 이전 세대 대비 데이터 저장 밀도를 1.5배 높이고 에너지 비용을 18% 절감했다.
다만 일각에선 AI 특수로 인한 반도체 주가가 지나치게 급등했다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현재 시장에서는 엔비디아의 매출액이 다음 분기에 2배가량 증가할 것으로 기대하고 이를 주가에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고금리, 고물가 등 거시경제 불확실성에 따른 경기 침체 위험이 여전해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CNBC에 따르면 과거 메릴린치의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역임한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로젠버그는 “AI에 가격 거품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이는 1990년대 후반 나스닥의 닷컴버블과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경고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댐프드스프링어드바이저의 CEO인 앤디 콘스턴은 “AI의 부상이 장기적으로 생산성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며 “전체 경제는 AI 주가가 나타내는 식으로 개선되지 않아 기업가치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향후 규제 리스크가 대두될 수도 있다. AI 확산이 결국 일자리 감소로 이어짐에 따라 정치권에서 특정 분야 내 AI 활용을 제한하는 등 정책이 잇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AI가 주도할 신경제 질서를 고려할 때 상승 랠리가 지속될 것이란 반론도 있다. 제러미 시걸 와튼스쿨 교수는 “엔비디아가 장기적으론 약간 과대평가됐을지 모른다”면서도 “단기적으로 주가 상승 모멘텀(동력)은 계속될 것이며 주가가 얼마나 오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전했다.
AI 관련주 기업가치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가운데 엔비디아 경영진들은 주식을 잇달아 매각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5월 이후 엔비디아 경영진 총 6명이 엔비디아 주식 20만 7596주를 처분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각금액만 7901만8541달러(약 1023억원)에 달한다.
가장 많은 지분을 판 임원은 주식 10만 주를 매도해 3790만달러(약 490억원)를 손에 쥐었다. 최고재무책임자(CFO)와 부회장도 엔비디아 주식을 매각했다. 콜렛 크레스 CFO는 주당 406달러에 엔비디아 주식 6124주를, 데버라 쇼퀴스트 부회장도 2만 3084주를 매도했다.
통상 핵심 경영진이 주식을 매도하는 것은 주가가 고평가됐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앞서 ‘가치평가의 대가’로 불리는 애스워드 다모다란 뉴욕대 교수도 최근 2017년부터 보유해온 엔비디아 주식 전량을 매도했다. 미국 CNBC에 따르면 6월 그는 “AI 열풍을 고려하더라도 엔비디아 주가가 양심적으로 너무 높은 수준까지 올라갔다”며 “엔비디아를 계속 보유하면 가치투자자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5년 동안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시가총액 상위 기업 간 변동이 눈에 띈다. 메모리반도체 기업들의 순위가 내린 반면 팹리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 비메모리반도체 기업들의 약진이 돋보인다.
한국거래소, 미국 증시에 따르면 6월 중순 기준 글로벌 반도체 시가총액 1위 종목은 엔비디아로 9705억달러(약 1237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지난 2018년엔 814억달러로 당시 전 세계 반도체 종목 중 6위였지만 단숨에 1위 자리를 차지했다. 2위인 대만의 TSMC(5552억달러)와의 격차를 크게 벌렸다.
반면 5년 전 시가총액 1위였던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이달 중순 3377억달러로 엔비디아, TSMC, 브로드컴에 이어 4위에 위치하고 있다. 2018년 당시 시가총액(2303억달러) 대비 성장했지만 고속 성장한 비메모리 종목들의 증가 폭에 미치지 못했다. 2018년 반도체 2위였던 인텔은 8위까지 밀려났다. 대다수 반도체 종목들이 5년 새 시가총액이 늘었지만 인텔만은 40%가량 감소했다.
D램, 낸드플래시 단가가 하락하고 경기 둔화 여파로 고객사들의 재고 조정이 지속되면서 전통적인 사이클 산업인 메모리사들의 주가 상승이 비메모리 대비 정체된 모습이다. 비메모리는 AI 및 차량용 반도체 등 고성장 산업에서의 수요 증가로 주가 상승 동력이 발생했다. 또 메모리 대비 재고가 적어 가동률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점도 장점이다.
매일경제 증권부 차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