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간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꼽히던 가계부채 문제가 개선되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은행권을 시작으로 11월에는 비은행권에서 가계대출이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디레버리징(Deleveraging) 현상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기준금리의 급격한 상승으로 저금리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지난 10여 년 동안 이루지 못한 가계대출 관련 정책 목표를 단 1년 만에 달성하게 된 셈이다. 이전까지 가계부채 증가율 목표치를 부여하는 등 가계부채 증가 폭을 낮추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왔으나 오히려 가계부채의 증가를 가속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 사실이었다.
최근의 디레버리징은 금리 상승과 함께 자산 가격의 하락에 따른 차입수요 감소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지난해 8월부터 시작된 기준금리 인상으로 대출금리가 급상승하면서 차주의 이자 상환 부담이 커져 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8월부터 올해 1월까지 총 10회에 걸쳐 기준금리를 300bp 인상했으며 신용대출 금리가 더 빠르게 상승하면서 신용대출의 감소 폭이 확대되고 있는 환경이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금리가 동반 상승하였으나, 신용대출 금리가 주택담보대출 금리에 비해 빠르게 상승해 신용대출이 먼저 감소세로 전환하고 있다. 신용대출은 통상적으로 만기 1년이지만 중도상환수수료가 없어 쉽게 상환할 수 있기 때문에 최근 13개월(2022년 3월~2023년 1월) 동안 신용대출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기준금리가 현재와 같은 3.25%였던 시기에 당시 주택담보대출 금리와 신용대출 금리를 비교해 보면 최근 금리 수준이 과거와 비슷한 수준으로 금리 상승기에 이자 상환 부담이 큰 편이다. 주가와 주택 가격 등 자산 가격 동반 하락으로 투자 관련 차입수요도 급격히 약화하고 있다.
코스피는 2021년 6월 3200 선에서 고점을 기록한 후 내림세를 보이고 예금금리가 상승함에 따라 역머니무브 현상이 나타나면서 투자자예탁금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주택매매지수 역시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으로 팬데믹 기간 중 급등세를 보였으나 최근 들어 조정 국면에 진입한 지 오래다. 주택매매지수는 올 1월에 96.6을 기록해 2022년 6월 100.9를 고점으로 내림세를 지속하고 있다.
오랜 기간 저금리에 익숙했던 금융소비자들이 급격하게 변화된 금융 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금융소비자들이 신용대출을 원래 목적에 맞춰서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는 등 금리 상승기에 합리적인 행태를 보인다.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2022년)에 따르면 신용대출의 용도별 비중에서 부동산 투자 수요 또는 주거비 지출 목적으로 활용하는 비중이 작아지는 추세다. 거주 주택 외 부동산 마련 자금용도 비중이 12.9%에서 10.8%로 감소하고, 거주 주택 및 전월세 보증금 마련 자금 비중도 23.4%에서 21.5%로 감소하고 있다.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과 영국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장기간에 걸쳐 디레버리징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주택 가격 하락과 함께 가계부채 조정 국면에 진입하기 시작해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중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글로벌 금융위기의 부실 처리 과정에서 디레버리징이 시작되었으나 최근까지 상당 기간 진행되어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중이 145%(2007)에서 101%(2021)까지 감소했다.
영국의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중도 2007년 당시에 174%를 기록할 정도로 높았으나 2021년 현재 148%로 낮아진 상황이다. 이와 함께 디레버리징에 성공한 국가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Debt Service Ratio)은 7~8%대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정희수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원은 “금융소비자는 고금리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디레버리징 계획을 수립하는 등 합리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라며 “고금리 대출부터 상환하고, 관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차입하는 대출 문화를 형성하는 한편 마이너스 통장 등이 차입 용도에 맞게 사용될 수 있도록 관리하고 차입 소비를 억제하는 생활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라고 조언했다.
과거 디레버리징 시기를 살펴보면 투자 시장에 크게 우호적인 환경은 아니었다. 가계는 자산(특히 부동산) 가격 상승 기대와 자금 조달 여건(가계수지, 고용, 금리 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레버리지 확대를 결정한다. 자산 가격에 대한 전망이 긍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자금 조달 여건이 비우호적일 경우 공격적으로 레버리지를 일으키기 쉽지 않다. 과거 가계수지가 악화되는 구간에서 공통으로 디레버리징이 전개된 이유다.
과거 두 차례 디레버리징 시기를 복기해보면 향후 전개 양상이 더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먼저, IMF 외환위기 이후인 1998~2000년을 보자. 당시 국내 기업들의 무분별한 외채 조달이 부메랑이 되어 대규모 도산 및 실업으로 귀결됐다. 실업률은 2~3%대에서 8% 내외로 급등했고, 해고되지 않은 근로자 역시 임금 삭감이 불가피했다. 1997년 말 35%까지 치솟은 익일물 콜금리는 1998년 하반기 들어서야 한 자릿수로 둔화했다. 소득 감소와 이자 지출 증가 등이 맞물리며 1990년대 25~26%를 유지했던 저축률은 2000년 20.9%까지 내려갔다.
자금 조달 여건이 크게 악화되면서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997년 말 50%에서 1999년 말 45.1%까지 축소 흐름이 이어졌다. 주택 가격은 1980년대 후반으로 회귀했고, 코스닥 시장은 1998년 5월 주식 시장 전면 개방과 IT 거품이 맞물려 급등했으나 2000년 들어 1998년 폭등 이전 시점까지 추락했다. 디레버리징과 리세션이 함께 찾아온 것이다.
2002년 카드채 사태 이후에도 약 2년간 가계부채 축소가 전개됐다. 외환위기 이후 위축된 소비 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규제가 상당수 완화되면서 가계의 신용카드 사용이 급증했다. 문제는 신용이 불분명한 학생들에게까지 무분별하게 발급되며 1999년 3900만 장에 불과했던 신용카드는 2002년 1억 장을 넘기게 된다. 내수를 중심으로 경기가 위축되며 2003년 들어 실업률은 재차 상승하기 시작했고, 2002년 23.5%까지 회복됐던 가계 저축률은 다시 21%대로 하락했다. 기준금리는 3~4%대에서 내림세를 유지해 잠재성장률을 생각하면 조달 비용 부담은 제한됐다.
다만 은행 대출이 어려운 빈곤층 중심으로 이자가 20~30%에 달하는 현금서비스를 생활비에 사용하면서 2002년 가계 실소득 대비 현금 대출 비율이 100% 초과했고 결국 카드 연체율은 2003년 말 14%를 넘겼다. 외환위기 당시 143만 명이었던 신용불량자는 2004년 무려 360만 명까지 늘어났다. 2002년 말 신용카드 확산에 힘입어 64%까지 확대됐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5년 1분기 60%까지 축소됐다. 주택 가격은 2003년 10월을 고점으로 2005년 1월까지 3.4% 하락했고, 코스닥 시장은 2002년 1분기를 고점으로 2004년 말까지 추세적으로 하락했다.
김찬희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1990년 이후 주택 가격이 가계부채에 약 8~10개월 후행해왔음을 고려하면 가계 디레버리징의 지속 여부가 자산 가격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라며 “가계가 차입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자산 가격 상승에 대한 확신 또는 우호적 자본 조달 여건이 뒷받침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가격 상승에 대한 확신이 있더라도 자본 조달 여건이 비우호적일 경우 공격적으로 대출을 실행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또한 그는 “과거 주택 시장이 개선되면서 코스닥 상승이 동반됐던 시기가 4차례 있었다. 다만 2000년대 중반과 2020년 코로나 시기처럼 가계대출 증가가 수반될 때만 추세적인 상승세가 이어졌다”라고 덧붙였다.
이전 사례와 지금은 다를까? 현시점의 고용 및 가계수지 등 경제의 펀더멘탈은 양호한 편이다. 1월 계절조정 실업률은 2.9%로 2000년대 이후 가장 낮은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고, 작년 4분기 가계 저축률 또한 30.2%로 2019년 평균인 27.8%를 넘어섰다. 다만 작년 하반기 이후의 흐름이 다소 비우호적으로 흘러가고 있어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하건형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실업률은 작년 8월 2.6%를 저점으로 더디지만 상승 추세를 이어가고 있고 취업자 증가 속도 역시 하향되고 있다”라며 “작년 초 전년 대비 100만 명 넘게 증가했던 취업자는 올해 1월 40만 명대로 증가 폭이 축소되는 등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 특성을 고려하면 향후 고용 여건은 추가로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설명했다.
통상 취업자 증가율은 수출 증가율을 3~4개월가량 후행한다. 가계 저축률 역시 작년 1분기 35.1% 고점을 찍고 내림세가 이어진다. 작년 3분기부터 가구당 가계소득은 전년 대비 감소 전환되지만 소비는 리오프닝 효과와 이자 등 비소비지출이 늘어난 영향으로 증가한 까닭이다.
고용 시장 둔화로 가계소득 증가를 기대하기 어려운 가운데 고금리 부담이 추가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2022년 가구당 평균 가계수지 내 이자 비용은 20.9만원으로 소득(545만원) 대비 4%에 못 미쳤다. 2022년 평균 가계대출 금리는 2022년 6월 예금은행 가계대출 금리(잔액 기준)인 3.5% 정도로 추정되고 2023년 1월 금리는 4.8%다. 올해 가계대출 금리를 5%, 부채 규모가 유지된다고 할 경우 이자 비용은 약 50~60% 늘어난 30만원 선이 예상된다. 저축률을 2%포인트 하향시킬 요인이다. 단순히 저축액 조금 줄어드는 것으로 가계가 차입 축소에 나설까 의문이 들 수 있다.
김찬희 연구원은 “평균의 함정을 고려해야 한다”라면서 “전체 가구 내에는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은 저소득 계층이 있고 부채의 크기 또한 가구별로 상이하다. 가구의 소득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부채를 가진 가계는 디레버리징이 필연적”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카드채 사태 시기에는 2%포인트 미만의 저축률 하향에도 GDP 대비 4%포인트가량의 부채 축소가 이뤄졌다.
다만 연초 이후 부동산 시장 회복 기대와 연동돼 코스닥을 중심으로 개인 자금이 가파르게 유입되는 등 자산 가격 반등 기대가 고조되기도 했다. 코스닥 지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과거 이러한 흐름이 추세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가계의 추가적인 부채 조달을 통한 유동성 공급이 뒷받침돼야 가능할 것이라 진단하고 있다. 즉 단기적인 심리 회복에 의한 자산 가격 상승은 가능할 수 있으나 추세적인 상승 가능성에는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
김찬희 연구원은 “2022년 하반기부터 가시화된 가계의 디레버리징 사이클은 과거 경험에 근거하면 적어도 2년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라며 “대내외 경기 불확실성 속 고용 경기 둔화 압력이 점증하고 자본 조달 비용마저 높게 유지되고 있어 적극적으로 레버리지를 일으키기 쉽지 않은 구간”이라고 지적했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