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디자인이 혁신적인 건축물이 많이 생기도록 각종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민간 건축물은 특색 있는 디자인을 도입하면 용적률을 법정 상한선의 최대 1.2배까지 높여준다. 매년 독특한 건축물이 탄생해 ‘현대 건축의 전시장’으로 불리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처럼 관광객을 부르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취지다. 주거 분야에서도 획일적 디자인의 성냥갑 아파트를 퇴출한다. 다양한 스카이라인을 조성하기 위해 초고층 아파트 건립을 허용할 계획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최근 서울시청에서 기자설명회를 열고 ‘도시·건축 디자인 혁신 방안’을 이 같이 발표했다. 그는 “서울은 이미 많은 관광객이 오고 싶어 하는 도시”라면서도 “저는 (관광객이) 왔다가 ‘서울이 이 정도밖에 안 되냐’고 실망할까봐 두렵다. 별 게 없다고 느낀 사람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어 “아름다운 한강과 멋진 산이 있고 기가 막힌 건축물이 어우러진 도시, 한번 꼭 가볼 만한 도시를 만들고 싶다”라며 “지금은 건물 하나가 도시의 운명을 바꾸는 시대이기도 하다”라고 밝혔다.
디자인 혁신을 위해 민간에서는 ‘특별건축구역 공모’를 진행한다. 공모를 통해 혁신적인 건축 디자인에 대한 제안을 받을 계획이다. 이때 디자인이 훌륭한 건축물은 용적률을 법정 상한선의 1.2배까지 높여준다. 가령 제3종 일반주거지역에 있는 건축물은 용적률 상한선이 300%지만 혁신 디자인을 도입하면 용적률을 1.2배 많은 360%까지 올릴 수 있게 된다.
여러 심사 단계에서 디자인이 변경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도시·건축·교통·환경 평가를 ‘통합심의’ 한다. 디자인이 우선시되는 시스템을 만들겠단 취지다. 오 시장은 “그동안 복잡한 심의 과정에서 디자인이 당초 그린 것과 다르게 왜곡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했다”라며 “용을 그렸는데 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디자인 콘셉트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통합심의를 하게 되면 의사결정이 빨라져 신속한 건축이 가능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건축에 대한 인식 변화에도 나선다. 세계적인 건축가로 심사위원을 구성해 ‘서울시 건축상’을 내실화한다. 수상자에게는 설계공모전에 참여할 때 가산점을 부여할 계획이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를 통해서도 건축 문화의 저변을 확대한다.
우수 디자인 13원칙을 만들어 주거 분야의 디자인 혁신도 추진한다. 오 시장은 “성냥갑 아파트 퇴출 2.0 정책을 추진하겠다”라며 “앞으로 지어지는 아파트들은 디자인적으로 우수한 건축물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오 시장의 핵심 사업 중 하나인 ‘한강 르네상스 2.0’과도 연관되는 내용이다.
향후 서울시는 한강 접근성을 고려한 특화 디자인을 설계하면 초고층 아파트 건립을 허용할 계획이다. 한강변을 따라 조화로운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도시 경관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다. 구체적으로 아파트 최고 층수를 35층 이하로, 한강변 인근은 15층 이하로 제한한 규제를 완화한다.
대신 한강 접근성을 높이는 보행교 등 시설물을 공공기여로 받는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최고 65층, 2500가구로 짓는 대신 문화공원을 공공기여로 받는 게 대표적이다. 원효대교 진입 램프와 차도로 접근이 어려웠던 한강으로의 연결성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공원과 한강공원을 연결하는 입체보행교도 신설한다.
서초구 신반포2차아파트도 최고 49층 높이 2050가구 규모로 재건축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한강변과 가장 가까운 아파트를 20층으로 기존보다 5층 높여 설계했다. 서울시는 용적률을 높여준 대신 한강 접근성을 키우는 방식으로 공공기여를 받을 계획이다. 단지 중앙에 반포 한강공원과 닿아 있는 공공보행통로를 만드는 식이다. 잠수교가 보행교로 바뀌는 만큼 공공기여를 통해 입체보행로나 나들목을 새로 만들어 연계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주거지 면적의 약 42%를 차지하고 있는 다세대·연립주택 등 저층 주거지를 대상으로는 ‘더 살기 좋은 동네, 한층 더 예쁜 집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디자인을 특화하면 마찬가지로 용적률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창의적인 건축을 장려하는 게 목적인 ‘특별건축구역’ 제도도 개편한다. 현재 건축법상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된 곳은 각종 건축 규제가 완화된다. 그러나 지금까진 구역으로 지정돼도 아파트 일조권 규제를 푸는 수준에 그쳤다. 서울시는 앞으로 특별건축구역을 ‘디자인자유구역’으로 전면 바꿔 나갈 방침이다.
공공건축물 역시 사업 초기 단계부터 기획 디자인 공모를 실시한다. 창의적인 디자인을 먼저 책정하고 적정 공사비를 계산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공사비를 정해놓고 디자인을 짜다보니 특수공법을 도입하거나 비정형의 건축물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서울시는 밝혔다.
공공 분야의 디자인 혁신 1호 사업으로는 ‘노들섬 프로젝트’가 선정됐다. 노들섬 사업은 이미 기획 디자인 공모 절차가 진행 중이다. 세계적으로 검증된 국내외 건축가들이 작년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디자인 공모 경쟁을 벌이고 있다. 토머스 헤더윅(영국), 위르겐 마이어(독일), 김찬중(한국), 나은중·유소래(한국), 신승수(한국), 강예린(한국) 등 국내외 건축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올해 안에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투자심사 등 절차를 밟는다.
서울시는 노들섬을 한강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키울 방침이다. 자연과 예술, 색다른 경험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겠단 포부다. 구체적으로 노들섬 동~서측을 연결하면서 한강의 석양을 360°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보행교를 신설한다. 공중에서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스카이 트레일’을 만들겠단 것이다. 스페인 세비야에 있는 메트로폴 파라솔과 독일 알고우에 있는 스카이워크 등을 벤치마킹했다.
문화 체험이 가능한 예술 보행교 ‘아트 브리지’도 세운다. 한강을 배경으로 한 수상예술무대도 새롭게 마련할 계획이다. 또한 한강의 수위에 따라 수변 공간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바운드리스 쇼어’를 만든다. 한강변을 따라서는 편의시설과 수목 식재를 다양하게 배치한다.
이 외에도 제2세종문화회관, 성동구치소, 수서역 공영주차장 복합개발 사업을 공공 분야 디자인 혁신 시범사업으로 추진한다. 민간 분야에 대해서도 올해 상반기 중에 시범사업 대상지 공모를 받는다. 선정된 시범 사업지에 대해선 용적률, 건폐율을 대폭 풀어줄 계획이다.
오 시장이 디자인 혁신을 대대적으로 강조하고 나선 건 이런 방식으로 경쟁력을 높이는 해외 도시가 늘었기 때문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현대건축의 전시장으로 불리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은 연간 관광객이 약 1000만 명, 관광수입이 8000억원에 달하는 상황이다. 로테르담에 가면 전통시장과 공동주택을 독특한 건물 안에 모아놓은 ‘마켓 홀’과 부교 위에 모듈식 목재건물을 만든 ‘폴’ 등을 볼 수 있다.
1970년대 쇠락하는 공업 도시로 불리던 스페인 빌바오도 디자인을 앞세워 재기에 성공했다. 일등공신은 단연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타이타늄으로 돼 있는 외관과 불규칙한 볼륨이 인상적인 건축물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생긴 후 연간 관람객 130만 명이 찾아오자 도시 전체가 활력을 띠게 됐다. 상징 문화시설을 통해 도시 재생 효과를 얻는 걸 아예 ‘빌바오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일 건축물에 용적률 혜택을 주는 것을 넘어 아예 서울형 용도지역 제도도 실행한다. 하나의 공간 안에 다양한 기능이 유연하게 담기도록 하는 일명 ‘비욘드 조닝(Beyond Zoning)’이다. 현재 용도지역이 업무·상업·주거·녹지 등으로 명확히 나뉘어 공간을 복합적으로 쓰기 어렵다 보니 이 같은 제도를 새로 만들었다. 근무시간과 업무공간이 다양화되고 여가 문화를 중시하는 기조가 생기며 공간 기능이 융·복합됨에 따라 용도지역 제도를 개선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서울시는 3월 안에 새로운 도시계획 체계인 비욘드 조닝을 실현하기 위한 연구용역에 착수한다. 그간 서울시는 국토교통부에도 비욘드 조닝 제도를 정부 차원의 주요 정책으로 삼아달라고 계속 제안했다. 국토부는 이를 받아들여 최근 공간혁신구역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이름만 다를 뿐 비욘드 조닝과 공간혁신구역이 추구하는 것은 비슷하다.
공간혁신구역은 도시혁신구역, 복합용도구역, 도시계획시설입체복합구역 3가지 종류로 이뤄져 있다. 비욘드 조닝과 같이 유연한 도시계획을 통해 공간을 복합적으로 쓰는 게 목표다.
서울시는 “국토부의 정책에 발을 맞추겠다”라며 “용역을 통해 공간혁신구역의 선정 기준과 가이드라인을 구체적으로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서울의 공간혁신구역 시범사업 대상지를 연내 선정해 2024년 구역 지정을 추진하겠다”라고 강조했다.
공간혁신구역 3가지 가운데 도시혁신구역은 민간이 토지용도를 자유롭게 계획할 수 있게 만든 제도다. 싱가포르가 이 방식으로 주거·국제업무·관광 기능을 두루 갖춘 마리나베이를 복합 개발한 바 있다. 서울시는 현재 용산국제업무지구를 도시혁신구역으로 지정해 복합 개발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중이다.
복합용도구역은 기존의 용도지역에 유연성을 부여하는 제도다. 노후 공업단지를 주거·업무·공공·문화시설을 갖춘 수변 지역으로 재개발한 미국 보스턴 혁신지구가 대표적 사례다. 서울에선 은평구 녹번동 혁신파크 부지가 복합용도구역 적용 대상지로 거론된다. 서울시는 작년 12월 이곳을 주거와 일자리·문화시설을 모두 갖춘 이른바 ‘직(職)·주(住)·락(樂) 융복합도시’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도시계획시설 입체복합구역은 입지 조건이 우수한 도시계획시설을 복합 개발하는 방법이다. 역세권에 위치한 노후 청사를 복합용도로 개발하면 밀도를 1.5~2배 늘려준다. 서울 광진구 동서울터미널이 이 구역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열려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이곳을 최고 40층 높이의 광역교통 중심 복합 공간으로 바꾸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조남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은 “비욘드 조닝을 통해 토지 이용 유형, 용도, 밀도, 건축물 형태 등이 다채롭게 조합되는 미래 도시를 실현해갈 것”이라며 “이번 용역을 시작으로 서울에 걸맞은 도시계획 혁신에 대한 시도를 꾸준히 이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희수 매일경제 부동산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