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준금리가 급등세를 보이면서 고금리 시대 유용한 포트폴리오 관리 수단으로 채권 투자가 떠오르고 있다. 주식 등 지난 2년 동안의 유동성 장세 속 시세 급등을 이끌었던 위험자산 시장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채권 투자는 안정적인 이자수익과 더불어 향후 매매차익까지 기대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큰손들의 채권 투자 관심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일선 증권사를 통해 채권 투자를 문의하는 자산 규모 30억원 이상의 고액 자산가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은퇴한 장년, 노년층도 노후 대비를 위한 현금흐름 창출을 위해 채권에 뭉칫돈을 넣는 경우가 덩달아 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9월 중순까지 기준 장외 시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의 채권 순매수액은 12조6179억원에 달했다. 이는 전년 동기 수치인 3조688억원 대비 311%나 급증한 수치다.
개인투자자들은 올해 주로 회사채, 기타금융채, 국채 등을 대거 사들이며 포트폴리오 비중을 높였다. 채권 투자액도 점차 늘고 있는데 올해 1~5월 개인투자자 1인당 채권 평균 투자금액은 전년 동기 대비 91% 증가했다. 고액 자산가들의 채권 예탁자산도 늘고 있는 추세다. 고액 자산가 자산관리 전문성이 뛰어난 증권사인 삼성증권에 따르면 지난 2019년 69조1000억원이었던 고액 자산가 자산 규모는 2020년 97조9000억원, 2021년 108조5000억원으로 급증했다. 특히 전통적 부촌인 서울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구)에 거주하는 고액 자산가들의 채권 매수 비중이 전국의 41%를 차지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일반 개인투자자뿐만 아니라 머니 무브에 민감한 큰손들 또한 채권 투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고금리 시대 채권 투자 매력이 크게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채권 투자를 통해 기대해볼 수 있는 수익 실현 수단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고금리의 이자 수익을 노려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발행 가격 대비 현재 시세가 떨어진 채권을 저가에 매수한 후 향후 가격이 오르면 되팔거나 만기에 발행 가격에 상환 시 매매차익도 노려볼 수 있다. 채권 값은 금리와 반대로 움직이기에 제로 금리 시절에 발행된 채권들은 현재 발행가보다 시세가 떨어진 경우가 많다.
임재균 KB증권 연구원은 “개인투자자들은 고금리의 단기물을 사거나 혹은 금리 하락으로 인한 자본 차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초장기물을 매수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연속적인 기준금리 인상으로 채권의 이율이 크게 높아져 기대 이자 수익이 커졌다는 게 핵심이다. 최근 회사채, 공사채, 은행채(신종자본증권)의 이율은 3~5%대에 달한다. 가장 이율이 낮은 국고채 및 단기채 금리도 2~3%까지 올랐다. 은행 예·적금과는 다르게 채권 투자는 가입 금액 제한도 없다.
서울 강남구에 거주하는 40대 전문직 장 모 씨는 “지난해부터 주식을 통해서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장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며 “채권 투자는 기본적으로 4% 이상의 이자 수익을 기대할 수 있고 주식 대비 가격 변동 폭이 적어 안정적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보험사,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들은 매년 채권 투자에 대한 평가를 받기 때문에 만기 이전에 채권을 매도하는 경우가 있다”면서도 “개인투자자들은 5~10년 만기까지 신종자본증권 등 채권을 보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장기적으로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4% 이상 이자에 시장 변동성 작아
채권을 통한 이자수익의 경우 15.4%의 이자·배당소득세율이 적용된다. 때문에 고액 자산가들을 중심으론 이자수익보단 매매차익을 노리고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채권 투자를 통한 매매차익은 이자수익과는 다르게 비과세를 적용받기 때문이다. 보통 고액 자산가들은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인 경우가 많은데 매매차익의 절세 혜택을 노려 실질 수익률을 높이는 데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절세 혜택을 기대해볼 수 있는 채권 상품은 저쿠폰(이자) 채권이다. 저쿠폰 채권이란 채권 발행 당시보다 현재 가격이 많이 하락한 상품을 뜻한다. 금리가 낮은 시절 발행됐는데 현재 금리 수준이 높아 가격이 떨어진 상태인 것이다. 저가에 매수한 뒤 만기까지만 기다려도 자연스레 차익을 볼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실제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1~8월 저쿠폰 채권 판매 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5배 이상 늘었다.
특히 저쿠폰 채권의 경우 달러를 활용한 미국 국채 및 국내 기업의 KP물(외화표시채권) 투자도 가능한데 비과세 혜택에 더해 환차익까지 노려볼 수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자산관리 한 우물만 파온 박경희 삼성증권 부사장은 “슈퍼 리치들의 돈이 채권으로 이동하고 있고 일선 지점을 통해 채권 투자를 문의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며 “기준금리가 대폭 인상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던 올해 초부터 고액 자산가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고 수백억원의 목돈을 들고 지점에 방문한 경우도 있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세부적으로 채권 상품 중엔 조건부자본증권, 코코본드로 불리는 신종자본증권에 대한 개인투자자들의 수요가 높은 상황이다. 우량한 회사채 대비 금리 수준이 높고 발행사가 부도 위험성이 현저히 낮은 금융사들로 안정적인 투자 수단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회사채는 한 기업에 투자한 것이지만 신종자본증권은 대기업, 중소기업, 개인대출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에 간접 투자하는 개념이라 리스크 관리에도 유용하다.
만약 발행사가 부실 금융기관으로 지정되면 원금 상각 및 이자 지급 중지 등 투자 리스크 요인은 있다. 하지만 국내 금융사들이 주로 사회적 평판 관리에 큰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부실 채권화의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선이다. 또 신종자본증권은 만기가 없는 영구채이거나 만기가 있더라도 매우 길다. 매년 안정적으로 5%가량의 이자수익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발행 5년 후엔 조기 상환(콜옵션)을 신청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점도 장점이다.
최성종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금융지주와 은행들이 발행한 신종자본증권의 금리는 매력적인 수준으로 판단된다”며 “신용등급이 대부분 ‘AA-’ 등급이며 동일 등급 회사채 대비 더 높은 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서 “국내 국채 금리의 9월 고점 형성 및 향후 하향 흐름 등을 고려하면 자본 차익에 대한 기대도 존재한다”며 “발행 기업의 펀더멘털이 우수하고 높은 금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국내 금융지주 및 은행 신종자본증권의 비중 확대를 권고한다”고 말했다.
치솟는 인기에 신종자본증권 발행 규모도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금융지주사 및 은행들의 신종자본증권 발행 규모는 약 6조4000억원으로 종전 최대치였던 2020년 연간 총 발행 규모 5조3000억원을 뛰어넘었다. 지난 8월에만 신한금융지주(4000억원), KB금융(5000억원), IBK기업은행(6000억원) 등이 자본 확충 목적으로 수천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월 지급식 채권상품 인기몰이
치솟는 채권 투자 인기에 증권가선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채권 상품 발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증권은 국내 증권사 중 최초로 월 이자를 지급하는 만기 3년 이하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여신전문금융회사채(여전채)를 선보였다. 해당 상품은 세전 연 3.7~4.4%의 월 이자수익을 기대해볼 수 있다. 5억원을 투자했다고 가정하면 매달 꼬박꼬박 세후 약 166만원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키움증권도 최근 세전 연 4.5% 금리로 매달 이자를 주는 메리츠캐피탈 채권을 판매했다. 한국투자증권, KB증권도 각각 월 이자 지급식 채권을 팔았다.
매년 일정한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는 채권 상품의 등장에 정년퇴직을 한 장년, 노년층들의 채권 투자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이번에 삼성증권이 판매한 월 이자 지급식 채권의 투자자 연령대 비율을 살펴보면 50대(28%), 60대(28%), 70대(27%), 40대(8%), 30대(5%), 20대(4%) 순으로 투자 비중이 높았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최근 금리 인상에 따른, 상대적으로 높은 세후 이자를 매월 지급받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며 “은퇴 후 유동성 확보가 필요한 고객들 사이에서 특히 주목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최근 채권 투자 열풍의 원인으로 과거 대비 온라인, 모바일 채널을 통해 간편히 투자할 수 있다는 점도 손꼽힌다. 국내 채권을 거래한 고객 10명 중 8명이 모바일, PC 채널 등 디지털을 활용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20~30대 채권 매수 비중도 40%로 높은 편이다.
직접 투자가 부담스럽다면 채권형 상장지수펀드(ETF) 매수를 통한 간접 투자도 한 방법이다. 최근 채권 투자 수요가 높아지자 자산운용사들도 채권형 ETF 상장 비중을 늘리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8월 상장한 15종의 ETF 중 10종이 국내 장·단기채, 회사채, ESG(환경·책임·투명경영) 등 채권형 ETF였다. 지난 8월 기준 채권형 ETF 순자산 규모는 지난해 말 대비 2배가량 늘었다. 김후정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높아진 금리 수준, 저평가된 채권 가격으로 채권 ETF가 전 세계 시장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포트폴리오 관리 전략으로 채권을 활용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주식, 기업공개(IPO) 투자 등 위험자산 비중을 일부 유지하면서 채권 투자로 리스크를 헤지(위험회피)하는 ‘바벨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다. 바벨 전략은 중간은 제외하고 극단적 안전자산, 위험자산을 한 바구니에 담는 전략이다. 향후 시장의 흐름을 예측하기 어려울 때 양극단에 위치한 자산이 위험성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