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 실수요자와 부동산 투자자들의 관심이 빌라(다세대·연립)로 옮겨 붙고 있다. 올해 서울 빌라 거래량은 아파트 거래량을 추월했고, 지난 7월 서울 빌라의 3.3㎡당 중위매매가격은 2038만원을 돌파하며 몸값이 달아오르고 있다. 서울 아파트 값 상승세가 좀처럼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데다 임대차 3법이 촉발한 전세난은 주택 수요자들의 발길을 빌라로 이끌고 있다. 정부가 대출을 틀어쥐고 투기성 부동산 투자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아파트 대비 상대적으로 몸값이 싼 빌라에 투자 수요까지 겹치는 상황이다.
특히 서울 내 신규 주택 공급을 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점도 빌라의 투자가치를 올리는 요인이 된다. 정부와 서울시의 주택 공급 대책도 저층주거지에 대거 포진해 있는 빌라 단지를 고밀개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난 2월 국토교통부는 도심 내 저층주거지와 역세권, 준공업지역을 고밀개발해 19만6000가구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지난 4월 서울시도 오세훈 시장이 취임 직후 재개발 규제 완화를 추진하면서 개발 호재가 있는 지역 빌라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다만 부동산 활황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빌라 투자를 고민하는 부동산 투자자들에게 변수다. 집값 하락기에는 아파트 대비 빌라 수요가 상대적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향후 환금성이 떨어져 자금이 부동산에 묶일 수 있다는 얘기다. 아울러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주도 재개발 사업에는 ‘현금 청산’이라는 함정도 도사리고 있다. 투자 목적으로 접근했다가 공공주도 개발이 이뤄지면 향후 신축 아파트 입주권을 받지 못하고 시세보다 못한 가격에 팔아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서울 강남구 빌라 밀집지역.
▶빌라 거래가격 평당 2000만원 시대 열었다
빌라 시장이 들썩이는 것은 올해 연초부터 시작됐다. 올해 들어 9개월째 빌라 거래량은 아파트 거래량을 추월했다. 예년에는 각월 아파트 거래량이 빌라 거래량보다 2~3배가량 많은 편이었다. 일반적으로 주택 수요자들의 선호도가 빌라보다는 아파트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현상이다. 아파트 매매가격은 물론 전셋값마저 급등하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빌라에 내 집 마련 수요가 몰린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 9월 한 달간 서울 빌라 매매 건수는 3593건(10월 15일 기준)을 기록했다. 아직 통계 집계기간이 남아 있지만 같은 기간 아파트 거래량(2271건)보다 1300건 이상 많다. 지난 8월에도 빌라 4464건, 아파트 4169건으로 빌라 매매 건수가 300건 가까이 많았다. 올해 빌라 매매 거래량은 아파트 거래량 대비 1만 건가량 많다. 올해 1월부터 10월 15일까지 거래 신고된 빌라는 총 4만6177건으로 아파트 거래량 3만7342건을 웃돌았다. 지난해에는 아파트 거래량(8만1187건)이 빌라 거래량(5만8904건)보다 2만 건 이상 많았고, 2019년에도 아파트 거래량(7만5079건)이 빌라 거래량(4만2665건) 대비 3만 건 이상 많았다.
매수심리 역시 시장에서의 빌라 인기를 보여준다. 한국부동산원은 빌라 매매수급지수를 발표하는데, 지난 9월 113.1을 기록하며 관련 통계가 시작된 2012년 이후 최고치를 썼다. 매매수급지수가 기준선인 100을 넘으면 시장에 매도자보다 매수자가 더 많다는 의미로, 숫자가 커질수록 매수심리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시장에서는 빌라 몸값도 뛰고 있다. 부동산 플랫폼 다방이 한국부동산원의 통계를 분석한 결과 서울 빌라 중위매매가격은 지난 7월 3.3㎡당 2038만원을 기록했다. 이는 부동산원이 관련 조사를 시작한 2006년 1월 이후 최고치다. 서울 빌라 중위 매매가는 지난 3월과 4월만 하더라도 3.3㎡당 1800만원대로, 2019년 말과 비슷했다.
하지만 5월 들어 3.3㎡당 1960만원으로 치솟은 후 두 달 만에 3.3㎡당 2000만원을 넘어섰다. 2017년 2월 서울 아파트 중위매매가가 3.3㎡당 2007만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4년 전 아파트 수준만큼 빌라 가격이 오른 것이다.
청약가점이 낮은 2030세대 중에서는 정부가 공급하는 3기 신도시 청약을 기다리기보다는 서울 초기 재개발 구역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고 있다. 낡은 집에 살더라도 재개발 후 신축 아파트 입주를 위해 ‘몸테크’를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실제 서울 서초구 양재2동 등 개발 호재가 있고, 직주근접성이 좋은 재개발 유력 후보지에서는 물건이 동나기 일쑤다. 양재2동은 기존 2종일반주거지역을 3종으로 올리는 종상향에 대한 주민동의서를 걷을 정도로 지역 개발에 대한 주민 열의가 크다. 양재2동은 최근 한두 달 새 수천만원씩 호가가 뛰고 있다.
양재2동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매매하자고 하면 집주인들이 잠시 기다려보라 했다가 안 판다고 하는가 하면, 2억~3억원에 올려둔 매물을 갑자기 수천만원씩 올리는 경우도 있다”며 “제2양재대로, 경부고속도로지하화 등 개발 이슈는 많지만 당장 호재를 기대하기보다는 10~20년 정도는 기다려보겠다는 투자자들이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경매 시장까지 번진 빌라 투자 열기
빌라 투자 열풍은 경매 시장까지 집어 삼키고 있다. 올해 9월 서울 빌라 낙찰가율은 97.9%로 전월(84.2%) 대비 13.7% 올랐다. 역대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인천(83. 9%), 경기(82.7%) 역시 빌라 낙찰가율이 전월 대비 각각 5.5%포인트, 5.3%포인트 상승했다. 수도권 전체 빌라 낙찰가율은 89.7%로 전월(79.7%) 대비 10.0%포인트 상승해 역대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개별 물건을 기준으로는 수십 명의 응찰자가 몰린 사례도 속출했다. 인천 남동구 구월동의 A빌라에는 31명의 응찰자가 몰렸다. 이 물건의 감정가는 8400만원이었지만 1억1199만원을 써낸 응찰자에게 취득 기회가 돌아갔다. 서울 도봉구 도봉동 B빌라 역시 27명의 응찰자가 낙찰받기 위해 도전했다. 감정가(1억900만원)보다 높은 가격(1억1686만원)에 낙찰이 이뤄졌다.
빌라 경매는 건당 평균 응찰자 수도 크게 늘었다. 지난 9월 빌라 경매에 응찰한 사람은 평균 3.8명이다. 지난해 월평균 평균 응찰자 수가 2.9명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최근 들어 빌라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주현 지지옥션 선임연구원은 “수도권 아파트 전세가와 매매가가 급등하면서 ‘내 집 마련’ 수요자들이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빌라에도 눈을 돌린 것으로 평가된다”며 “특히 서울은 재개발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노후 빌라에 주택 수요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 지역 개발이 가시화된 지역에서는 몸값이 크게 뛰고 있다. 지난 9월 24명의 응찰자가 몰린 서울 도봉구 창동 종암빌라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용면적 38㎡인 이 물건의 감정가는 1억1000만원이었는데 응찰자가 대거 몰리면서 1억5757만원(낙찰가율 143%)에 새 주인을 찾았다. 이 빌라는 ‘창동도시개발구역’ 호재가 기대된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2층 빌라(전용 42㎡)도 감정가(1억1800만원)보다 3378만원 높은 1억5178만원(낙찰가율 129%)에 낙찰됐다. 공릉주택재건축정비구역 호재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됐다는 평가다.
빌라 경매에는 단기간 너무 많이 오른 아파트 값을 감당하기 어려운 주택 수요자들과 투자 수요가 겹쳐 일어나는 현상이다. 경매 시장에서는 감정가 2억원 미만의 빌라가 매물로 다수 나오는데, 아파트값에 비해서는 대출이 용이하다. 다만 전문가들은 주택 시장이 하락기에 접어들 경우 빌라가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여유 자금 이상의 돈을 활용하는 것에는 주의해야 한다는 조언을 주고 있다.
강은현 EH경매연구소장은 “이명박 정부 때 뉴타운 효과를 기대하고 빌라를 샀던 사람 중에는 나중에 하락폭이 커지면서 후회한 사람이 많았다”며 “기본 수요가 탄탄해 집값 하락 시기에도 버틸 여력이 있는 아파트와 빌라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재개발 가시화된 곳 크게 뛰어
아파트 값 상승을 버티다 못한 실수요자들의 주택 수요가 빌라로 옮겨 붙고 있지만 ‘현금 청산’ 공포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정부는 2·4대책의 일환으로 저층주거지와 역세권, 준공업지를 개발하는 도심공공주택 복합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각 사업지에서 지난 6월 29일 이후 등기가 이뤄진 주택은 신축 아파트 입주권을 받지 못하고 현금 청산 대상이 된다.
정부는 3년 한시로 사업을 추진한다지만 현재로서는 어디가 사업지가 될지도 알 수 없다. 노후 주거지의 빌라를 매수했다가 덜컥 정부 사업지로 결정되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공 사업자에게 감정평가 금액 정도를 받고 집을 넘겨야 하는 상황이다. 집값 상승과 전세난에 쫓겨 빌라를 매수하는 주택 실수요자들이 늘고 있지만 현금 청산 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주거 불안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부동산 경매가 열리고 있는 서울중앙지방법원 입찰법정 앞이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지난 7월 서울 소재 구축 빌라를 계약한 A씨도 잔금일을 두고 머리가 복잡하다. 빌라로 생애 첫 집을 구매했는데, 지난달 정부가 A씨의 빌라가 있는 지역을 도심복합사업 후보지로 선정, 발표하면서 현금 청산 위기에 내몰려 있다. A씨는 “현금 청산만 피할 수 있게 매물을 소개해달라고 했는데, 부동산에선 재개발 조합도 없고, 구역 지정이 됐다 해제된 곳도 아니라 안심하라더니 생애 첫 주택이 청산 위기에 놓였다”며 “잔금을 치르고 계약을 마무리하자니 향후 시세보다 못한 감정평가액 정도에 집을 처분해야 할 상황이고, 계약을 파기하면 계약금을 전부 날리게 된다”고 토로했다.
지난 7월 빌라를 매매한 유모 씨 역시 이웃 주민들이 동의서를 모아 공공주도 개발에 대한 민간 공모를 신청했다는 소식에 전전긍긍이다. 실거주 목적으로 수천만원의 인테리어비를 들였는데 사업이 진행되면 그대로 현금 청산 대상자가 된다. 인테리어비 등 매몰비용은 현금 청산 보상액에 산정되지 않는다. 개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크게 내자니 이웃주민들에게 손가락질 받을까 두렵고, 사업이 진행되길 바라자니 손해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도심복합사업으로 진행되는 재개발 현장에서 ‘현금 청산’ 피해 호소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예측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2·4대책을 발표하면서 역세권 189곳, 준공업지 33곳, 저층주거지 61곳 등 전국 283개 지역을 우선 사업 추진 검토구역으로 선정해 관리한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지역은 공개하지 않았다. 어디가 사업지가 될지 시장에서 예측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다. 시장 참여자들이 ‘복불복’ 상황에 놓이는 셈이다. 하지만 정부 정책과 관련법은 ‘6월 29일 이후 매수자=투기세력’이라는 공식에 틀이 맞춰져 있다.
일각에서는 일률적인 ‘현금 청산’ 규정을 완화해 투기세력과는 무관한 1주택자(매수 전 무주택자)들을 구제해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국토부 도심주택총괄과 관계자는 “현금 청산에 대한 규정 완화는 별도 입법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토부의 의지대로만 할 수는 없다”며 “현재로서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개발 방식인 공공재개발은 현금 청산일이 다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이 조합을 대신하는 도심복합사업과는 달리 공공재개발은 민간 정비조합과 공기업이 공동으로 사업 시행에 참여한다. 도심복합사업은 2021년 6월 29일(등기 기준)이 현금 청산 기준일이 되지만 공공재개발은 지난해 9월 21일이 권리산정 기준일이다. 권리산정 기준일 이후로 지어진 신축 빌라는 현금 청산을 당할 수 있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공공재개발은 도심복합사업 대비 현금 청산 이슈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라며 “매매 시에 입주권이 정확하게 나오는 물건인지 확인하면 현금 청산 이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