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돈은 늘 먼저 움직인다. 위험을 피해 더 조용하고, 더 비싸고, 더 덜 흔들리는 자산으로 향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프라이빗 크레딧, 그러니까 은행 대신 사모펀드와 대체 운용사가 기업에 직접 돈을 빌려주는 시장이 그런 피난처로 불렸다. 특히 소프트웨어와 SaaS 기업을 향한 대출은 저금리와 성장 서사를 발판 삼아 폭발적으로 불어났다.
국제결제은행(BIS)은 보고서를 통해 “사모대출 시장이 2015년 80억 달러 수준에서 2025년 말 5000억 달러를 넘기는 규모로 커졌다”고 밝혔다. 월가는 이를 은행의 빈자리를 메운 새로운 금융 질서라고 포장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균열은 가장 조용해야 할 그 장부에서 시작됐다. AI가 소프트웨어 기업의 성장 공식을 흔들자, 상장 기술주보다 먼저 사모대출의 가치평가 논리가 의심받기 시작한 것이다. 비상장 자산은 쉽게 가격이 드러나지 않지만, 상장된 기업개발회사(BDC·Business Development Company)와 대체운용사 주가는 이미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그동안 ‘변동성이 낮다’는 말로 설명되던 안정성은 이제 ‘손실 인식이 느린 것 아니냐’는 질문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다만, 시장은 아직 리먼브라더스의 재연을 말할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그럼에도 경계심이 커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모대출은 은행 바깥의 시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은행의 신용공여와 연기금·보험사의 자금, 그리고 고액자산가의 유동성 기대와 촘촘히 연결돼 있다. 그래서 이번 문제는 특정 자산군의 부실 여부를 넘어선다. 저금리 시대가 만들어낸 ‘부자들의 피난처’가 정말 피난처였는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장부가 만들어낸 착시였는지를 다시 묻는 일이다.
최근 몇 년간 투자자들은 소프트웨어 기업을 거의 ‘현금 자판기’처럼 여겨 왔다. 매출은 구독 형태로 반복 발생하고, 고객 이탈률은 낮고, 규모의 경제는 빠르게 작동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은 상장주식 시장의 멀티플을 높였을 뿐 아니라, 그 기업들에 돈을 빌려주는 사모대출의 담보 논리도 함께 밀어 올렸다. 성장성이 꺾이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에서는 높은 밸류에이션도, 높은 대출 규모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AI가 판을 바꿨다. 생성형 AI와 에이전트 기술이 빠르게 상용화되면서 소프트웨어 기업의 해자, 즉 진입장벽과 가격결정력이 생각보다 약할 수 있다는 의문이 커졌다. 기존 SaaS 서비스의 일부는 AI 네이티브 기업에게 잠식될 수 있고, 고객이 지불하던 반복 구독료 구조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우려가 퍼졌다.
BIS는 이런 우려가 곧바로 시장가격에 반영됐다고 봤다. 2025년 10월 부터 2026년 2월까지 소프트웨어 주식은 거의 30% 하락했고, BDC 주가는 평균 10% 떨어졌다. 특히 소프트웨어 노출도가 큰 BDC는 낮은 곳보다 약 5%포인트 더 부진했다. 상장시장은 비상장 대출 장부의 취약성을 먼저 할인하기 시작한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손실이 “얼마나 났느냐”보다 “얼마나 빨리 드러나느냐”다. 상장주식은 매일 가격이 바뀌고, 투자자의 공포도 곧장 반영된다. 반면 프라이빗 크레딧은 거래가 뜸하고 비교 가능한 시장 가격이 부족하다. 평가모델, 내부 가정, 유사 거래 비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에는 이것이 낮은 변동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장점이 아니라 ‘함정’이 된다. 가격이 덜 움직이는 것이 안전의 증거가 아니라, 현실이 장부에 늦게 반영되는 결과일 수 있어서다. 이 때문에 시장의 초점도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프라이빗 크레딧 수익률이 하이일드보다 높은가’가 핵심 질문이었다면, 이제는 “그 수익률이 실제 신용위험과 유동성위험을 얼마나 정직하게 반영하느냐”가 더 중요한 물음이 된 것이다. 장부가 조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변동성이 낮다고 말하기 어려운 국면이다.
이쯤 되면 시장이 2008년 금융위기를 소환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공개시장에서 잘 보이지 않던 위험이 그림자금융 영역에 쌓여 있다가 뒤늦게 금융기관과 투자자에게 연쇄적으로 번지는 장면은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사모대출 역시 불투명하고, 펀드 구조가 복잡하며, 차주와 대주, 투자자, 은행, 보험사의 연결고리가 외부에서 한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만 보면 서브프라임의 재연처럼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공식기관들이 지적한 취약성의 목록은 꽤 무겁다. FSOC는 사모대출이 상대적으로 불투명하고, 차주가 더 작고 더 높은 레버리지를 지는 경우가 많으며, 가치평가와 비수익여신 분류가 관측 불가능한 입력값에 크게 의존한다고 봤다. 운용사는 높은 평가를 유지하고 손실 인식을 늦출 유인이 있을 수 있고, 시장 스트레스가 길어지면 미뤄둔 손실이 한꺼번에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IMF 역시 2024년부터 사모대출 시장을 제한된 감독 아래 빠르게 커지는 불투명하고 상호연결적인 영역으로 규정해 왔다.
단 전문가들은 직접적인 비교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08년 위기의 핵심은 단기자금과 예금성 자금에 의존하던 시스템이 신뢰 상실과 함께 급격한 런에 빠졌다는 데 있었다. 프라이빗 크레딧은 대체로 폐쇄형 펀드이거나 장기 록업 구조를 갖는다. 보스턴 연은이 지적하듯 사모대출 펀드는 은행보다 레버리지가 낮고, 자금이 다년간 묶이는 구조라 예금 인출과 같은 속도의 런위험은 제한적이다.
연준도 비슷한 이유로 당장의 즉시적 리스크는 크지 않다고 봤다.
즉, 지금의 위기는 “갑자기 무너지는 은행위기”보다 “늦게 드러나는 평가 조정”과 “비유동 자산을 둘러싼 신뢰 훼손”에 가깝다. 그것은 때로 더 느리고, 그래서 더 오래간다. 급락장에서는 뉴스가 한 번에 터지지만, 사모시장 스트레스는 분기보고서와 환매제한, 담보 재평가, 대출 약정 축소 같은 방식으로 천천히 표면으로 올라온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 느린 속도 때문에 오히려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 언제 위험이 끝났는지, 혹은 이제 막 시작됐는지 파악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사모대출이 정말 위험한지 판단하려면, 그 시장만 따로 떼어볼 것이 아니라 은행과의 연결을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프라이빗 크레딧은 이름만 들으면 은행과 무관한 별도 시장처럼 들리지만, 실제 자금 조달 구조를 들여다보면 은행이 곳곳에서 받쳐주고 있다.
연준은 2024년 4분기 기준 대형은행들의 프라이빗 크레딧 운용기구 대상 약정이 약 950억 달러라고 집계했다. 2013년 1분기 약 80억 달러 수준에서 급증한 수치다. 대출의 형태도 대부분 회전형 신용한도다. 즉, 평소에는 모두 쓰이지 않지만 스트레스가 오면 한꺼번에 인출될 수 있는 성격의 유동성 공급이다. 보스턴 연은은 이 점을 더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은행은 위험한 중견기업 대출을 직접 장부에 담는 대신, 그 대출을 해주는 펀드에 돈을 빌려줌으로써 간접적으로 같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외형상 위험이 은행 밖으로 이동한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우회 경로를 통해 은행 시스템으로 되돌아오는 구조다.
공식 보고서들이 리스크 구조를 짚었다면, 시장가격은 심리를 보여준다. 최근 월가에서 나타난 변화는 이 자산군을 둘러싼 신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주요 외신들은 미국 주요 은행들이 실적 발표 과정에서 프라이빗 크레딧 익스포저를 별도로 설명하거나 스트레스 테스트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제이피모건, 씨티(Citi), 웰스파고(Wells Fargo) 모두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강조했지만, 그 자체가 점검의 강도가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차주 쪽에서도 이상 신호는 보인다. 신용평가사 피치 자료에 따르면 미국 프라이빗 크레딧 차주의 디폴트율은 2025년 9.2%로 올라섰다. 이는 단순히 몇몇 부실 차주의 사례가 아니라, 고금리와 성장 둔화, AI에 따른 산업 재편이 동시에 차입기업의 현금흐름을 압박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최근 펀드런에 시달린 블루아울 사례는 이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술 특화 펀드에서 40.7%, 대형 펀드에서 21.9%의 환매 요청이 쏟아졌고, 회사는 분기당 통상적 한도인 5% 수준으로 지급을 제한했다. 여기서 더 눈여겨볼 것은 환매 요청의 규모보다 환매 이유다.
로이터는 AI 관련 우려와 소프트웨어 섹터에 대한 불신이 기술 특화 펀드 이탈을 키웠다고 전했다. 위험은 아직 장부에서 대규모 손실로 확정되지 않았지만, 투자자 기대가 바뀌는 순간 유동성의 규칙부터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사모대출은 그동안 “공모시장보다 덜 흔들리는 자산”으로 마케팅돼왔다. 그러나 최근에 나타난 변화는, 시장이 그 설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변동성이 낮은 것이 실제 위험이 낮아서인지, 아니면 평가 빈도와 거래 빈도가 낮아서 그렇게 보이는지에 대한 재검증이 시작된 것이다. 한동안 “프리미엄을 받는 안정성”으로 여겨졌던 요소들이 이제는 “할인을 받아야 할 불투명성”으로 다시 읽히고 있다.
국민연금은 2026년 1월 말 기준 총자산 1540조4000억원 가운데 233조5000억원을 대체투자에 배분하고 있다. 포트폴리오 비중으로는 15.2%다. KIC 역시 2025년 말 2320억 달러의 운용자산 가운데 21.9%를 대체자산에 두고 있으며, 사모대출(Private debt)을 포함한다고 공개한 바 있다. 더 나아가 KIC는 2024년 1월부터 사모대출을 별도 자산군으로 관리한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의 공적자금이 글로벌 대체 자산 생태계와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공식 자료만으로도 충분히 확인된다.
이러한 투자금의 직접 손실 가능성은 어떤 문제로 번질 수 있을까?
국내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해외 대체자산의 가치가 흔들리면 기관은 상대적으로 유동성이 높은 상장주식, 채권, 환헤지 포지션부터 조정할 수 있다”라며 “글로벌 대체시장 스트레스가 국내 증시나 외환시장, 채권 수급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국민연금의 해외자산 비중 확대는 최근 원화 수급과 환헤지 정책 논의에서도 중요한 변수로 다뤄지고 있다.
프라이빗 크레딧 불안이 한국과 글로벌 증시에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를 생각하면, ‘전면 붕괴’보다 ‘선별적 재평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첫 번째 충격 지점은 상장 대체운용사와 BDC다. 이들은 사모시장 내부 정보를 가장 빠르게 가격에 반영하는 창구다. BIS가 보여준 것처럼 소프트웨어 익스포저가 클수록 먼저, 더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BDC 할인율이 벌어지고 운용사 주가가 동반 하락한다면, 그 자체가 장부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시장의 투표로 읽힐 수 있다.
두 번째는 은행주다. 지금까지는 대형 은행들이 관련 익스포저를 통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고, 연준도 즉각적 금융안정 리스크는 제한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경기 둔화와 기업 디폴트율 상승이 맞물리면 은행의 프라이빗 크레딧 관련 신용공여는 더 꼼꼼한 자본시장 평가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담보가치 조정, 약정 인출 확대, 특정 섹터 편중 문제가 겹치면 투자자는 그 위험을 은행 밸류에이션에 반영하기 시작한다. 즉 시스템 위기가 아니더라도, 주가 재평가와 조달 비용 상승은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
세 번째는 가장 우회적이지만 오히려 파급력이 클 수 있는 경로다. IMF는 사모대출 스트레스가 커질 때 보험사와 연기금 등 장기투자자가 비유동자산을 바로 팔지 못하는 대신, 더 유동적인 공모자산을 먼저 매각할 수 있다고 봐왔다. 쉽게 말해 문제가 터진 곳은 사모시장인데, 가격이 먼저 움직이는 곳은 공모주식과 채권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투자자는 사모대출 기사만 읽고 “비상장 이야기니까 증시와 별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장부의 스트레스가 보이는 시장의 조정으로 먼저 나타난다. 결국 지금의 사모대출 논쟁은 단순한 자산군 점검이 아니다. 저금리 시대가 낳은 ‘안정적 고수익’이라는 서사가 얼마나 견고했는지를 다시 시험하는 과정에 가깝다. 은행이 빠진 자리를 메운다는 설명, 공모시장보다 덜 흔들린다는 장점, 기관과 부유층이 선호한다는 이미지가 모두 맞았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위험이 낮다는 뜻은 아니었다. 때로는 위험이 더 천천히, 더 안 보이게 쌓였다는 뜻일 수도 있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