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수합병(M&A)에서 배당까지 최근 국내 금융사들의 모든 경영 활동에 ‘관치금융’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을 금융 위기 상황으로 인식한 금융 당국이 금융사들에 대한 규제 수위를 높이고 있는 반면 금융사들은 코로나19를 기회로 삼아 적극적인 주주환원이나 기업 규모 확대를 꾀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논란이 일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금융사들은 규제가 몰린 국내보다 성장 기회가 많은 해외로 집중하고 있는 양상이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동남아 시장 중심으로 부실 리스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리스크라는 지적이다.
▶“사사건건 간섭” vs “위험 관리 역할 해야”
금융지주를 중심으로 국내 금융권은 올 들어 당국의 지나친 규제에 대해 “당국이 코로나를 핑계로 제대로 관치금융에 나섰다”며 불만을 내비친다.
특히 금융권 관계자는 우리금융의 내부등급법 승인은 금융사와 당국이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 한 단면이라고 전했다.
최근 금융권 관계자는 “당국이 우리금융이 향후 다른 금융사 M&A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올 3분기에 온전한 내부등급법 승인을 내준다는 조건부 승인을 검토 중”이라며 “금융 여력이 높아지는 내부등급법은 사실 M&A를 위한 것인데 이런 조건이 달린다면 무용지물”이라고 밝혔다.
내부등급법은 금융지주사에 대한 위험자산 평가 방식 중 하나다. 내부등급법을 쓰면 위험가중자산이 줄어들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2%포인트 정도 높아지는 효과가 있다. BIS 비율이 높아지면 금융회사가 대출을 늘리고 규모가 큰 M&A도 추진할 여력이 생긴다.
우리금융 입장에선 내부등급법 추가 승인이 이루어지면, 자본비율을 끌어올려 영업 활동에 더욱 매진하겠다는 입장이다.
당국은 우리금융이 코로나19로 인해 고통 받는 금융 서민들을 위해 자금 여력을 쌓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같은 논리는 작년 6월 이른바 ‘반쪽 내부등급법 승인’ 논란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작년 금융감독원은 우리금융에 대해 대출 등 위험자산 평가기준을 변경하는 내부등급법을 승인해줬는데, 그 대상에 대기업 대출을 대거 제외해 파장이 컸다.
당시 금감원은 우리금융 내부등급법 승인 범위에서 외부감사대상(외감법) 기업은 제외했다. 외감법 대상 기업 기준은 직전 사업연도 재무제표 기준으로 ▲자산 120억원 이상 ▲부채 70억원 이상 ▲매출 100억원 이상 ▲종업원 수 100명 이상 등 4개 요건 중 2개 이상에 해당되는 기업을 뜻한다. 사실상 규모 있는 대기업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되며 이들 기업은 기존대로 당분간 표준등급법을 적용받는다는 뜻이다. 대신 금감원은 가계와 개인사업자 부문에 대해서만 내부등급법 적용을 승인했다.
우리금융은 올 상반기에 역대 최대 실적을 거뒀지만 한때 큰 격차를 보였던 NH농협금융과 비슷한 실적을 올렸다. 이는 5대 금융지주 중 유일하게 증권사가 없다는 우리금융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우리금융은 올 상반기에 1조4197억원의 순이익을 올리며 상반기 기준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그러나 1조2819억원의 순이익을 올린 NH농협금융과의 차이는 1378억원에 불과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농협금융이 농협중앙회에 보내는 농업지원사업비를 제외하고 보면 농협금융의 상반기 순익이 우리금융보다 많다”며 “증시 호조를 타고 높은 순익을 기록 중인 증권사의 유무가 두 금융지주의 실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지주의 핵심인 은행 부문에선 우리금융이 농협을 앞질렀다. 우리은행의 상반기 순익은 1조2793억원으로, 농협은행(8563억원)보다 4230억원 많다. 반면, 비은행 부문에서는 농협금융이 우리금융(2804억원)보다 약 3배 많은 7659억원을 기록했다.
NH투자증권이 상반기에 5279억원의 순익 ‘잭팟’을 터뜨린 것을 감안하면 이 증권사가 농협금융의 비은행 부문의 70%가량을 책임진 것이다.
당국 입장에선 신용대출 등을 통한 ‘빚투(빚을 내 투자)’로 금융지주들이 돈 버는 것에 불편한 입장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우리금융이 증권사를 인수해 금융 부실 위기를 부추기는 것에 대해 적어도 우호적인 환경은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다. 초저금리 상황에서 우리금융은 은행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올 상반기에 우리카드는 1214억원의 순이익을 거두며 전년 동기 797억원 대비 52.3% 성장했다. 우리종합금융 역시 순익에서 1년 새 40%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우리금융은 우리카드·우리종합금융 등 자회사를 키워 비은행 부문을 강화하고 있는데 여기에 증권사만 있다면 ‘화룡점정’을 찍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실제 우리금융은 계속해서 증권사 인수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성욱 우리금융그룹 재무부문 전무는 지난 2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그룹과 가장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증권 부문의 인수를 우선적으로 추진하고, 기타 부문 M&A는 자본비율에 영향이 적은 부분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금융은 개인 소매 등 일부분에만 내부등급법을 시행 중이며, 향후 내부등급법 최종 승인 시 그룹의 자본비율은 1% 이상 추가 개선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국은 조건부 내부등급법 승인을 내주겠다는 의지여서 ‘위기 때 성장하겠다’는 기존 전략을 수정해야 할 판이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우리금융은 작년 내부등급법 일부 승인에도 다른 금융지주 대비 자본비율 등 재무지표가 낮은 편인 데다 작년 이후 증권사의 몸값은 더 높아졌기 때문에 정상적인 M&A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금융사들이 성장기회가 많은 해외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사진은 고승범 금융위원장.
▶금융지주 “배당도 마음대로 못 하나”
또 다른 갈등 양상은 배당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당국은 금융지주들이 주주들에게 배당으로 자금을 풀기보다는 코로나19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유보할 것을 기대하고 있어 ‘동상이몽’이다.
우리금융처럼 다른 금융지주들도 올 상반기에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지만 금융당국이 계속해서 불편한 신호를 보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금융지주들은 ‘순익 증가→배당 여력 증가→배당 확대’의 순서를 따랐지만 코로나19 변수가 지난해까지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올해는 금융지주들이 재무 건전성 지표에서 우량한 데다 금융지주 주가가 쌀 때 대거 주주로 들어온 외국인 주주들의 눈치 때문에 배당을 더 이상 억제하기 어려워졌다.
실제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는 4대 금융지주는 지난해 대손충당금을 대폭 늘려 쌓고 일제히 자본 건전성을 확충했다. 대손충당금은 향후 부실을 대비해 미리 비용으로 처리하는 회계 항목이다. 이에 따라 배당 여력을 가늠할 수 있는 건전성 지표인 보통주자본비율은 지난해 말보다 지주별로 0.2~2.1%포인트 올랐다.
부실 여신 대비 정도를 보여주는 고정이하여신(NPL) 커버리지 비율도 모두 역대 최고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는 모두 당국의 지침을 충실히 따른 결과물이라 당국의 배당 자제령에 대한 논리가 약해졌다. 결국 코로나19로 한시적으로 적용됐던 ‘배당성향 20% 룰’은 해제됐다. 이 룰은 순이익 중 최대 20%까지만 배당하라는 당국의 지침이었다.
다만 신한금융이 1년에 4번까지 배당하겠다는 ‘분기배당’ 카드로 주주환원을 강화하겠다고 나서면서 당국과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나타나기도 했다.
금융당국은 “코로나 재확산세가 여전하기 때문에 배당 정책에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권고한 반면 신한 측은 “더 이상 배당을 자제했다간 외국인 주주가 다 떠난다”며 배당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신한금융은 지난 8월 13일 이사회를 열고, 주당 300원의 분기 현금배당을 결정했다. 배당금 총액은 1602억원에 달한다. 2001년 이 금융지주가 출범한 이후 기말 배당 외 중간배당 또는 분기배당에 나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각종 규제 속에서도 금융지주들이 역대 최대 실적을 실현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간배당(하나금융)이나 분기배당(신한금융)에 나서면서 주주환원에서 앞선 모습을 나타냈다”며 “국내 금융사의 투자 매력이 상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금융 포퓰리즘
금융사들이 역대 최고급 실적을 냈지만 샴페인을 터뜨리기 어려운 이유는 대선을 앞두고 쏟아질 포퓰리즘 금융정책과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관치금융 탓이다.
5대 금융지주의 올 상반기 순이익은 9조372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5.7% 급증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금융사들은 늘어난 실적을 바탕으로 배당을 늘리거나 M&A 등 성장 방법을 찾기 마련이지만 되레 은행들은 얼마나 많은 돈을 포퓰리즘 정책에 써야할지를 놓고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난상황 때 은행 대출금을 감면해주는 ‘은행빚 탕감법’이라는 초유의 은행법 개정안도 국회에서 떠돌고 있다.
이 개정안은 지난 2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형배(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것이다. 코로나19 등 재난 상황에서 영업 제한 또는 영업장 폐쇄 명령을 받거나 소득이 현저히 감소한 사업자가 은행에 대출 원금 감면 등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레거시(전통) 은행들은 정치권이 코로나19 재확산을 근거로 해서 서민금융 지원 압박 수위를 높이는 것에 대해서도 걱정하고 있다. 최근 국회에선 코로나19 장기화로 자영업자에 저금리 무담보 신용대출을 조건 없이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시중은행이 아니라 국가 재정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못 박았다.
인도네시아 부코핀은행
▶해외로 나가는 국내 금융사들
국내 금융사들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관치금융을 피해 해외로 나가겠다는 의지다.
마침 코로나19로 동남아 지역 금융사들이 대거 부실해지자 ‘K금융’의 힘을 빌겠다는 현지 당국의 수요까지 맞아 떨어지며 금융지주들의 해외법인 순익도 급증하고 있다. 실제 최근 KB·신한·하나·우리금융 등 4대 금융지주의 해외법인을 조사해보니 이들의 올 상반기 순이익이 7221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작년 상반기(5415억원)보다 33.4% 증가한 수치다. 여기엔 국내 금융사들의 적극적인 투자가 바탕이 됐다.
KB국민은행은 지난 8월 12일 이사회를 통해 인도네시아 부코핀은행에 대한 4000억원 증자 참여를 결의했다. 국민은행은 지난 2018년 7월에 부코핀은행의 지분 22%를 취득해 2대 주주가 된 바 있다. 작년 9월에는 지분 67% 확보로 최대 주주가 됐고, 이번에 부코핀은행에 대해 화끈한 지원(4000억원)을 통해 본격적인 수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KB부코핀은행으로 불리는 이 은행은 인도네시아 115개 상업은행 중 자산 규모 순위 19위의 이름 있는 금융사다. 인도네시아 전역에 510개 네트워크와 832개의 ATM(현금출납기) 등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어 미래 잠재 역량이 풍부하다는 평가다.
현재 동남아 등 해외 순익이 가장 많은 곳은 하나금융이다. 지난 6월 하나금융은 인도네시아, 중국, 싱가포르 3개국에서 일제히 사업을 확장했다. 최근 홍콩의 금융 지위가 흔들리면서 싱가포르의 위상이 올라가고 있다는 판단에서 싱가포르통화청으로부터 자산운용사 설립 예비인가를 획득하며 대대적인 사업을 준비 중이다.
또 하나금융은 글로벌 모바일 플랫폼인 ‘라인’과 인도네시아에서 디지털뱅킹 서비스인 ‘라인뱅크’를 출시하기도 했다. 작년에 베트남 상업은행 지분 투자를 통해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는 것까지 포함해 하나금융은 전체 순익에서 해외 순익 비중 2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레거시는 물론 빅테크도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설 방침이다. 최근 주식시장에 화려하게 상장한 카카오뱅크는 아시아 지역에서 모바일 뱅크 설립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윤호영 카뱅 대표는 최근 “아시아 권역의 몇 개 기업에서 카뱅과 조인트 벤처 형식으로 모바일 뱅크 설립 제안을 해왔다”며 “상장 전에는 국내 비즈니스 중심으로 자본 한계 때문에 해외 진출이 어려웠지만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