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왜 존재하지도 않았던 왕 9명을 만들었을까
필자 생각에 역사는 전쟁이다. 이 말은 인류 역사의 상당부분이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수많은 나라들이 역사 해석을 놓고 끝도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에는 관련된 모든 나라들의 콤플렉스가 묻어있다. 그렇다보니 모든 나라들은 역사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분식하거나 왜곡한다.
이렇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역사해석은 어쩔 수 없이 현재 사람들의 시선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나라들은 지금 사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편하게 역사를 디자인한다. 그렇다보니 역사에 공명정대한 팩트란 없다. 결국 자국이기주의가 팩트를 앞서간다. 특히 갈등의 역사를 가진 나라들 사이에는 이 같은 자의적 역사왜곡이 더욱 극심하게 나타난다. 한국과 일본도 그렇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한 자국의 역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했던 침략의 역사를 감추기 위해 오랜 시간 집요하게 역사를 왜곡해 오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근대사나 현대사를 물론 고대사까지 왜곡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라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세상에 실존하지 않았던 천황(일왕) 9명이 등장한다. 1대 진무(神武)부터 9대 가이카(開化)까지가 그들이다. 일본 내부 학계에서조차 이론이 분분할 정도로 이들의 존재 여부는 불투명하다. 일본은 왜 가공의 왕들을 만들어냈을까. 여러 분석이 가능하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신라와 백제계 정권으로부터 간섭을 받았던 고대사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자세히 말하면 3세기 중엽 고대 일본을 지배한 신라계 스진 왕조와 5세기 초부터 지배했던 백제계 니토쿠 왕조 존재를 은폐하고 싶은 것이다. 일본은 이 같은 역사를 숨기고 자신들이 당시 어엿한 강국이었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건국 시기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았던 왕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왜곡은 오랫동안 논란이 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의 뿌리이기도 하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사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시도한 조직적이고 유기적인 역사왜곡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 학계의 해석이다.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아시아 경영을 꿈꾸었던 그들은 자신들 주류가 한반도에서 유래됐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역사를 대륙이 아닌 반도에 한정시키려 했고, 우리 역사의 기원을 낮추고, 고구려 백제 신라를 축소시켰다.
일본서기
▶정말 진구황후는 신라를 정벌했을까
또 하나의 고대사 왜곡을 보자.
진구황후(神功皇后)는 일본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고대 인물 중 한 명이다. <일본서기>에는 진구황후가 3세기 중엽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 국왕에게 항복을 받았으며 곧이어 고구려와 백제도 항복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정벌론 또한 ‘임나일본부설’의 또 다른 근거이자 한반도를 침략하는 중요 논리로 이용되기도 했다.
문제는 <일본서기> 외에 다른 어떤 곳에서도 이 같은 정벌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오히려 다른 역사적 사료들에는 신공황후가 가공인물이거나 왜곡된 인물임을 보여주는 방증이 더 많다. 일본 학자들 중에서도 진구황후 이야기가 거짓 기록임을 거론한 사람이 많다. 와세다대 역사학 교수인 쓰다 소키치는 이미 20세기 초에 “역사 서술에 신라와 전쟁을 한 기록이 전혀 없고, 전투도 하지 않은 백제와 고구려가 항복을 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며, 지리적인 지식도 결여되어 있다”며 신라침공설을 부인했다.
호칭문제도 <일본서기>의 허구성을 뒷받침해준다. <일본서기>에는 신라왕이 항복할 때 ‘일본’이라든지 ‘천황’이라는지 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 당시에는 그 같은 호칭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진구황후
▶일본이 광개토대왕비에 예민한 이유는
왜곡은 중국 지린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둘러싸고도 벌어지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는‘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라는 구절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 문장을 연구한 일본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해방 이후 정인보 박시형 등 남북한 학자들이 나서 비문 해석이 왜곡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은 앞뒤 문장과 연계성이 부족하고,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됐으며, 왜(倭)라는 단어를 목적어로 봐야 한다는 근거 등을 내세워 이 문장은 고구려가 신라 백제 왜를 모두 격파한 광개토대왕 업적을 기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1972년 이진희라는 재일 사학자가 사에키 유우키라는 일본 군인이 일제 때 비문을 수정했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은 급물살을 탔다. 비문 자체가 조작됐다는 주장이라 큰 관심을 끌었다.
이진희는 ‘來渡海破’ 넉 자가 조작된 글자로 보이므로 기존 해석은 모두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석회를 바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일본의 비문 조작을 비판했다. 이 논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일본 국보 중 백제가 만들어 준 유물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나라 호류지(法隆寺)에 있는 구세관음상(求世觀音像)이다. 녹나무로 만든 이 구세관음상은 백제 위덕왕이 만들어 보내준 것이다. 한·일 문화사 관련 다수 저술을 남긴 홍윤기 박사는 호류지에 남아 있는 고문서에서 구세관음상이 백제에서 온 것을 증명해주는 구절을 발견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이것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본 목재학자인 오바라 지로는 “녹나무는 일본 대만 중국에는 자생하고 있으나 조선에는 없으므로 이 불상은 일본에서 조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재 많은 수는 아니지만 한국 남해안과 제주도에 녹나무가 자생하는 것으로 봐서 삼국시대에도 한반도에 녹나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한 일본의 목재학 고문서에는 “일본이 신라에서 삼나무 전나무 예나무 녹나무 피나무 종자를 가져다가 심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많은 정황을 분석해보면 구세관음상은 백제에서 만든 것이 일본으로 갔거나, 아니면 일본에 건너간 백제인이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광개토대왕비
▶임진왜란을 ‘조선출병’이라고 기록하는 일본
일본 후소샤(扶桑社)판 역사 교과서는 임진왜란을 ‘조선출병’이라고 표현한다. 침략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모호한 ‘출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임진왜란 성격을 ‘군대를 일으켰다’는 정도로 규정하는 건 다른 의도가 깔린 해석이다.
타국의 영토를 침략했고, 그 땅에서 두 차례에 걸쳐 무려 6년 동안 전쟁을 했는데 그것을 ‘출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건 상당히 어이없는 행태다.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 역사 서술은 묘하게 임진왜란의 원인 제공을 조선이 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즉 히데요시가 명나라 정복을 위해 길을 터 달라고 했는데 거절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 게다가 일본은 전쟁기간에 일어났던 세세한 상황에 대해선 언급이 별로 없다. 일본이 자행한 인적 물적 피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일본이 한 행위는 분명 침략이었다.
일본의 근세사 왜곡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이 집중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근세사다.
일본 후소샤 교과서에는 “조선이 중국의 복속국이었기 때문에 서구열강의 무력 위협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일본은 식민지배를 이 같은 논리로 미화한다. 1875년 일어난 강화도 사건도 단순 측량 행동에 대한 조선 측 과잉대응이라는 시각으로 기술되어 있고, 청일전쟁도 중국이 자신들 조공국인 조선을 잃지 않으려고 일으킨 전쟁이라고 설명한다.
한국 강제병합 이후 역사 기술은 더욱 노골적이다. 일본은 아시아 안정을 위해 한국을 강제병합했고, 영·미·러 3국 중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한국 내에서도 병합을 수용하는 목소리가 높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자신들이 철도 항만 관개시설 등 인프라스트럭처와 각종 제도를 이식해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지배 기간에 수없이 일어난 항일운동은 거의 기술하지 않거나 기술하더라도 사회주의자들의 책동이라는 식으로 왜곡하고 있다. 또한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거론조차 하지 않는 게 일본 역사 서술의 현실이다.
호류지 구세관음상
▶피해자라도 역사적 사실 과장하지 말아야
심지어 일본은 창씨개명마저 자발적으로 했다고 주장한다. 일본 우익단체인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자신들이 만든 교과서에서 창씨개명에 대해 “조선인의 희망에 따라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을 일본 정부가 허용했다”는 취지로 기술하고 있다. 아소 다로 전 총리도 자민당 간사장 시절 “조선 사람들 가운데 일본식 이름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했다. 일부 필요에 의해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강제로 진행됐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제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각 지역 경찰, 관리, 면장 등을 통해 압력을 넣었음은 물론이고 거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징용을 명령하는 등 불이익을 주었으며, 집을 짓거나 사고팔 때 필요한 허가 서류에도 일본식 이름을 써야만 했다.
심지어 각급 학교 입학서류에 의무적으로 일본명을 쓰게 하기도 했다. 일본은 이처럼 불과 70년 전에 있었던 일까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가다듬어야 한다. 우리도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하기 위해 아주 간혹 역사를 과장하거나 감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논란이 되는 쇠말뚝 문제가 그렇다. 우리는 일제가 한국에서 큰 인물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중요한 산마다 쇠말뚝을 박았다고 말한다. 맥을 끊기 위해 그랬다는 것인데 근거가 부족한 미신이다.
물론 일제가 쇠말뚝을 박은 것은 맞다. 하지만 미신 때문에 박은 게 아니라 지배와 측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쉽게 말해 등반로 확보를 위해 쇠말뚝을 박아 밧줄을 연결했는데 밧줄은 세월이 흘러 사라졌고 쇠말뚝만 남은 것이다.
팩트와 과학성에서 벗어난 주장은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본에게 쓸데없는 빌미를 제공한다.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피해를 과장하는 것도 왜곡이다. 화가 나도 팩트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역사 전쟁에서 이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