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인문학산책 ⑪ “좋은 번역가는 창조자”라는 말은 진리… 프랑스, 활발한 번역으로 문학사 주도
허연 기자
입력 : 2019.12.09 17:05:31
수정 : 2019.12.09 17:08:59
얼마 전 한국인 한 명과 미국인 한 명이 공동으로 필자의 시 10편을 번역해서 한국현대문학 번역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나의 시를 읽고 외국어로 번역했다는 게 참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주최 측에서 보내온 번역문을 보면서 또 한 번 감동을 받았다. 영어가 짧은 내가 보기에도 번역자들이 두 나라 말 사이를 오가며 했을 적지 않은 고뇌가 그대로 느껴졌다.
필자가 쓴 시 중에 <들뜬 혈통>이 있다. 흥겨운 뉘앙스의 혈통이 아니라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붕 떠있는’ 듯한 혈통을 의미하는 문장이었다.
이것을 번역자들은 ‘Of Restless Blood’라고 옮겼다. 무릎을 쳤다. ‘불안한 피’라고 직역이 되는 이 영어문장에는 내가 의도한 글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스페인이 중남미를 정복했을 당시 말린체는 아즈테카 원주민 부족의 공주였다. 스페인어를 잘했던 그는 스페인 장군 에르난 코스테르의 번역가(Translator)가 됐다. 그는 스페인 쪽에서 보면 번역자였지만 아즈테카 부족에게는 반역자(Traitor)였다. 그녀의 이름은 보는 시각에 따라 상반된 해석을 지닌 채 지금껏 전해 내려온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난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은 말린체의 예처럼 정치적·역사적 배경 앞에 놓인 번역가의 운명을 의미하기도 하고, 문화의 차이 때문에 원본을 어느 정도 변형할 수밖에 없는 번역의 태생적인 운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1968년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나란히 서 있는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번역가인 말린체는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반역자였지만 동시에 창조자였다. 오늘날 번역가는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하는 다리이자 새로운 문화공간을 탐험하는 사람들이다. 말린체를 생각하면 번역가라는 사람들의 운명이 와 닿는다. 번역가 이희재가 쓴 <번역의 탄생>에는 양쪽 언어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할 수밖에 없는 번역가의 운명을 암시한 글들이 나온다.
“출발어(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좀 딱딱하더라도 출발어의 독특한 구조와 표현을 살려주려는 태도이고 도착어(번역어)에 충실한 번역은 도착어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문장을 만들려는 태도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라는 사람은 1813년에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번역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번역자가 저자를 제자리에 두고 독자를 최대한 저자 쪽으로 데리고 가는 방법이 하나요, 번역자가 독자를 제자리에 두고 저자를 최대한 독자 쪽으로 데리고 가는 방법이 다른 하나다.’”
그러면서도 이희재는 번역자가 필연적으로 감내하고 이루어내야 하는 창조성에 대해서 중요한 부분을 지적한다.
“번역자는 사전의 틀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전은 말이라는 거대한 빙산의 극히 일부분만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 아직 담기지 않은 뜻은 번역자가 스스로 말을 만들어서라도 담아내야 합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번역자인 발레리 라르보는 이런 말을 했다.
“번역은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일’이다. 저울 한 쪽에는 저자 말을 올려놓고 다른 한 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 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 나간다. 하지만 저울에 올리는 것은 사전에 정의된 말이 아니라 저자의 말이다. 그 말은 설령 원문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다리를 뻗어 작품 전체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저울에는 그 생명의 무게가 얹힌다.”
라르보 말처럼 번역은 단순히 말을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 저자의 정신과 해당 언어권의 문화, 시대상황, 글의 분위기, 주제의식, 의식의 흐름 등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일이다. 따라서 좋은 번역가는 좋은 창조자라는 말은 진리다. 프랑스 문학이 르네상스 후 세계 문학사를 주도하게 된 계기는 활발한 번역 때문이었다.
작가와 독자들이 번역을 통해 다른 언어권의 폭넓은 문학세계를 접하면서 문학을 보는 시각적 수준이 높아졌다.
알렉상드르 뒤마, 빅토르 위고, 볼테르, 보들레르,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우리는 이들을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나 시인으로만 알고 있지만 이들은 동시에 뛰어난 번역가들이었다.
<삼총사> <몽테 크리스토 백작>을 쓴 뒤마는 <햄릿> <아이반호> 등의 영국 문학을 프랑스어로 번역 소개한 선구자였다. 빅토르 위고의 셰익스피어 프랑스어 번역은 지금도 최고로 꼽힌다.
앙드레 지드 역시 프랑스가 낳은 최고 작가이자 최고 번역가였다. 그는 타고르, 푸시킨, 괴테 등을 번역했고 <햄릿>을 완벽하게 번역하기 위해 25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했다.
번역은 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했다. 유럽 문명이 세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활발한 번역 때문이었다. 번역을 통해 흘러들어온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그리스·로마 문명과 만나 유럽을 더욱 융성하게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968년 일본에게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영어 번역자는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다. 두 사람은 그해 노벨상 시상식장에 나란히 선다. 그 자리에서 수상소감을 말하던 야스나리는 번역자를 가리키며 이렇게 경의를 표한다.
“제가 받는 상금의 절반은 번역자 사이덴스티커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설국>을 번역하면서 힘든 점이 무엇이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사이덴스티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람들은 <설국>이 번역 불가능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 역시 이 작품을 번역 불가능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어 사용이 미묘하고, 너무도 모호합니다. 모호한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소설은 번역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순되는 말이지만, 번역 불가능한 것도 번역해야 합니다. 번역하는 것은 번역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번역에 대한 개념은 실망스럽다. 번역을 ‘음지에서 하는 일’ 정도로 생각하는 나라이다 보니 어이없는 일도 생긴다. 명심하자. 번역은 한 문화를 다른 문화로 정확하게 재탄생시키는 또 하나의 창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