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프로젝트] 충남 예산 수덕사 둘레길 | 잠시 멈추고 마음 비우는 도량(道場), 1000년 정기 몸에 담아 한 해 마무리…
김유진 기자
입력 : 2019.12.06 15:06:32
수정 : 2019.12.06 15:06:54
“우리나라 전국의 유명하다는 사찰을 가보면 저절로 알게 돼요. 그곳이 왜 유명한지를.”
뜬금없는 말에 왜 그런 거냐고 물었더니 한참이나 부연이 이어졌다.
“전 불자는 아니지만 계절이 바뀔 때면 좋은 산을 찾고 꼭 그 산에 자리한 사찰에 들릅니다.”
“불자도 아닌데 사찰에 꼭 가야할 이유가 뭡니까.”
“신기하게도 사찰은 산의 중심이에요. 산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경치도 좋지만 사찰에서 둘러보는 산의 풍광은 그야말로 제철 맞은 음식 같아요.”
“어떤 음식이 그리도 좋던가요?”
“예를 들어 봄이면 사찰 내에 벚꽃이 만발합니다. 여름이면 산을 꽉 메운 녹음이 사찰 안으로 스며 들어와요. 처마 끝 어딘가, 아님 돌계단에 앉아 있으면 푸릇한 냄새가 납니다. 가을에는 말해 뭐하겠어요. 단풍 명소로 유명한 사찰이 많잖아요. 겨울이면 눈 쌓인 대웅전 뒤편에 빠알간 동백꽃 피어나요. 이러니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게 이상한 일 아니겠어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십 수년간 중소 수입사를 운영해온 사장님의 논리인데, 사업이 잘될 땐 잘된다고, 안 될 땐 안 된다고 훌쩍 떠난 나름의 원칙이자 경영철학이다. 그의 말을 빌면 잘되면 교만해질까봐 안되면 절망할까봐 의도적으로 떠났고, 돌아와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을 살았다.
“떠날 때는 절대 혼자가지 않아요. 늘 가족과 같이 갑니다. 생각해보세요. 나만 잘되고 안 될 때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그럴 땐 우리 집 꼬맹이도 그럴 수 있으니 같이 가서 리프레시해야죠. 좋은 데 가서 좋은 걸 보고 느끼고 먹고 마시는 데 안 풀릴 게 뭐 있겠어요. 그러려고 일하는 거고….”
갑자기 사찰에 가고 싶어졌다. 동장군 몰려오는 12월에 조금이라도 따뜻한 남쪽 어딘가에….
▶늘 붐비는 수덕사, 전국의 사투리가 한 곳에
아차, 남쪽 어딘가를 바라며 떠난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12월호를 준비하기 위해 11월 중순경에 떠난 길은 고속도로나 국도 모두 어딜 가도 꽉 막혔다. 단풍 끝물을 즐기기 위한 자동차의 행렬에 간간이 일렬종대로 운행하는 관광버스 무리가 이어지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사실 떠날 때 내심 마음에 둔 목적지는 목포였다. 목포항을 내려다보는 사찰에 마음을 옴팡 빼앗겼더랬다. 덤으로 최근 인기절정이라는 케이블카도 눈에 담아올 심산이었다. 하지만 절정으로 치닫는 단풍 앞에 간절한 바람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수덕사 내 둘레길
콱 막힌 고속도로에서 눈에 확 들어온 이정표가 ‘수덕사 가는 길’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계획 없는 차선책은 아니었다. 수덕사가 자리한 예산군은 동쪽에는 차령산맥이, 서쪽에는 가야산맥이 있어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산지 중앙부에 넓은 평야가 자리했는데, 삽교천과 무한천이 지나는 이곳이 우리나라 쌀의 주산지인 예당평야다. 예부터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풍부했던 이곳은 수덕사와 함께 충의사, 추사고택, 예당호, 삽교평야 등 ‘예산 10경’이라 불리는 명승지로 유명하다. 그 중 단연 압권이 수덕사인데, 어떤 이들은 다른 9경을 합해도 수덕사 한 곳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바위가 열리고 관음보살이 사라졌다는 관음바위
서론이 길었다. 12월에 매경LUXMEN이 찾은 길은 ‘수덕사 둘레길’이다. 덕숭산 초입에 자리한 수덕사는 일주문 주변에 수덕여관, 선미술관부터 대웅전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동선당, 취송당, 왼편에 선수암, 극락암까지 각 암자를 들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둘레길이 될 만큼 넓고 아름답다. 산 위로는 정혜사가 자리했는데, 그곳까지 들르면 둘레길에 등산코스까지 더해져 하루가 짧다. 이 모든 코스는 사실 너무나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평일인데도 너른 주차장에 차들이 빽빽했다. 높은 하늘 아래 수묵화처럼 흐드러진 풍광을 즐기려는 이들로 일주문까지 다다르는 길은 붐볐다. 이런 상황이 일상인 듯 길 주변엔 관광객을 위한 한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름이 낯선 버섯이나 나물을 파는 가게 앞은 십중팔구 관광객 무리가 발길을 멈춘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설명하는 주인장 주변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에서 온 이들이 에워싸고 있다. 그야말로 진풍경이다.
▶한 계단 오르고 나니 또 다른 계단, 달라지는 풍경
수덕사는 유난히 계단이 많다. 유난하다는 건 어쩌면 그만큼 넓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실제로 여타 사찰에 비해 높고 넓은데, 그래서 유독 계단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신기한건 한 계단 한 계단 오를수록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달라진다는 것. 특히 황하정루에서 금강보탑 방향으로 오르는 계단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하다. 시퍼런 하늘과 대비되는 하이얀 돌계단은 오르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릴 것만 같은 묘한 기운을 품고 있다. 대웅전 서쪽 백련당 뒤편에는 전설을 간직한 관음바위가 있다. 바위가 갈라지며 관음보살이 사라졌고, 그 틈에서 버선 모양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전설에 일부러 찾는 이들이 있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지금도 봄이면 신기하게도 바로 그 바위틈에서 노란 꽃이 피어난다고 한다.
황하정루에서 금강보탑으로 오르는 계단
수덕사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난 후 마지막에 들러야 할 곳 중 하나는 선미술관과 수덕여관이다. 1996년 충남기념물로 지정된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다. 1944년에 이곳을 구입해 6·25전쟁 때 피난처로 사용하다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고 한다. 2010년 개관한 국내 최초의 불교 전문 미술관인 선미술관은 이응노 화백의 호를 딴 ‘고암전시실’ 등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는 고승들의 선물, 선서화와 이응노 화백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초대전을 통해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기도 한다.
수덕사 입구의 관광거리
예산 10경 중 핫한 코스
·제5경 예당호
예당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둘레 40㎞, 넓이 2㎞)이자 중부권 수자원 환경의 보고다. 전국 최고의 낚시 명소로 손꼽히는 이곳은 친환경 테마형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다. 최근엔 출렁다리가 새로운 명소가 됐다. 402m에 이르는 국내 최장 출렁다리로 수면 위를 걷는 듯한 아찔한 추억을 선사한다.
·제10경 덕산온천
장시간 걷고 난 후 마무리는 역시 온천욕 아닐까. 수덕사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덕산온천은 예산의 자랑 중 하나다. 이율곡의 <충보>에 “날개와 다리를 다친 학이 날아와 이곳에서 나는 물을 상처에 바르며 치료한 후 날아갔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물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글·사진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