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음모는, 혹은 그 음모를 다룬 영화는 두 가지를 정확하게 찾아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걸 한꺼번에, 그리고 손쉽게 드러내게 할 수 있다. 첫째가 모든 일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였는가라는 것 하나, 두 번째는 이 같은 ‘작당(作黨)’을 통해 가장 이득을 보는 이(들)가 누구냐는 것이다. 간단한 일이다. 두 가지만 찾으면 되니까. 하지만 그게 아주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얘기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였는지를 찾거나 판단해내는 게 어렵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음모 전체를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칫 얘기 전체를 비비 꼬인 상태로 굉장히 어렵게 그려내게 된다. 흔히들 범죄 인물도(人物圖), 그 관계도, 심지어 가계도(家系圖)까지 동원하게 되는데, 그쯤 되면 파이다. 일반 대중들의 머릿속에는 사건 전부가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변해 버린다. 오직 나쁜 놈이 누구고 당한 놈이 누군가만 남는다. 그렇게 되면 진실 파악은 물을 건너기 위해 노를 저어가는 중이 되기 십상이다.
미국 FBI의 부국장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의 내부 고발자였던 마크 펠트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뒤를 좇던 워싱턴포스트지 기자 밥 우즈워드와 칼 번스타인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돈을 좇으시오!(Follow the Money!)” 우즈워드와 번스타인은 이때부터 영수증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대한 음모의 뿌리를 캐내는 데 성공한다.
론스타 사기극의 근원을 빼내는 데 있어 정지영 감독은 혼외정사의 두 남녀를 이용한다. 그런데 그게 꽤나 흥미롭고 뒷맛이 재밌다. 불륜이니까.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오빠는 괜찮을 거라면서?” 오빠도 여자에게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너는 무조건 모른다고 해. 잡아 떼!” 오빠라는 자(류승수)는 외환은행의 중간 관리 직원이다. 그는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고 외환은행의 BIS비율을 조작해 하향 조정했다. BIS는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이다. 이게 높아야 은행의 금융 건전성이 보장된다. 이게 낮으면 예금주들의 인출 사태를 막을 수가 없다. 도산이다. 그러니까 그 전에 BIS비율을 높이든, 은행 지분을 매각해 돈을 비축하든, 그것도 아니면 아예 은행을 팔아넘기든 해야 한다. 오빠라는 자가 조작한 외환은행의 BIS비율 서류는 그의 불륜상대 여자(이나라)를 통해 팩스로 관련 기관에 전송된다. 그 서류 한 장으로 외환은행은 론스타라는 미국 자산그룹에 헐값에 매각된다. 70조원 규모의 은행이 1조4000억원에 팔린 것이다. 자, 근데 그게 그렇게만 됐다면 음모는 묻혔을 것이다. 오빠라는 남자는 이 과정의 비밀을 숨기려는 집단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 사건은 교통사고로 위장된다. 그 사실을 알고 무서움에 떨던 여자 역시 자살인 척 살해된다. 이 여자는 남자가 죽었을 당시 주인공 검사 양민혁(조진웅)이 진술 청취를 맡았던 사람이다. 사건은 양파 껍질 까이듯 하나둘씩 벗겨지기 시작한다. 양민혁은 본의 아니게 론스타 사건의 실체에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하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한 걸음 한 걸음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가기 시작한다.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 일이다. 그때는 사건이 너무 복잡하게 보였다.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걸 이 영화를 만든 정지영 감독은 일의 시작을 아주 쉽게 전개시킴으로써 사건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대중들을 쉬운 길로 안내해 간다. 노익장의 친절함이다.
정지영 감독의 <블랙머니>는 재미있다. 이야기가 촘촘하고 쫀쫀하게 잘 짜여 있으며 빈틈이 없다. 속도감과 경쾌감이 남다르다. 어려운 경제 얘기임에도 빠르게 진행되면서 숨 가쁜 서스펜스를 흘려낸다. 론스타를 중심으로 외환은행의 헐값 매각 사태, 그리고 그것을 되팔고 나가는 과정의 정치적 경제적 비리의 내용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의 모피아, 곧 경제 관료 마피아들이 론스타와 음모를 꾸며 시중은행인 외환은행을 싸게 팔고 다시 또 다른 국내 시중은행인 하나은행으로 하여금 이를 비싸게 사게 함으로써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어낸 사건이다. 경제부 기사만으로는 무슨 얘기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당시의 기사들도 일부러 어렵게 쓴 흔적이 역력하다. 대중들의 관심권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가 작동했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모피아들의 기획이었을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들만의 리그인 양 일을 꾸미고 진행시켜야 했을 것이다. 막대한 차익으로는 검찰과 언론을 적당히 먹여 살리는 구조로 사용하면 된다고, 그게 국가운영의 일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은 자신들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어찌 보면 이번 조국 전 장관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 가운데 사모펀드 논쟁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검찰과 언론은 필요 이상으로 조국 부인의 사모펀드 운영을 부풀리고 왜곡한다. 대중들은 뭔 얘기인지 잘 모르는 상황이 된다. 그걸 이용해 특정 집단은 사건의 주도권을 끌고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전의 론스타 때가 그랬다. 지금의 론스타도 여전히 그렇다. 론스타 사태는 아직 진행형이다.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5조원에 이르는 소송이 아직 결론 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부패 고리, 곧 정치-경제-사법의 프레임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지, 그 고리의 강도가 얼마나 단단한지를 보여준다.
영화 <블랙머니>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건, 정치·사회 비리의 문제를 지루하다 해서 잊어버리고 내팽개치면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중간 중간 유머도 적지 않게 비벼 넣었다. 사실상 지루한 얘기를 지루하지 않게 하려 노력한다. 그럼으로써 이것이 바로 우리들 자신의 얘기임을, 우리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임을 인지하게 한다. 그때 날아간 돈이 다 우리 것이었음을 강조한다. 정지영 감독이 노린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어려운 정치경제학을 손쉽게 알아 볼 수 있는 텍스트로 정리해냈다. 그것도 상업영화가 갖는 장르적 특성을 유연하게 휙휙 휘둘러 가며. 정지영은 한동안 꽤나 뾰족하게 살아왔다. 정지영 하면 국내 영화계의 대표적인 좌파 감독으로 손꼽혀 왔다. 그가 만든 <부러진 화살>, 특히 <남영동1985>가 그런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하지만 원래 그는 상업영화 감독이었다. 사람들은 잘 모를 수 있는데 정지영은 워낙 장르영화를 잘 찍는 감독이다.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가 그랬고 <블랙잭>이 그랬다. <블랙머니>는 정지영이 충무로에서 한창 놀았던 때, 그 전성기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나이 먹은 감독이 예술영화를 찍는 건 역설적으로 쉽다. 인생과 세상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을 테니까 그걸 그대로 옮겨 적으면 될 것이다. 나이 먹은 감독들이 자꾸 종교영화를 찍거나 종교적 색채나 그런 느낌의 영화를 찍는 건 그 때문이다. 반대로 정지영처럼 나이 먹은 감독이 상업영화를 찍는 건 아주 어렵다. 그래서 더 존경스러운 일이다. 세상의 트렌드를 못 좇아가는 것은 기본이고 나이를 먹으면 배움이 더뎌져 기술적으로도 한참이 뒤처지기 마련이다. 상업영화는 ‘요즘 세태’와 ‘요즘 세대’, 그 흐름을 모르고서는 도저히 찍을 수 없는 노릇이다. 노(老)감독으로서, 그 정체성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전달하면서도 동시에 그걸 대중적 어법으로 정리하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정지영은 그걸 <블랙머니>로 해냈다. 그는 1946년생 73세이다. 한국에 이런 노감독은 현재 거의 유일한 존재이다.
한편으로는 이번 영화를 보고 있으면 <월 스트리트2>를 만들 때의 (<월 스트리트1>이 아니라) 올리버 스톤이 생각난다. 올리버 스톤도 1946년생이다. 그는 그 영화를 10년 전에 만들었다. 올리버 스톤이나 정지영이나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점 마음속이 세상에 대한 근심으로 꽉 들어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젊은이들한테 세상의 진면목을 알려주고 싶은데 그게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 나이가 돼있는 것이다. 그래서 쉽고 친절하게, 마치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듯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둘 다 그 진심이 느껴진다. <블랙머니>는 세상과 후세대를 걱정해서 남긴(나중에라도 꼭 챙겨 보라고 하는 의미에서) 선배 감독의 촘촘한 사건 기록서 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로 론스타 사건이 잘 해결될 수 있을까.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영화 한 편이 많은 일을 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론스타 문제에 관한 한 대중들의 인식은 굉장히 높아질 것이다. 그게 어디인가. 그거면 됐다. 영화든 세상이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뀌는 법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