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의 보르도 와인 이야기] 제임스 본드가 즐긴 ‘샤토 슈발 블랑’ 소량 한정 생산에 소장가치 높아
입력 : 2019.08.01 15:04:05
수정 : 2019.08.01 15:04:50
대부분의 와인 메이커와 평론가들은 좋은 와인은 좋은 땅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품질의 포도가 가장 중요하고, 좋은 품질의 포도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토양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 철학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와인이 바로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와인들이다.
섬세하게 관리되는 하나의 포도밭에서 하나의 와인만을 만들기 위한 포도를 재배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불리는 ‘로마네 콩티(Romanee Conti)’는 부르고뉴에 위치한 로마네 콩티 포도밭에서 나오는 포도로만 만들어 진다. 그리고 이 와인은 ‘도멘 로마네 콩티(Domaine de la Romanee Conti)’를 줄여서 ‘DRC’라고 불리는 단 하나의 와인 양조장에서만 만들어진다. 이런 와인들을 ‘싱글 빈야드 와인’이라고 부르는데, 엄격하게 따지면 하나의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로 하나의 양조장에서 만들어져야만 싱글 빈야드 와인이라 불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철학이 모든 고급 와인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부르고뉴 내에서도 완벽한 싱글 빈야드 와인은 드물다.
가령 ‘클로 부조(Clos Vougeot)’라고 불리는 유서 깊은 포도밭에서는 무려 80명의 주인이 서로 다른 와인을 만든다. 하나의 포도밭에서 여러 개의 와인이 만들어지는 사례다. 거꾸로 여러 포도밭의 와인을 블렌딩해서 만들기도 한다. 네고시앙이라 불리는 와인 회사들은, 여러 포도밭에서 재배한 포도로 하나의 와인을 만들기도 하지만, 한 포도밭의 서로 다른 농부들이 재배하는 포도를 사서 블렌딩하여 만들기도 한다. 이런 와인들은 엄격한 싱글 빈야드 와인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판매된다.
▶블렌딩의 예술,
보르도의 고급 와인
고급 와인 시장에서 부르고뉴의 가장 큰 경쟁자인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양조가들도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땅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좋은 포도밭에 대해 조금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보르도에도 싱글 빈야드라는 철학이 존재한다. 가령 ‘카뤼아드(Carruades)’는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세컨드 와인이기도 하지만, 원래는 같은 샤토에서 소유한 포도밭 이름으로 로마네 콩티와 비견할 만한 가장 좋은 포도밭이다. 19세기 말에는 카뤼아드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만을 가지고 와인을 만든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카뤼아드 포도밭에서 생산되는 포도와 다른 포도밭에서 재배되는 포도를 모두 섞어서 ‘샤토 라피트 로칠드’ 와인을 만든다.
보르도 고급 와인은 블렌딩의 예술이라고 한다. 우선 서로 다른 포도품종을 사용한다. ‘페트뤼스’처럼 메를로(Merlot) 포도를 100%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보르도 양조장들은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e) 등을 블렌딩한다. 설령 하나의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 경우에도, 서로 다른 조건의 포도밭에서 재배된 포도를 모아 블렌딩한다.
최근 보르도 고급 와이너리에서는 소위 소량 양조, 마이크로 비니피케이션(Mirco-Vinification)이라고 불리는 기법이 유행이다. 이 기술은 거대한 와인 농장의 포도밭들을 작은 단위로 쪼개어, 마치 싱글 빈야드 와인을 만드는 것처럼 따로 와인을 만든 다음 오크통 숙성을 전후로 블렌딩하는 기법을 의미한다. 이 기법은 보르도의 블렌딩 와인에 싱글 빈야드 양조의 섬세한 컨트롤을 결합한 사례로, 꼼꼼한 품질 관리가 가능하지만 대단히 많은 손길이 가는 방법이다.
큰 양조장의 경우 100개가 넘는 서로 다른 샘플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데, 이 중에 해당 포도원에 적합한 와인만 선택되고 나머지는 벌크로 판매가 되거나 세컨드 와인처럼, 같은 양조장의 다른 제품을 만드는 데에 사용된다. 작황이 좋지 않을 경우 90% 이상의 포도가 버려지는 경우도 있다. 제일 좋은 와인을 블렌딩하는 마법은 반드시 최고 품질의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합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최고급 와인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와인들이 블렌딩되어 만들어진다. 싱글 빈야드 와인이 단식 테니스 경기와 비교된다면, 보르도의 블렌딩 와인은 마치 하나의 축구팀이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다. 이런 특징 때문에 전통적으로, 맛의 ‘균형’이 숙성 잠재력과 함께 고급 보르도 와인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샤토 슈발 블랑 포도원
▶루이비통이 인수한 샤토 슈발 블랑
보르도의 고급 포도원들은 대부분 오랜 전통에 바탕을 둔 뛰어난 블렌딩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샤토 슈발 블랑(Chateau Cheval)’은 이미 오래 전부터 최고의 양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포도원이었으나, 1998년 루이비통(LVMH)이 인수한 이후 적극적으로 소량 양조, 즉 파셀별 양조를 도입하면서 더욱 혁신적인 와인으로 성장하였다.
샤토 슈발 블랑은 카베르네 프랑과 메를로 외에 카베르네 소비뇽과 말벡이 39Ha에 달하는 넓은 포도밭에 심어져 있다. 루이비통 그룹이 인수하면서 샤토 슈발 블랑의 양조 책임을 맡게 된 피에르 뤼르통은 이 포도밭들을 다시 59개의 작은 파셀로 나누어 이에 맞는 양조 탱크를 새롭게 제작하였다. 인수되기 전 샤토 슈발 블랑은 메독의 5대 샤토라고 불리는 ‘샤토 라투르’나 ‘샤토 오브리옹’과 비슷한 가격에 거래되었으나, 새로운 양조 기술을 도입한 후 30% 정도 더 높은 가격에 출시되고 있다.
원래 샤토 슈발 블랑은 같은 생테밀리옹 마을의 ‘샤토 피작(Chateau Figeac)’의 포도밭 일부가 1832년 분리되면서 만들어졌다. 마을의 전설에 따르면 당시 도박에 빠져있던 샤토 피작의 주인이 도박에 질 때마다 조금씩 포도밭을 내다 팔아서 ‘샤토 슈발 블랑’이 되고, ‘샤토 페트뤼스’가 되고 ‘샤토 레방질’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 이 포도원들은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오히려 샤토 피작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샤토 슈발 블랑은 영화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는데, 1983년 <007 네버세이 네버 어게인>에서 제임스 본드와 함께하면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영화 <사이드웨이>에서 오랫동안 보관하던 1961년산 샤토 슈발 블랑을 햄버거와 마시는 장면이 가장 유명하다. 샤토 슈발 블랑의 포도밭 연구는 지금도 진행 중인데, 최근에는 포도밭의 일부가 레드 와인보다 화이트 와인에 더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 포도밭에서 2014년부터 ‘쁘띠 슈발 블랑(Petit Cheval Blanc)’이라는 이름으로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루이비통 그룹이 처음 샤토 슈발 블랑을 인수하였을 때 전문가들은 슈발 블랑이 와인판 루이뷔통 핸드백처럼 되지 않을지, 혹은 값비싼 코카콜라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다른 어떤 보르도 와인보다 명품 와인으로 자리 잡았다. ‘소유를 꿈꾸는 것’이 명품이라고 한다면, 슈발 블랑은 모든 와인 애호가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와인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