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 보면 전혀 엉뚱한 영화를 보는 날도 있어야 한다. 그건 살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예컨대 장거리 비행을 통해 해외로 출장을 가는 길에 기내에서 보게 되는 영화가 꼭 킬링타임 영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의외로 비행기에서 철학적인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세상 삶이란 그렇게 예상치 못하는 맞닥뜨림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는 법이다. 사람이 어떻게 돈 벌 궁리만 하고 살겠는가. 돈만 벌겠다고 죽자고 덤비며 살다 보면 결국 마음이 허해져서 자꾸 딴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사고가 난다. 인생이 순탄하려면 생각만큼은 거꾸로 일탈의 롤러코스터를 마다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람 뇌 속의 비정상을 알아야 겉으로나마 일상의 삶을 간신히 정상적으로 꾸리며 살게 된다.
'킬링 디어'란 제목으로 개봉됐는데 원래는 ‘킬링 오브 어 새이크리티드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 직역하면 ‘성스러운 사슴 죽이기’란 제목을 지니고 있는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원래 무지막지한 폭력성을 지닌 존재들인데 그것을 잘 감추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건 전적으로, 아니 상당 부분은 '킬링 디어'와 같은 영화적 상상력을 중간중간 제공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문제는 이런 류의 영화들을 사람들이 점점 더 ‘완벽하게’ 외면하고, 심지어 ‘증오하고(젊은 세대 관객들이라면 더욱 더)’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사람들의 타락과 죄악, 폭력성을 정화(淨化)하는 작용을 하고 있음에도 그걸 안 보고 있으니 사람들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한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킬링 디어'는 '더 랍스터'란 영화로 2015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2017년에 만든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상업성이 없다, 혹은 어렵다는 이유로) 고민 끝에 1년 만에 개봉된 것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별종의 감독이고 ‘요령부득의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출신인데 요즘 그의 영화를 두고 그리스 뉴웨이브를 대표한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이름을 얻었다. 요르고스의 영화는 상업적이고 매끄러운 척, 그리고 남들이 다 아는 얘기를 하는 척, 사실은 그 안에 매우 심오하면서도 철학적인 사유를 담아내는 데 주력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작인 <더 랍스터>는 45일이라는 정해진 시간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돼야 하는데, 그렇게 될 경우 어떤 동물이 될 건지도 미리 정해야 한다는 식의,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이게 진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게 만드는 내용이다. 주인공 역의 콜린 파렐은 생물학적으로 섹스를 할 상대,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해 랍스터가 될 운명에 처해진다. 그리고 그는 탈출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랍스터라는 오브제(Object)에 대한 상상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왜 하필 많고 많은 생물 중에 갑각류를 선택했을까.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하려고 하는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새우의 딱딱한 껍질처럼) 욕망조차 통제된 사회에 대한 우화(偶話)를 그리려 했던 것일까.
'킬링 디어'는 보다 더 그리스 신화적이고 또 그만큼 은유의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명백히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그리스 신화 속 아가멤논의 비극을 차용한다. 아내 안나(니콜 키드먼)와 함께 아들 밥(서니 술리치), 딸 킴(래피 캐시디)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호흡기 질환 전문 외과의사 스티븐(콜린 파렐)은 사실 알코올 중독자다. 어느 날 스티븐은 술을 몇 잔 마시고 수술하다가 환자를 죽게 만드는 의료 사고를 내고 만다. 수년이 지난 뒤 스티븐은 자신이 그날 죽게 만든 환자의 아들 마틴(배리 케오간)을 만나게 된다. 의식적으로 그는 아이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 아이가 자신을 점점 스토킹하자 불안에 떨게 된다. 그리고 그 불안은 결국 공포로 변하게 된다.
마틴이란 아이가 이상한 존재이긴 하다. 그는 저주의 주술을 부릴 줄 안다. 스티븐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마틴은 저주를 내린다. 스티븐의 딸, 아들이 네 가지 저주에 걸려 처음엔 걷지 못하고, 두 번째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세 번째는 두 눈에서 피가 흐르다 마지막 네 번째에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거라고 한다. 아이들은 정말 그 과정을 겪는다. 스티븐은 이제 두 아이를 다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는 결국 아가멤논과 같은 결정을 하게 될까.
아가멤논은 트로이 정벌을 나가던 중 전쟁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인 탓에 저주에 걸린 것을 알게 된다. 순풍을 얻지 못한 그의 전함들은 한 발짝도 꼼짝 못하는 신세로 항구에 발이 묶인다. 전쟁은 코앞이고 저주는 풀 길이 없는데 예언자 칼가스는 아가멤논에게 딸인 에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아가멤논은 주저 없이 딸을 죽인다. 아내이자 에피게니아의 엄마는 그런 남편에게 앙심을 품고 트로이 정벌에서 돌아온 그를 정부(情夫)와 짜고 살해한다. 그 과정에서 어린 아들 오레스테스는 간신히 타우리스로 몸을 피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죽은 줄 알았던 에피게니아가 사제로 살아가고 있다. 오레스테스는 또 다시 이방인으로 몰려 제물이 될 처지에 놓이게 되고 그 의식을 에피게니아가 진행을 하게 된다. 에피게니아는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동생인 줄 모르고 그를 죽일 위기에 처하게 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왜 이런 얘기를 현대화한 것일까. 인간은 죄를 짓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결국 참회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구원받아야 하는데 그러기까지는 누군가가 대속(代贖)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런 이야기의 정점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의 원리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내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는 그래서, 매우 신화적이고 기독교적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모든 것에 회의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영화는 무엇보다 우리가 얼마나 한순간에 깨지기 쉬운 ‘중산층의 안전망’ 속에서 허덕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지키려는 것, 곧 가정의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금의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얇은 유리창 같은 허상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영화는 그래서 관념적으로 파괴적이고 매우 위험하지만 역설적으로 보수적인 경계, 곧 자신의 울타리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화시킨다. 영화의 주인공 스티븐처럼 한 치의 일탈을 허용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양가적(兩價的)이고, 중의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어쨌든 인생을 고찰한다는 것은 오묘한 일이다. 그런 삶의 단면을 담아내려는 영화 역시 늘 기묘하고 난해하기 마련이다. '킬링 디어'가 그렇다. 세상의 삶은 종종 직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저주에 걸린 것처럼 해법 없이 방황하게 된다. '킬링 디어'는 그렇게, 직시(直視)하게 하는 영화다. 비록 어렵다 한들 이 영화를 피해 가지 말라고 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