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골 집안에서 태어나 ‘나라 망칠 놈’이란 예언에 어린 시절부터 모진 인생을 살아야 했던 궁예. 장성한 그는 타고난 재주로 사람을 모아 후고구려를 세우곤 왕이 된다. 허나 스스로를 살아 있는 미륵이라 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본다는 관심법(觀心法)으로 횡포를 일삼던 궁예는 끝내 홀로 쫓기다 부하장수였던 왕건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부르며, 머리에 금빛 고깔을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다. 맏아들을 청광보살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탔는데,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고, 동남동녀들을 시켜 일산과 향과 꽃을 받쳐 들고 앞을 인도하게 하였다. 또 비구 200여 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면서 뒤따르게 하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궁예의 행실이자 병폐 중 하나다. 그는 918년 왕위를 빼앗기고 왕건에게 쫓겨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끝자락에 자리한 명성산에 은거지를 만들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왕에서 산속에 숨어 지내는 처지로 전락한 궁예는 한동안 크게 소리 내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을 울음산이라 불렀는데, 후에 울음산을 한자로 표기해 명성산(鳴聲山, 923m)이 됐다. 주변의 망무봉(446m)과 망봉산(384m)은 궁예가 망을 보던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호국로 3791번길 50-11. 이곳엔 명성산과 망봉산, 망무봉을 끼고 있는 그림 같은 호수가 오롯하다. 한 폭의 수묵화를 옮겨 놓은 듯한 장중함에 가던 길 멈추고 한동안 먼 산 바라보게 하는 신묘한 기운이 그득한 곳이다. 이 경치 좋은 곳이 6·25전쟁 이전엔 북한 땅이었다. 그 당시 이곳에 김일성의 별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풍광 좋은 곳에서 적화통일의 야망을 구체화했다. 호수가 앉은 모양새가 한반도를 좌우로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의 별장이 지도상의 한반도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어 일부러 더 자주 찾았다고 한다.
5000년 역사 찬란한 한반도에 선조들의 발자취 선명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만 이곳은 유독 야망 넘치던 남자들의 부질없는 야욕이 묻어난 곳이다. 산중에 묻혀 있는 우물 같다 해서 산정(山井)이라 이름 붙은 호수는 1977년 국민 관광지가 된 후 38년간 수많은 한국인의 희로애락을 품고 또 품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시커먼 더께 널린 자그마한 놀이공원은 친근하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게와 식당도 왠지 정겹다. 2011년 조성된 호수의 둘레길은 포천시의 대표 관광자원. 느릿한 걸음으로 시선을 멀리 두면 가슴속 야망처럼 작지만 단단한 바위산의 위용에 숨이 벅차오르고, 호수 위에 걸쳐진 수변 데크로 내려서면 버려야 할 야욕인 듯 살짝 비쳐진 얼굴이 몽글몽글 떠오른다.
망부봉 오솔길
겨울 호수, 호젓한 감흥
1925년 일제 강점기에 영북농지개량조합(永北農地改良組合)의 관개용 저수지로 축조됐으니 사람 나이로 치면 올해로 구순(九旬). 호수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 산정호수는 매년 100만명 이상(지난해에는 150만명 방문)이 들고나는 관광명소다. 상동과 하동으로 나눠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돼 있는데, 주말이면 자동차 행렬이 빽빽하고 특히 꽃피는 봄과 낙엽 지는 가을, 매년 10월 둘째 주 명성산의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시기엔 그야말로 사람 반 호수 반이다. 그 좋은 시기를 뒤로하고 굳이 겨울에 산정호수 둘레길을 찾은 건 말 그대로 호젓한 감흥 때문이다. 겨울, 그래서 꽁꽁 얼어버린 호수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수만 가지나 담고 있다면, 주변을 둘러싼 바위산은 불어오는 강풍을 막아 걷기 딱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상동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호수로 들어서면 조각공원이 펼쳐지는데, 그 양쪽으로 둘레길의 이정표가 보인다. 한 바퀴 도는 코스라 어느 쪽으로 가도 조각공원이 종착점이다. 등산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이 둘레길은 쉼터이자 산책로다. 그만큼 걷기 편하고 벤치에 앉아 원하는 만큼 사색할 수 있다.
둘레길로 나서기 전 호수를 살피니 0.24㎢의 면적이 모두 꽁꽁 얼어 있다. 주변 상인들의 말을 빌면 “웬만한 겨울 날씨면 3월 중순까지 언 호수가 풀리지 않는다.” 덕분에 호수를 가로지르던 수상보트는 개점휴업이다. 대신 그 자리를 스케이트(1시간 5000원)와 얼음 썰매(1시간 5000원), 세발자전거(30분 5000원)와 얼음 바이크(20분 1만5000원) 등이 차지했다.
다른 건 이용하는 구역이 정해졌다지만 얼음 바이크라 이름 붙은 ATV(4륜 오토바이·All-Terrain Vehicle)는 호수 전역을 휘젓고 다닌다. 이용하는 이들은 새로운 경험이지만 주변을 산책하는 이들에겐 소음이 문제다. 그래서 공공의 적이다. 어쨌거나 겨울을 기다린 이들에게 얼음 위에서 즐길 수 있는 놀이는 관광지의 매력이자 필수코스다.
궁예 코스와 수변 코스의 조화
조각공원에서 호수를 등지고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이름하여 궁예 코스다. 4㎞의 둘레길 중 1.4㎞에 걸쳐 조성됐는데, 앞서 이야기한 궁예의 발자취를 조형물로 만들어 전시한 길이다.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을 만큼 평평한 길에 뛰는 이가 없는 건 어느새 자리한 마음의 여유 때문이다. 살짝 피부를 긴장시킨 차가운 공기가 싫지 않은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다. 궁예 코스는 산에 길을 낸 산길인데, 위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면 낭떠러지가 아찔하다. 길 곳곳의 벤치에 앉아 호수 표면에 자연이 낸 생채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CF 속 명소가 따로 없다.
호수 끝자락에 있는 김일성 별장터에 서면 왜 그가 굳이 이곳에 별장을 세웠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시 김일성은 유고 대통령이던 티토의 초청으로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의 별장에 머물렀다는데, 알프스가 병풍처럼 둘러싼 호숫가 별장에 감동해 귀국 후 풍광이 비슷한 산정호수에 별장을 지었다고 한다.
한화리조트 앞에 펼쳐진 낙천지 폭포와 구름다리를 건너 조각공원 건너편에 들어서면 둘레길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부력식 수변 데크가 나타난다. 지금이야 호수 물이 얼어 자리를 지키고 앉았지만 원래는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길이다. 데크 위에서 발을 구르면 호수의 파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수량이 넉넉할 땐 길이 높고 부족할 땐 낮은, 살아 있는 길이다. 수변 데크 위로는 숲길이 오롯한데, 나란히 이어지다 중간에 만나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데크가 끝나는 곳부터 시작되는 망부봉 오솔길은 솔향기가 진하다. 호수 안쪽의 작은 다리를 건너면 허브 야생화 마을과 카페가 이어지는데 이곳에서 멀리 바라보면 조각공원까지 호수 전망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조각공원으로 이어진 길은 인근 적송 군락지와 어울려 호수의 정취를 더한다. 호수변에 자리한 고찰(古刹) 자인사(慈仁寺)는 궁예와 고려 태조 왕건의 악연을 풀고 화해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포천의 명소, ‘포천 이동갈비 거리’ 훌쩍 떠난 여행에 먹을거리가 없다면 뭔가 허전하다. 경기도 포천 하면 역시 이동갈비다. 중심지는 이동면 장암리에 자리한 ‘포천이동갈비거리’다. 1960년대 초 이동갈빗집과 느타리갈빗집이 문을 연 뒤 하나둘 음식점이 모여들었고, 입소문이 퍼지면서 갈비거리가 조성됐다. 갈비의 기름기를 제거한 뒤 칼집을 내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은 양념이 잘 스며들도록 했다. 참나무 숯불에 구워야 더 맛있다.
파주골 순두부촌 포천은 물이 좋아 건강식이 발달한 곳이다. 그중 영중면 성동리에는 순두부 전문 음식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국산 콩을 사용해 담백하고 고소한 순두부와 모두부가 입소문을 타면서 일동온천과 산정호수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됐다.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