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흥얼거리던 노래 중에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건 이내 심사’라는 가사가 있었다. 그 노래가 남인수의 <청춘고백>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가수가 직접 부르는 노래를 들은 기억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그 가사를, 유독 그 부분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어린 나이에도 사람의 마음을 참 잘 표현했다는 생각을 하며 들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누구를 만나거나 만나고 싶어 하는 건 외로움 때문이라는 데 공감한 것도 같다. 그리고 그 외로움이 인간의 근본적인, 운명과도 같은 조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한참 후에 깨달았다.
혼자 있을 때 우리는 무언가 부족해서 누군가를 찾는다. 그 누군가를 찾으면 부족한 것이 메워질 것 같지만, 그렇게 찾은 누구도 온전히 결핍감을 채워주지 않는다는 게 외로움의 본질이다. 그리움은 결핍감의 표현이지만, 시들함은 충만함의 표현이 아니다. 이 역시 결핍감의 다른 표현이다. 충만해서 시들한 것이 아니고 여전히 부족해서, 그것, 혹은 그나 그녀면 충분할 것 같아 욕심냈는데 그것, 혹은 그나 그녀를 가지고도 충분하지 않아서 시들한 것이다. 그리움이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밖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라면 시들함은 밖에서 들어온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혹은 그것으로 인해 더욱 분명하게 확인되는, 여전한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밖을 향해 뻗은 손을 거둬들이는 것이다.
그리움은 뜨겁고 시들함은 차갑지만 그것은 외로움이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해서 그런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외로움이 뜨거운 것이라면 차갑게 해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차가운 것이라면 뜨겁게 해서 외로움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한 것이 외로움이기 때문에, 차가움을 통해서도 뜨거움을 통해서도 외로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움을 통해서도 시들함을 통해서도 달아나지 못하는 것이다. 흥분과 황홀경(엑스타시) 상태에서 자아를 잃는 것이나 침잠과 해탈(니르바나) 상태에서 자아를 벗어나는 것이나 신비주의의 다른 형태라는 걸 상기해 보라.
엑스타시는 뜨겁고 니르바나는 차갑다. 그러나 형태와 온도는 달라도 현실 세계를 잊고 자아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그 둘은 같다. 뜨겁거나 차가운 것은 각기 다른 것의 속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의 다른 속성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외로움이 그러하다. 어떨 때는 뜨거움으로 표현되고 어떨 때는 차가움으로 표현되는 것이 외로움이다. 그러니까 뜨거움도 차가움도 출구가 아니다. 뜨거움을 충족하면 차가워지고, 차가운 채로 외롭고, 차가움을 충족하면 뜨거워진다. 뜨거운 채로 외롭다. 그리움을 충족하면 시들해지고 시들함을 충족하면 그리워진다. 딜레마다.
어떤 사람은 되도록 많은 사람과 만남으로써 외로움에서 벗어나려 한다. 어떤 사람은 뜨겁게 만남으로써 그렇게 하려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안으로 깊이 들어감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그러나 양이나 뜨거움이나 깊이도 출구가 아니라는 걸 많이 만나고 뜨겁게 만나고 깊이 만나본 사람은 알게 된다. 많이 만나는 것으로 출구를 찾는 사람은 많이 만날수록 심해지는 허기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얼마나 많이? 뜨겁게 만나는 것으로 출구를 찾는 사람은 뜨거움의 온도에 한계가 있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열정으로 사는 시간은 길어야 2년이라는 보고가 있다. 이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게 하는 뉴트로핀이라는 호르몬은 2년이 지나면 분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이제 뜨겁지 않은데도 여전히 뜨거운 것처럼 연기해야 할까? 외부로 눈 돌리지 않고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함으로써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크고 신성한 삶을 소원한 많은 수도사들이 그들이 하찮게 생각하고 버리려 했던 인간적인 따뜻함을 얼마나 동경했는지 상기시켜주고 싶다.
그러니까 <청춘고백>의 이 화자는 자기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그렇게 자책할 일이 아닌지 모른다. 왜냐하면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한 것’은 그 사람의 ‘몹쓸’ 고유한 특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보편적 특질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라면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그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라면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개별 존재로서의 인간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닿게 된다. 종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미뤄 버리면 인간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만 자유로부터도 자유로워진 존재가 된다. 프로그래밍된 대로 작동하는 한낱 기계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주체적 존재임을 증명하려면 어차피 어찌할 수 없는 걸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걸 어떻게 하느냐, 하고 달아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인간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무작정 자기 욕망대로 내달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인 욕망은 다른 동기들에 의해 제어된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니까, 인간은 이렇게 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이렇게 하라고 하지만, 인간의 도리는 인간이니까, 인간은 이렇게 하도록 되어 있는 대로 하는 자가 아니니까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인간은 이렇게 하도록 되어 있지만 하도록 되어 있는 대로 하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
이 역설에 인간다움의 정의가 있다. 그런 점에서 <청춘고백>의 가사는 꽤 윤리적이다.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이 청춘’이라는 가사가 후렴구로 붙어 있다. 과거의 사랑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언급되는 ‘죄 많은 이 청춘’은 어딘가 뜬금없고 불편하다. 그 불편함의 이유가 우리가 묻어두고 주목하지 않으려 한 것을 주목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이 가사를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다.
죄의식은 윤리의 기초이다. 모든 것을 개인의 역할과 책임에서 배제하고 종이나 환경이나 사회나 타자 탓으로 돌릴 때 인간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죄의식은 죄의 산물이 아니고 인간다움, 즉 윤리의 산물이다. 죄를 짓고도 죄의식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죄를 짓지 않고도 죄의식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아니,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죄의식 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청춘고백>의 화자가 무슨 큰 죄를 지어서 이렇게 고해를 하겠는가. 기껏해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홀했거나 마음을 몰라주었거나 잘 대해 주지 못했거나 그래서 연락을 하지 않았거나 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죄 많은 이 청춘’이라고 뉘우치고 있지 않은가.
외로움이라는, 운명과도 같은 인간의 조건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워하게 하고 시들하게 한다. 우리는 외로움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려고 뜨거워지고 또 차가워진다. 그러나 그리움이나 시들함은 나의 그리움이고 나의 시들함이다. 인간의 본성에 따라 그리워하고 시들해 하지만, 그러나 그 그리움과 시들함의 주체는 종이 아니고 인류가 아니고 개인이다.
인간은 본성을 잘 발휘하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고, 도리를 잘 발휘하기 때문에 인간이다. 우리는 조금 더 섬세해야 하는지 모른다. 인간으로 살기가 그래서 어려운 것 아닌가. 바울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덕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이승우
1959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났다.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에리직톤의 초상>이 당선되며 등단했고, 소설집 <구평목씨의 바퀴벌레>, <일식에 대하여>, <미궁에 대한 추측>, <목련공원>,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일기>, 장편소설 <내 안에 또 누가 있나>, <식물들의 사생활>, <생의 이면>, <그곳이 어디든>, <한낮의 시선>, <지상의 노래> 등을 발표했다.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다수의 작품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됐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노벨 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높은 한국작가로 황석영과 함께 언급하기도 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9호(2014년 10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