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나면서 제법 선선해진 느낌이다. 여름 내 지친 몸도 추스를 겸 좋은 고깃집을 찾아 나섰다. 한남동 로터리에 특급 한우만을 내면서 코르키지 차지도 받지 않는 집이 있다고 해서 와인을 들고 당장 달려갔다.
‘한와담’에 들어서니 시멘트벽이 노출된 담백한 인테리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겉치장이 아니라 맛으로 승부를 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마다 설치된 전기레인지 위에는 두툼한 무쇠 불판들이 있었다. 숯불구이가 아니라 돌구이로 스테이크처럼 서빙을 하는 것이었다.
이 집 대표 메뉴인 1++급 안심과 살치살을 주문했다. 21일간 숙성했다는 고기는 마블링을 따지지 않아도 될 만큼 한눈에 봐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선홍색이었다.
한와담에선 벨트에 권총 대신 적외선 온도계를 차고 다니는 웨이터가 직접 고기를 구워준다. 불판이 제대로 달궈졌는지 확인한 뒤 고기를 올리자 지글지글 익는 소리부터 침이 고이게 했다. 센 불에 빠르게 구워내기에 고기는 육즙이 풍부했다.
먼저 안심부터 한 점 입에 넣었다. 전혀 질기지 않고 아주 부드러운 고기는 담백하면서 느끼하지 않은 맛으로 다가왔다. 살짝 달착지근하고 적절하게 고소한 게 입안을 즐겁게 했다.
좋은 안주엔 좋은 와인을 곁들여야 제법.
먼저 산타헬레나의 아이콘 와인 돈(D,O,N)을 땄다. 칠레 콜차구아 밸리에 헌정하는 의미에서 ‘고귀한 원산지에서 탄생했다(De Origen Noble)’는 이름을 단 와인에선 신선하면서도 우아한 과일향이 코를 찔렀다. 한 모금 머금자 풍부한 타닌과 향신료 향이 풍기는 와인이 입안을 개운하게 씻어줬다. 그 뒤로 짙은 느낌을 줄 정도로 농익은 과일향과 쁘띠베르도 특유의 부드럽고 우아한 캐러멜과 너트향이 목구멍 깊은 곳까지 긴 여운을 남겼다.
이어 두툼한 살치살이 구워졌다. 한 조각 입에 물자 툭 터져 나온 풍부한 육즙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달콤하면서도 고소하고 그윽한 육미가 오래 이어졌다. 다른 곳에서 만나기 힘든 풍부한 육즙이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막 구운 고기를 안데스 소금에 찍어 먹는 것도 별미였다. 왕소금처럼 굵지만 염도가 낮아서인지 짭짤하다는 느낌보다는 고기의 단맛을 살려주는 것 같았다. 유자청을 넣은 파절이는 파향과 상큼한 유자의 맛이 어우러지며 고기 맛을 돋웠다.
이번엔 칠레의 떠오르는 아이콘 와인 쿠지노마쿨 로타를 따랐다. 짙은 심홍색 와인에선 살짝 구운 듯한 삼나무와 향신료 향에 섞여 신선한 과일향이 다가왔다. 한 모금 입에 넣자 부드럽게 녹아들었지만 중후한 느낌의 정도로 묵직한 타닌이 입안 곳곳을 자극하며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 잘 익은 과일과 살짝 산미가 느껴지는 향신료 향이 다시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올라 긴 여운을 남겼다.
좋은 와인을 곁들이니 고기는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와인이 남아 구워 먹는 임실치즈를 시켰다. 불판에 구운 치즈는 노릇노릇하고 말랑하게 익어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았다. 살짝 달착지근하면서 아주 고소한 게 ‘임실치즈에 이런 멋도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가심을 겸해 한우깍두기볶음밥을 주문했다. 고기를 구운 불판에서 익어가는 볶음밥은 구수한 고기와 매콤하고 상큼한 깍두기 맛이 어우러져 별미로 다가왔다.
좋은 고기와 좋은 와인 덕에 하루가 행복하게 끝났다.
한와담은
특급 한우와 와인, 이야기의 조화를 내세우는 집. 단순한 인테리어부터 편안함을 강조한다. 식탁을 유로피안 스타일로 조밀하게 배치했지만 이웃 좌석과 부딪치지는 않는다.
생산자 이름을 매일 내거는 쇠고기는 21일간 잘 숙성된 것만 낸다. 안심 등심 3만 3000원, 1++ 특수부위 3만9000원, 1++ 살치살 4만6000원. 차돌 깍두기볶음밥 1만 2000원, 구워먹는 임실 치즈 1만원.
점심은 육회비빔밥 1만원, 차돌밥 된장찌개 1만원, 한우된장찌개 6000원, 한우 깍두기 볶음밥 8000원. 휴일은 고기만 판매한다. 코르키지 차지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구하느라 고생하지 말라고 와인도 저렴하게 판다.
영업은 매일 오전 11시 20분부터 오후 3시, 오후 5시부터 11시 30분까지, 마지막 오더는 오후 11시.
명절 당일만 쉬고 휴일 없이 영업을 한다.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에도 같은 값을 고수하는 착한 식장이다. 예약은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