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에 1억420만달러에 낙찰돼 당시에 경매사상 최고가를 찍었던 피카소의 ‘파이프를 문 소년’.
미국의 유명한 귀족인 존 헤이 휘트니 집안의 컬렉션이라 더 높은 값에 팔릴 수 있었다.
작년에 국내 미술시장에서 대미를 장식한 화제는 단연 ‘전두환 전 대통령 컬렉션 경매’였다. 전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환수를 위해 압수한 미술품 중 우선 201점이 지난 12월 중순에 K옥션과 서울옥션에서 각각 경매에 붙여 두 번 다 100% 완판을 기록했다. 두 경매회사의 현장 경매에서 팔린 201점에 대한 낙찰 총액은 53억4000만원으로, 두 경매회사가 예측한 액수를 넘어섰다.
특히 이번 경매에는 그동안 한 번도 경매에 와보지 않았던 새로운 손님들이 많은 문의를 했다고 한다. 그 결과, 경매현장은 손님들과 취재진들로 발 디딜 틈없이 북적댔다. 서울옥션 경매에서는 하이라이트 작품이었던 겸재 정선의 ‘계상아회도’(溪上雅會圖, 2억3000만원)와 이대원의 ‘농원’(캔버스에 유화, 1987, 6억6000만원)이 경매회사 측에서 매긴 추정가 범위의 높은 선을 벗어날 정도로 비싼 가격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 경매가 특히 눈에 띄었던 이유는 작년 국내 미술시장이 최악이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작년 1년간 국내 주요 경매회사 8개에서 낙찰된 미술작품의 총액은 710억원이었다. 2007년의 1900억원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낮았고, 바로 1년 전인 2012년의 891억원, 2011년의 810억원보다도 낮은 금액이다. 한마디로 최근 10년 중에 가장 장사가 안 됐던 한 해였다. 국내외 크고 작은 경매회사 8개가 했던 경매를 총 합친 평균 낙찰률은 63.4%로, 1년 전의 63.8%보다도 낮았다. 그런데 유독 작년의 마지막에 열렸던 전두환 전 대통령 컬렉션 경매만 100% 낙찰을 기록했고, 추정가보다 높게 낙찰된 작품도 여럿 나왔다. 이유는? 당연히 ‘전두환’이라는 이름값 덕분이다.
작년 12월 전두환 컬렉션 경매에서 6억6000만원에 팔린 이대원의 ‘농원’. 서울옥션 제공
그림 매매 때 제일 중요한 건 ‘소장기록’
미술품을 사고 팔 때 따져봐야 할 것은 많지만, 그 중 제일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소장기록(Provenance)’를 택하겠다. 어디에서 처음에 나와 누구누구를 거쳐 누구 손에 있었는가 하는 게 소장기록이다. 쉽게 말해 ‘그림의 족보’같은 것이다. 특히 처음에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보여주는 ‘출신’과, 최종적으로 작품을 팔려고 내놓은 위탁자(Consigner), 즉 가장 최근에 그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던 사람이 중요하다. ‘진품 보증서’는 종이 한 장 위조하면 그만이지만, 작품의 역사와 작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계보를 위조하기는 쉽지 않다.
또 소장자가 유명한 컬렉터나 딜러라면 실제 그림의 가치에 프리미엄이 붙기 때문에 소장기록은 중요하다. 진품 보증서보다 더 확실한 보증서가 될 수 있고, 그런 뛰어난 컬렉터나 딜러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곧 ‘소장할 만한 작품’이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같은 경우 비록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소장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손에 있었다는 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갔든 진품이라는 것은 안심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 최고가에 팔린 이대원의 ‘농원’ 같은 경우, 전두환 전 대통령의 거실에 걸려 있던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어 신뢰감을 더했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작품을 경매할 때 경매회사는 당연히 그 소장자의 집에 걸려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사진을 최대한 찾아내 공개한다.
전두환컬렉션 경매 현장
해외 기록 작품 대부분 ‘로열 소장기록’
해외 미술시장에서 기록을 깨며 팔렸던 작품들도 비싼 비결을 알고 보면 대부분은 ‘소장자’의 이름값이 큰 역할을 했다.
2004년에 뉴욕 소더비에서 1억420만달러에 팔려 당시로서 경매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던 피카소의 ‘파이프를 문 소년(Boy with a Pipe, 1905)’은 ‘로열 소장기록’의 덕을 본 좋은 예다. 이 작품은 이른바 ‘장미 시대’라 불리는 피카소의 절정기인 1905년에 그려진 그림으로, 피카소가 파리의 예술가 동네인 몽마르트에서 자주 보던 한 가난한 소년의 초상이다.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이 그림 자체로도 갖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이 그림을 평생 갖고 있었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더 탐이 나게 마련이다. 이 그림은 미국의 정계와 문화예술계에 유명한 귀족이었던 존 헤이 휘트니(John Hay Whitney) 부부가 갖고 있었던 그림이다. 존 휘트니의 고모였던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는 바로 뉴욕의 미국 현대미술 전문미술관인 휘트니 미술관을 세운 사람이다. 20세기 초반에 미국 현대미술 작가들을 후원하고 작품을 샀던 유명한 컬렉터다. 존 휘트니의 외갓집도 대단했다. 외할아버지는 링컨 대통령의 비서를 지낸 외교관으로 주영 대사를 지냈다.
이렇게 로열 배경에서 나고 자란 존 휘트니는 결혼한 뒤 아내 베시와 함께 방대한 미술 컬렉션을 만들어갔다. 피카소, 세잔, 드가, 르누아르, 마네, 고갱, 반 고흐 등 유럽 근대미술의 대가들의 주요 작품을 모아 그의 집이 미술관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컬렉션을 갖추고 살았다.
그리고 존 헤이 휘트니 부부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의 문화기관, 의료기관 등에 기부하고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미술관의 재단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자신들의 재산으로 존 헤이 휘트니 재단을 만들어 미국의 각종 문화 교육 사업을 지원하였다.
이렇게 정계, 문화예술계에 유명했던 이들 부부는 1950년 스위스에서 3만달러에 피카소의 ‘파이프를 문 소년’을 샀다고 한다. 나중에 그림을 팔 때인 2004년의 가치로 환산해도 22만9000달러 정도밖에 안되는 돈이었다.
이 부부가 모두 죽고 난 뒤 이 그림은 ‘휘트니 재단’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재단은 2005년에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그림을 경매에 내놓았다. 당연히 이 그림은 휘트니 부부의 이름값을 하며 1억400만달러에 낙찰돼 당시로서 미술경매 역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휘트니 부부가 갖고 있었던 그림 중 또 하나 유명한 게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1876)다. 파리의 유명한 무도회장이었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평범한 일요일 오후 풍경을 그린 유명한 그림이다. 같은 제목에 거의 똑같은 이미지로 사이즈만 더 큰 그림이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르누아르의 대표작이기 때문에 누구의 눈에나 익숙한 그림이다. 르누아르는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소재로 두 점을 그렸는데, 하나는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돼 있고, 하나는 휘트니 부부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휘트니 부부가 소장했던 그 작품이 1990년에 뉴욕 소더비 경매에 나왔다. 당연히 7810달러라는 초고가에 팔렸다. 오르세 미술관에 같은 제목의 비슷한 그림이 있다는 점과 르누아르의 대표작이라는 것도 이유가 됐지만, 소장자가 휘트니 부부였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다.
작년 12월 전두환 컬렉션 경매에서 2억3000만원에 팔린 겸재정선
의 ‘계상아회도’. 서울옥션 제공
라스베이거스의 Wynn 등 현대의 유명 컬렉터
현대에 와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 컬렉터가 가지고 있던 그림은 프리미엄이 붙는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호텔계의 내로라는 갑부 스티브 윈(Steve Wynn, 1942~)이 그런 대표적인 컬렉터인데, 그가 가지고 있었던 피카소의 ‘꿈’이 1억5500만 달러에 팔린 사실이 작년에 알려져 세계 미술시장이 들썩이기도 했다.
스티브 윈은 2012년 기준으로 순자산이 25억달러, 세계부자 491위이며, 권위 있는 국제 잡지인 ‘아트뉴스’가 선정하는 세계 컬렉터 200위 안에 매년 어김없이 들어가는 사람이다. 라스베이거스에 리조트를 여러채 소유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는 마카오에도 호텔을 지어 동서양을 오가며 카지노 업계를 주무르고 있다.
그런 윈은 피카소가 28세 연하 애인을 그린 1932년 초상화인 ‘꿈’을 사서 라스베이거스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리조트인 ‘윈 라스베이거스 리조트’에 걸어 두고 있었다. 이 그림을 둘러싸고 숱한 사건과 이야기도 많았다. 그러니 이 그림의 가치에는 프리미엄이 몇 배로 붙은 게 당연하다.
이렇듯 작품을 누가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소장기록’은 그림 자체의 가치 못지않게 중요하다. 심지어 어떤 때는 그림 자체의 질이나 보존상태가 좀 떨어져도 소장기록이 훌륭하다는 이유로 고가에 판매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림 소장자에 대해 색안경을 쓰고 보는 문화 때문에 위탁자의 신분을 거의 공개하지 못하지만, 우리와 문화가 다른 미국과 유럽의 경매회사들은 가능한 한 ‘누구의 컬렉션’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공개하고 홍보한다.
이규현 대표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뉴욕 크리스티 경매회사 대학원에서 연수했으며 뉴욕 포댐 경영대학원 MBA를 졸업했다. 미술담당 기자를 거쳐 현재 아트마케팅사인 ‘이앤아트’ 대표를 맡고 있다. ‘그림쇼핑1·2’, ‘안녕하세요? 예술가씨!’ ‘미술경매이야기’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