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점점 높아지는 때라 좋은 술과 맛깔난 음식을 곁들여보고 싶었다. 칠레 산타헬레나의 100년 넘은 포도나무에서 딴 포도로 담근 ‘100+’와 ‘베르누스 카비네 쇼비뇽’을 들고 청담동의 한식당 다담을 찾았다.
다담의 김정민 소믈리에는 베르누스와 ‘된장숙성 맥적구이’를, 100+엔 ‘바싹불고기 비빔밥’을 매칭했다. 먼저 돼지 삼겹살 요리인 된장 숙성 맥적구이가 들어왔다. 갓 구운 돼지고기 접시가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수저를 들기도 전에 꼴깍 침이 넘어갔다. 그만큼 당기는 맛이었다.
정재덕 헤드셰프
정재덕 헤드셰프는 된장 소스에 닷새 동안 숙성한 삼겹살을 숯불에 살짝 구워냈다고 설명했다. 된장이 고기의 잡냄새를 잡아줄 뿐 아니라 고기를 부드럽게 해준다고 했다. 이로 인해 느끼하지 않으니 먹기에 좋고 된장으로 기름까지 중화했으니 건강에도 좋을 것 같았다.
한 점을 집어 살짝 씹었다. 잠시 동안 ‘쇠고기보다 돼지고기가 더 감칠맛이 난다’고 했던 고기 마니아들의 얘기가 떠올랐다. 돼지고기가 분명한데 느끼함은 전혀 없고 구수한 게 입에 착 붙었다. 삼겹살인데 물렁물렁하지 않고 쫀득쫀득하다. 첫눈엔 고추장구이처럼 보였는데 그렇게 매운 것도 아니다. 베르누스 카비네 쇼비뇽을 따랐다. 상큼한 과일향이 먼저 다가왔다. 한 모금 입안에 머금으니 풍부한 과일의 풍미가 입안에 가득하다. 다시 고기로 손이 갔다. 고기의 맛이 와인의 풍미를 누르지 않고 와인의 맛이 고기 맛을 거스르지도 않았다.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니 입안이 즐거워졌다. 아직은 영한 느낌을 주는 베르누스의 신선하면서도 살짝 달콤한 과일의 향이 입안에 가득 찼다. 이 정도 맛이라면 남녀가 함께 즐기더라도 양쪽 모두 좋은 점수를 줄 것 같다.
김정민 소믈리에는 “베르누스는 과실향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탄닌과 발랄한 산미를 가지고 있어 맥적구이와 매칭했다. 된장의 향과 베르누스의 과실향이 어우러져 한층 상쾌한 느낌을 준다. 베르누스의 적당한 탄닌과 발랄한 산미가 맥적구이의 기름기를 잡아주며 담백한 맛과 어울려 한층 우아한 느낌을 만들어 낸다”고 이유를 소개했다.
이어 놋그릇에 담긴 바싹불고기 비빔밥이 나왔다. 고명으로 얹은 제비꽃이 먼저 눈을 즐겁게 했다. 그릇엔 백만송이 버섯을 비롯해 팽이버섯, 표고 등 갖은 버섯에 쇠고기볶음, 무채, 무순 등 각종 야채와 청포묵 계란고명 등이 가득했다. 고추장이나 약고추장을 주로 쓰는 우리네 비빔밥과 달리 간장으로 비빈다는 게 특이했다. 그런데 내온 간장이 장난이 아니다. 보기엔 약간 건 듯해 그저 장 담그기 귀찮아 사다 쓰는 양조간장 같아 보였으나 향긋한 냄새가 났다. 살짝 찍어 맛을 보니 ‘오호라’ 이게 감칠맛이 보통이 아니다. 그 간장 하나만으로도 밥 한 공기는 거뜬히 해낼 것 같다. 정재덕 셰프는 갖은 재료를 넣어 맛간장을 뽑은 뒤 살짝 끓여 농축했다고 했다.
고추장을 쓰면 재료의 맛이 죽기 때문에 각각의 맛을 살리려고 간장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잘 버무린 밥을 한술 입에 무니 먼저 그윽한 버섯향이 살짝 고소하면서도 맛난 들기름 냄새에 실려 다가왔다. 쇠고기볶음은 달착지근하고 무순은 쌉쌀하고 표고는 특유의 그윽한 향을 뿜어냈다. 기름이 고소하면서도 다른 재료들을 누르지 않고 잘 어울리는 게 신기했다. 저절로 입이 즐거워졌다.
온갖 재료가 섞인 오묘한 맛을 느끼며 ‘100+’를 잔에 따랐다. 강인한 산도에 실린 오크와 산초의 아로마가 코끝을 찌른다. 100년 이상 된 포도나무 수령이 마시기 전부터 느껴졌다. 한 모금 마시니 오래 묵은 나무 특유의 응축된 과일향에 실려 산초 등 향신료의 느낌이 전해진다. 탄닌은 부드럽게 녹아들었고 오크향도 매끄럽게 다듬어졌지만 두드러진 산도 덕분에 강인함이 느껴졌다.
아직 숙성이 덜 됐지만 비빔밥에 들어간 버섯의 송이향이나 바싹불고기의 달착지근하면서도 고소한 맛 등 온갖 재료의 맛에 오묘함을 더해주는 것 같다.
주문한 식단이 단출하다고 여겼는지 정재덕 셰프가 불고기를 추가로 내왔다. 잘 다져 재웠던 불고기를 숯불에 구웠다는데 숯냄새가 고기의 느끼함을 덜어주고 살짝 곁들인 다진 파의 향과 조화를 이뤘다. 구수한 음식이 와인을 당기게 하고, 한잔 와인이 다시 입맛을 돌게 했다.
김정민 소믈리에는 “‘100+’는 붉은 과실향과 향신료향이 강하며, 집중도가 좋고 맛과 향의 밸런스가 매우 훌륭하다. 바싹불고기 비빔밥의 야채들과 어우러져 묵직한 와인을 한층 편안하게 만들어주며, 불고기의 숯불냄새와 ‘100+’의 오크향이 매우 잘 어우러지는 마리아주다”라고 설명했다.
밑반찬으로 약간의 김치와 비름나물 한줌, 땅콩조림, 물김치 등이 나왔다. 상큼한 김치와 독특한 맛의 비름나물도 입맛을 돋게 했고 고추를 얹어낸 물김치는 입을 개운하게 만들었다.
다담은
강남 청담동에 있는 CJ엔시티가 운영하는 정통 한식당이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한식당인지라 깔끔함과 서비스 매너, 발레파킹 등 기본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전통주나 와인도 고루 비치해 외국 바이어나 격식을 갖춰야 하는 손님을 모시기에 제격이다. 그렇지만 맛까지 규격화했다고 지레짐작해선 곤란하다. 6성급 호텔 조리장 출신의 사찰음식 명인인 정재덕 헤드셰프는 젊지만 재료의 특성을 잘 살려내는 솜씨를 가졌다. <채식이 맛있어지는 우리집 사찰음식> 이란 사찰음식 전문 책까지 낸 그의 손을 거쳐 나온 음식들은 하나같이 정갈하면서도 자연의 맛이 묻어나온다. 조미료를 넣지 않고 천연재료로 맛을 내는 음식들은 심심한 것 같으면서도 구미를 당기게 하고, 담백한 듯하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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