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A씨(34)는 부인과 맞벌이를 하면서 1년에 1억원 가까운 돈을 벌지만, 웬만한 일에는 큰돈을 쓰지 않는다. 경기회복 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최대한의 ‘유동자금’을 확보해두자는 전략을 세웠기 때문.
하지만 모든 것에 지갑을 닫고 있는 건 아니다. 부인과 함께 호텔 뷔페나 식당에서 주말에 호사스러운 저녁 한 끼를 먹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모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된 조미료 안 쓰는 맛집을 찾아 주말에 서울에서 울산까지 차를 몰고 다녀오기도 한다. 식품도 항상 유기농 새싹채소 등을 비싼 돈을 주고라도 구입해 먹는다. 음료 하나를 마실 때에도 영양성분과 원산지를 따지는 것은 물론이다. ‘미각 사치족’을 넘어선 전형적인 ‘헬프족(healp, Healthy+Premium food)’ 부부다.
갤러리아 고메이 494
불황의 역설 고급식료품 전성시대
지난해 식음료 업계 키워드는 ‘미각 사치족’이었다. 미각 사치족이란 옷이나 자동차, 전자제품 등 돈이 많이 들어가는 다른 부분에 대한 소비는 아끼면서도 최소의 비용으로 가장 큰 호사스러움을 누릴 수 있는 식품과 외식에는 지갑을 여는 사람들이다. 상위 1%가 타는 고급 외제 승용차를 살 수도 없고, 고가 명품에 돈을 쓰기는 어렵지만 먹는 것 만큼은 최상류층과 비슷한 수준의 소비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장기화하는 불황은 ‘미각 사치족’을 낳았고, 여전히 계속되는 웰빙열풍은 미각 사치족을 ‘헬프족’으로 진화시켰다. 헬프족은 제품 원산지와 영양성분은 물론 제조회사, 포장 재질까지 꼼꼼히 확인하며 건강에 좋은 제품만 구입한다. 미각 사치족처럼 좋은 음식에 돈을 아끼지 않는 과감함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무엇이 좋은 음식인지는 아주 까다롭게 따지는 소비성향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LG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소비자 라이프스타일’ 보고서에 따르면 ‘먹는 데에 쓰는 돈은 아깝지 않다’는 소비자 답변의 비율은 30대에서 47.8%, 40대에서 44.1%로 절반 가까이 됐다. 또 10~50대의 51%가 식료품을 살 때 원산지나 첨가물을 확인하고 구입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20대의 50%는 건강을 위해 비싸더라도 친환경, 유기농 식품을 사먹는 것으로 분석됐다.
지난 연말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가 발표한 ‘2013년 트렌드 전망’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나타났다. 올해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을 지배할 키워드 중 하나로 ‘날것’을 의미하는 로(Raw)와 ‘유기농’을 의미하는 오가닉(Organic)의 합성어인 ‘로가닉’을 꼽은 것. 이는 소비자들 사이에 건강한 식문화를 추구하는 소비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 같은 헬프족의 등장은 유통업체와 식품·외식업체들의 전략도 크게 바꿔놓고 있다.
유통업체 식품관 고급화
‘헬프족’의 등장에 따른 소비자들의 행태 변화에 가장 먼저 대응한 건 역시 대형 유통업체들이었다. 최근 발표된 여신금융협회의 카드승인 실적을 보면 백화점 이용액은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하지만 고급 식품 관련 매출은 두 자릿수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불황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롯데백화점의 친환경 식품관 푸름, 올가 등은 지난 한 해 각각 17.0%, 16.6% 의 높은 신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초 식품관을 대대적으로 리뉴얼한 이후 롯데백화점 본점 식품관 매출은 25%, 잠실점, 분당점은 각각 28%, 21% 신장으로, 모두 20% 이상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 중이다. 또 지난해 10월부터 힐링 개념을 도입한 농산물 코너를 마련해 본점 지하 1층 식품관에 석류, 삼채 등 힐링 푸드로 인기를 끌고 있는 채소들을 한데 모아 판매하고 있다. 힐링 코너에서 판매되는 제품은 기존 제품 위치에 있을 때보다 20% 이상 판매되는 것은 물론 고객들의 관심과 문의가 많아 고객 집객 효과까지 누리고 있다는 게 백화점측 설명이다. 롯데백화점은 이같은 여세를 몰아 조만간 ‘고급 수입과일’을 모아 파는 코너를 별도로 만들기로 했다.
청담동에 프리미엄 식품관 SSG를 오픈한 신세계 백화점 역시 개점 6개월 만에 평일은 하루 1500명, 주말은 2000여명이 꾸준히 방문할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강남뿐 아니라 노원·상계 등 강북지역에서 찾아오는 고객도 많다는 게 신세계 측 분석이다. 정용진 부회장이 2년 넘게 공을 들여 선보인 프리미엄 식품관인 SSG 마켓은 당일 새벽 배송된 신선한 농축수산물부터 쉽게 접하기 어려운 열대과일, 200여 가지 종류의 소금, 국내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올리브 오일, 600여 종의 와인 등 차별화된 상품군을 보유하고 있다. 인기에 힘입어 지난 1월에는 광주 신세계 백화점 안에 매장을 추가로 개장하기도 했다. 갤러리아의 프리미엄 식품관 고메이494는 지난해 10월 5일 오픈 이후 강남 일대 주부와 젊은이들 사이에서 꼭 거쳐야 할 맛집 집결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SSG 푸드마켓이 백화점 식품의 고급화 전략에 주력했다면, 고메이494는 고급 식재료에 레스토랑 형태까지 갖춘 그로서란트(Grocerant, Grocery와 Restaurant의 합성어) 콘셉트다. 마켓에서 구입한 신선한 재료를 즉석에서 세척, 손질, 포장해주고 간식용 채소를 즉석 조리해 판매하는 컷 앤 베이크(Cut&Bake) 코너를 마련해 인기를 끌고 있다.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식품관의 경우도 불황기에도 꾸준하게 두 자릿수 이상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백화점 업계에서는 식품관 단골 고객이 백화점을 한 번 방문했을 때 쓰는 총 구매 금액이 식품관을 찾지 않는 고객의 2배 이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신세계 백화점에 따르면 백화점 전체 매출 중 식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18.4%, 2010년 19.2%에서 지난해에는 22.3%로 지난 5년간 4% 이상 늘었다.
지난해 8월 말 여의도 IFC몰에 개점한 CJ ‘올리브마켓’은 프리미엄 식품관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곳이다. CJ의 각종 가공식품 일체를 판매하는 데다 과일, 유기농 식품 등 각종 먹거리와 식사대용 샐러드, 수제 소시지, 도시락 등 8개의 델리 매장까지 갖추고 있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즉석에서 요리 과정을 지켜보고 바로 앉아 먹을 수 있게 한 콘셉트로 업계 주요 모델인 미국 ‘홀푸드마켓’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각 사치족이자 헬프족을 자처하는 소비자들을 잡기 위해 대한민국 전 유통업체가 총성 없는 전쟁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사진) 신세계 SSG 푸드마켓
업계 ‘헬프족 잡기’에 사활 걸다
외식업체나 카페 등도 헬프족 잡기에 나선 상황이다. 과일음료를 파는 ‘스무디킹’은 딸기가 들어가는 모든 스무디 제품에 캘리포니아산 ‘까마로사(Camarosa)’ 딸기만을 사용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는 일조량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며 비옥한 토양과 적절한 강수량으로 전 세계적으로 과일 재배의 최적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재배되는 ‘까마로사(Camarosa)’ 딸기는 캘리포니아주립대(UC)에서 연구개발해 길러낸 최상급 품종으로 알이 크고 단단해 당도가 높고 과즙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며, 비타민C 함량 또한 높다. 원산지와 영양소 함량을 따지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는 당연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게 스무디킹 관계자의 전언이다. 스무디킹은 캘리포니아산 까마로사 딸기 외에도 발렌시아 오렌지, 카벤디쉬 바나나 등 최적의 장소에서 수확한 당도 높은 최고 품질의 신선한 과일만을 사용하고 있다. 보관상태도 신경 쓰는 게 최근 소비자들의 추세이다 보니 ‘최상의 상태’ 역시 업계의 화두다. 스무디킹 관계자는 “바나나의 경우 수확된 바나나를 바로 사용하게 되면 바나나 특유의 떫은 맛이 그대로 남게 되는 맛의 특성이 있어 일정 기간 숙성시킨 후 적정 당도 기준에 도달한 바나나만을 선별해 스무디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까다로운 원재료 사용 기준 때문에 관리가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지만 과일이 가지고 있는 최상의 맛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소비자들은 곧바로 외면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글로벌 커피체인인 스타벅스코리아 역시 마찬가지다. ‘Take time only for you’ 라는 캠페인 아래 제주산 유기농 인증 녹차가루로 만든 음료를 선보이고 있다. 이 음료에 사용된 녹차는 유기농 재배와 과학적 관리, 녹차의 수색, 형상, 향기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제품으로, 국립 농산물 품질관리원의 까다롭고 엄격한 인증 절차를 거친 것만 사용한다. 스타벅스는 이 같은 프리미엄급 녹차를 사용해 ‘두유 그린티라떼’와 ‘에스프레소 샷 그린티라떼’ 2종을 출시해 소비자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단순히 예전처럼 ‘스타벅스’라는 브랜드만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