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14년. 가수로서 일찌감치 ‘톱’의 지위를 얻은 아이유(29·본명 이지은)가 진짜 자신의 이름으로 또 하나의 즐거운 도전을 시작했다. 이미 TV 드라마를 통해 11년째 시청자를 만나고 있는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로 발을 넓혀 한계 없는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이지은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브로커>를 통해 스크린의 신레렐라로 떠올랐다. <브로커>는 베이비 박스를 둘러싸고 관계를 맺게 된 이들의 예기치 못한 특별한 여정을 그린 영화. 송강호, 강동원, 배두나 등 톱스타 배우들의 캐스팅에 이지은의 합류로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던 이 영화는 제 75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정돼 전 세계인들 앞에서 첫 공개됐는가 하면, 송강호에게 한국 남자 배우 최초의 남우주연상을 선사하며 올해 칸 영화제의 핵심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이지은의 극 중 활약은 결코 미미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를 베이비 박스 앞에 두고 갔다가 다시 찾아온 미혼모 소영 역을 맡아 극을 이끌어갔다.
대중에겐 일단 이지은의 극 중 캐릭터 자체가 신선했다. <드림하이>(2011), <최고다 이순신>(2013),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2014), <프로듀사>(2015) 등 여러 작품에서 결이 다른 인물을 소화했던 그가, 물론 <나의 아저씨>(2018)에선 극단적인 환경에 놓인 사회 초년생 이지안을 불안한 눈빛으로 탁월하게 소화해냈다곤 하지만, <브로커>에서의 미혼모 설정은 (혹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파격 그 자체였다.
▶“고레에다 감독의 디렉팅 연기에 큰 도움”
이지은을 캐스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나의 아저씨> 속 아이유의 연기에 반해 출연을 제안했다고 밝혔고, 이지은은 자신이 해냈던 연기를 배신하지 않는 깊이 있는 연기로 <브로커>의 한 축을 제대로 담당했다.
“감정을 내보이는 연기보단 속으로 삭히며 표현하는 게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실제 성향이 그런 면이 있거든요. 그런 ‘결’을 좋게 봐주신 덕분에 <나의 아저씨>에 이어 <브로커>까지 영광스러운 기회를 얻게 됐다고 생각해요. 감사하고 또 감사하죠.”
이지은은 “감독님의 전작들을 워낙 감명 깊게 봤었고, 평소 존경하는 배두나 선배님의 응원에 (출연할) 용기를 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설정이 많아 두렵고 어려웠지만,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감정의 영역이 가장 크게 와 닿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임했다”고 설명했다.
극 중 자신이 맡은 인물의 인생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연기하는 것 또한 만만치 않았을 일이다. 때문에 이지은은 충분히 고뇌하고, 인물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연기에 임했다.
“소영이는 미혼모이기도 하고 우성이 엄마이기도 하면서, 어렵고 무거운 과거사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 한 부분에 꽂히지 않았어요. 모든 장면에서 엄마처럼만 보이고 싶진 않았고, 무념무상의 표정을 짓는 하나의 청춘으로 보이고 싶었어요. 또 어떤 감정으로는 동수를 바라볼 때 여자처럼 해야 하고. 주어진 과제가 엄청 많았죠.”
아이유는 이어 “당연히 그 과정에서 미혼모라는 설정이 저에게 크게 작용했다. 사회적 시선에 대해 화를 내는 것도 있었고, 생각하느라 바빴던 시간이었다”고 작품에 임한 수많은 시간을 떠올렸다.
“영화를 찍으면서 미혼모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걸 스스로 느꼈어요. 제가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니까 표현할 때 자기 연민처럼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소영이는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인물은 아니거든요. 단호한 결정도 하고,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는 인물이라, 혹시 제가 갖는 연민 때문에 소영이가 흐려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한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에게, 인물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 뒤엔 사실 어떤 ‘계산’은 필요치 않았다. 기술적인 게 아닌, 마음으로 이미 자신이 맡은 인물이 된 그는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브로커> 속 인물로 통했다.
하지만 영화라는 작업이란, 외톨이 작업이 아닌 1부터 100까지 앙상블을 통해 이뤄지는 일 아닌가. 아직은 영화가 낯선 그에게, 송강호, 강동원, 배두나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고레에다 감독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 모든 게 이지은에게 피와 살이 됐다. 특히 고레에다 감독의 디렉팅은 속을 알 수 없는 소영을 연기하는 이지은에게 큰 도움이 됐다. 이지은은 “감독님은 ‘확실하게 드러나는 연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감독님께 끊임없이 질문했다. 대본에 나와 있지 않은 소영의 마음이 어땠는지”라며 말을 이어갔다.
“시나리오 행간을 보며 ‘소영이는 왜 이런 상황에 몰리고, 이런 선택을 하고 후회한 순간이 있나요?’ ‘어떤 때가 가장 힘들었나요?’라고 물어봤죠.” 그렇게 감독의 디렉팅을 고스란히 받은, 이지은의 소영이 탄생하게 됐다.
영화는 빚에 허덕이는 세탁소 사장 상현(송강호 분)과 보육원 출신의 동수(강동원 분)가 아기를 몰래 데려가지만, 이튿날 소영이 다시 아기를 찾으러 왔다가 경찰에 신고하려 하면서 이들과 엮인다. 상현과 동수는 아기를 제대로 키울 적임자를 찾으려고 했다고 변명하고, 소영은 그 여정에 동행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형사 수진(배두나 분)과 이 형사(이주영 분)가 이들의 뒤를 쫓으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송강호, 강동원 등 배우들과의 호흡에 대해서는 “신기했다”며 눈을 반짝였다. “송강호 선배님과 연기할 때는 진짜 신기했어요. 선배님과 마주하는 신을 하기 전에는 정말 떨리거든요. 그런데 슛을 하면 안 떨려요. 그건 선배님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상대방이) 몰입하고 집중하게 만들어주시죠. 영화를 보면서, 1년 전의 기억이니까 ‘내가 저 때 편하게 했다’ 싶었는데 그런 장면마다 송강호 선배님이 있더라고요. 모든 경험이 신기하고 아직까지 제가 겪은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극 중 동수로 완벽하게 빙의한 강동원 역시 이지은이 오롯이 소영으로 보일 수 있게 해준 든든한 파트너였다.
“소영이 동수와 싸우고 속 깊은 이야기를 처음 나누는 관람차 신이 있는데, 그때가 두 사람의 관계 변화 지점이었거든요. 그건 (강동원) 선배님이기 때문에 납득이 가는 순간이에요. 강동원 선배님은 특유의 선한 기운이 있어요. 작위적인 느낌이 없죠. 강동원 선배님이 동수여서 제가 참 많이 덕을 봤습니다.”
영화 현장을 넘어, 칸영화제까지 동행하면서 선배들과 나눈 정은 이지은에게 따스한 햇살이 됐다. 여기에 고레에다 감독의 인품은 화룡점정이었다고. 그는 “감독님은 얼마나 관용적이고 인간에 대한 깊이가 있는 사람일까 하는 팬으로서의 환상이 있었는데, 작업하고 나서도 이 환상이 깨지지 않았다”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촬영 내내 감독님께 대본 외의 표현을 못 했는데, 정말 감동받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브로커>를 통해 강렬한 눈도장을 찍은 이지은에게, <브로커>는 ‘초심자의 행운’ 같은 작품이란다. “데뷔작이니까 오래오래 기억이 남을 것 같아요. 촬영하는 내내 ‘모든 현장이 이렇게 엄격하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걸 디폴트(초기값)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초심자의 행운같이 제가 첫 작품으로 <브로커>에 참여하면서 받은 배려나 행운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브로커>엔 왼쪽부터 강동원, 이지은, 송강호가 출연했다.
▶아이유와 이지은, 따로 또 같이 흘러갈 것
아이유는 이어 “혹시 (<브로커>가) 내 운의 전부일 거라고 생각해도 너무 큰 행운이어서 경험해본 것만으로도 좋았다”며 “그런 운을 받았던 사람이니까 진심으로 훨씬 더 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미소 지었다. 연기를 시작한 지 어느덧 11년. 가수로서 쌓아온 커리어가 워낙 화끈하기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지은에게 이젠 ‘배우’라는 타이틀도 썩 어울린다.
“데뷔 초반에 내세웠던 이미지가 밝고 명랑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옛날 노래를 할 때마다 ‘슬픈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곤 해요. 제가 노래로 표현해야 하는 게 슬픔인지 외로움인지 쓸쓸함인지 분류할 수 없는 어릴 때 (가수를) 시작해서 그런 부분을 눈여겨보게 돼요. 연예인의 뒷면에 있는 얼굴이라고 생각해서 끌어올리고 싶은 것 같아요.”
가수로서도 한계 없는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변화무쌍한 모습을 선보이고 있는 아이유. 배우 이지은으로서도 마찬가지의 포부를 갖고 있다. 어쩌면 더 과감하고, 디테일한 시도가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연기는 재미있고, 어렵고, 생각할 동력을 줘서 좋아요. 나로만 살면 절대로 건드려지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요. 소영을 연기하기 전까지 미혼모, 엄마, 보육 시설 아이들의 마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날이 없었던 것처럼. 나로만 살면 관성대로 살게 돼요. 그런데 연기를 하면 잠깐이라도 다른 인물이 되니까 그 인물의 삶을 유추하고, 원래의 나라면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생각해서 좋아요.”
아마도 그렇게, 아이유와 이지은의 시간은 함께, 따로 또 같이 흘러갈 터다.
“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일 욕심도 일복도 타고나서 계속 일해야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개인으로는 노력하는 사람이고, 머쓱함도 많은 사람이죠. 사실 상업영화로는 <브로커>가 첫 작품인데 너무 큰 역할을 맡았고, 그건 누군가가 나를 믿어줬기에 가능했던 일이에요. 영화로써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는 신인인데 감독님을 포함해 다른 배우들, 스태프까지 모두가 저를 믿어줬다는 것에 대한 감동이 크게 남을 것 같아요. 그 믿음에 보답하는 연기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오래오래 저를 채찍질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박세연 스타투데이 기자 사진 EDAM엔터테인먼트·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