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패권을 둘러싸고 미국의 ‘중국 때리기’가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중국의 수난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일부에서 중국 기원설을 주장하는 코로나19로 인한 국제사회의 혼란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4월 중국이 국제사회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행사를 개최했다. 바로 ‘아시아판 다보스 포럼’으로 불리는 보아오(博鰲) 포럼이다.
4월 18일부터 22일까지 나흘간 중국 하이난에서 열린 보아오 포럼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국가 지도자급이 참석하는 첫 오프라인 대규모 국제회의였다. 여기서 방점은 ‘오프라인’에 있다. 오프라인으로 개최된 보아오 포럼을 통해 중국은 코로나19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또한 이번 보아오 포럼은 미국에 맞서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우군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전의 현장이었다. 중국의 막강한 경제력과 코로나19 백신을 앞세워 주변국 포섭에 나선 것이다. 보아오 포럼은 형식적으로는 비정부 기구인 보아오 포럼 사무국이 주최하는 행사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중국 정부가 사실상 행사를 주도하며 중국 주도의 국제 여론 형성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이번 보아오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한 이유도 중국의 메시지를 직접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4월 중국 하이난에서 열린 보아오 포럼 개막식에서 동영상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다자주의부터 디지털위안화까지 중국의 목소리 쏟아져
올해 20주년을 맞은 보아오 포럼의 주제는 ‘세계 대변화 국면’이다. 부제는 ‘글로벌 거버넌스와 일대일로(一帶一路) 협력의 강화’였다.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뜻하는 일대일로는 시진핑 주석이 추진하는 중국 대외정책의 핵심이다. 시 주석은 개막식 화상연설에서 “일대일로는 모두 함께 걸어가는 밝고 희망찬 대로이며 일부 국가들에게 속한 좁은 길이 아니다”라면서 “관심 있는 모든 국가는 참여할 수 있고, 함께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시 주석은 미국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신냉전 국제구도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는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냉전과 제로섬 방식의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신냉전과 이념 대립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했다”며 “중국은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헤게모니와 세력 확장 등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 주석은 또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어떠한 지지도 얻지 못할 것”이라며 “우리는 인류 공동 가치관인 평화, 발전, 평등, 정의, 민주주의, 자유를 제창하고 서로 다른 문명 간의 교류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보아오 포럼에서 디지털위안화에 대한 중국 정부의 구체적인 계획도 윤곽을 드러냈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의 리보 부행장은 포럼에서 “디지털위안화의 목표는 시장의 선택을 통해 국제 무역과 투자를 촉진하려는 것”이라며 “더욱 많은 도시를 시범 지역으로 지정해 (디지털위안화) 생태계 시스템을 완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당국은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해외 선수들과 관광객이 디지털위안화를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코로나19 백신과 기후변화를 주제로 글로벌 우군을 확보하려는 중국 정부의 노력도 엿보였다. 백신 자국 우선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미국에 맞서 중국은 백신을 국제사회가 공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다. 시 주석도 코로나19 백신 문제에 대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필요한 백신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연구개발, 생산, 유통에서 국제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각종 세션에서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협력을 통해 파리협정 실행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는 탄소 배출국 세계 1, 2위인 중국과 미국이 손을 맞잡고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보아오 포럼을 대규모 오프라인 행사로 개최하는 것은 코로나19 방역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기 위한 차원도 있다.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자신감 보여준 중국
중국은 지난해 초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보아오 포럼을 취소했었다. 하지만 올해에는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보아오 포럼을 오프라인 행사로 개최했다. 실제 이번 보아오 포럼 행사장에서는 대다수 참석자들이 착용하고 있는 마스크를 제외하면 코로나의 그림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행사장마다 여유 공간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의자들에 참석자들이 꽉 찼다. 20일 열린 개막식에서는 1800명이 메인홀을 가득 메웠다. 18일 저녁 열린 공식 환영행사에서는 100명이 넘는 VIP 인사들이 마스크를 벗은 채 공연관람과 만찬을 즐기기도 했다. 프레스센터는 18개국에서 온 1000여 명의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리바오둥(李保東) 보아오 포럼 비서장은 “40여 명의 전·현직 정부 지도자를 비롯해 국제기구 리더, 경제계 인사, 글로벌 기업 CEO, 전문가그룹 등 60여 개국에서 4000명이 넘는 인원이 이번 보아오 포럼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본토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생산과 소비가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면서 경제도 다시 살아나고 있다. 코로나19에 대한 확실한 통제를 발판삼아 중국의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8.3%를 기록했다. 5월 초 노동절 연휴에는 국내 여행객이 2억3000만 명에 달했다. 이런 자신감이 보아오 포럼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중국 정부도 이번 보아오 포럼 방역에 공을 많이 들였다. 우선 중국 정부는 보아오 포럼이 열리는 충하이시 주민(18~60세)들을 대상으로 코로나19 백신 2회 접종을 4월 초까지 모두 완료했다. 보아오 포럼 사무국은 “보아오 포럼이 열리는 호텔, 식당 등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도 모두 백신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보아오 포럼 참석자들도 참석 전에 2차례 코로나19 핵산검사를 받아야 했다.
▶중국 시장 포기 못하는 글로벌 기업들 대거 참여
미중 갈등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지만 이번 보아오 포럼 참석자 명단에는 미국 유명 기업 CEO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미국 정치권의 거세지는 대중 공세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기업들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보아오 포럼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팀 쿡 애플 CEO,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스티븐 몰런코프 퀄컴 CEO, 팻 겔싱어 인텔 CEO 등이 보아오 포럼 참석자 명단에 포함됐다. 금융계에서는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를 설립한 ‘투자의 전설’ 레이 달리오, 세계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로런스 핑크 회장 등이 이름을 올렸다. 팬데믹 상황인 만큼 온라인 참석 대상이다. 다만 보아오 포럼 측은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사에 참석했는지는 확인해주지 않았다.
중국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는 한국 대기업들도 공을 들였다. 이번 보아오 포럼에서 SK가 영예 전략적 파트너로 참여했다. 수백 개의 글로벌 기업 후원사들 중에 가장 높은 등급에 해당하는 파트너다. 삼성은 영예 전략적 파트너 바로 아래 단계인 전략적 파트너로 활약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개막식에서 온라인 축사도 했다. 최 회장은 연설에서 “중국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와 공동으로 사회적 가치 연구소를 설립했다”고 밝혔다. 그만큼 중국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는 셈이다.
보아오 포럼 행사장에 마련된 기업전시관에서도 SK그룹은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홍보했다. 특이한 점은 다른 기업들은 다들 전시관 외부에 기업 로고를 대대적으로 노출하고 있었지만 SK 전시관에서는 SK 로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전시관에서 만난 중국 SK 관계자는 “기업을 홍보하지 말고 사회적 가치를 홍보하라는 최태원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