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승 특파원의 월스트리트 인사이트] ‘여성 CEO 간판’ IBM 로메티 CEO 퇴임 소식에 美서도 ‘유리천장’ 문제 재조명… 경력관리 불리 여전
장용승 기자
입력 : 2020.03.04 10:43:22
수정 : 2020.03.08 10:38:44
2020년 새해 들어 IBM의 지니 로메티 최고경영자(CEO)의 퇴임 소식이 전해졌다. IBM은 로메티 CEO가 오는 4월 6일 퇴진한다고 지난 1월 30일 밝혔다. 로메티는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22분기 연속 매출 감소를 기록하는 등 진통을 겪어왔다. 신임 CEO로는 클라우드·인지 소프트웨어 사업부 책임자인 인도계 아르빈드 크리슈나가 낙점됐다. 시장에서는 IBM이 이번 인사를 통해 클라우드 시장에서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MS)를 따라잡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분석했다.
로메티 CEO 퇴임 소식은 미국 재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그는 메리 바라 제너럴모터스(GM), 메릴린 휴슨 록히드마틴 등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CEO의 ‘간판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로메티는 2012년 1월 등극한 IBM 사상 첫 여성 CEO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강했다. CNN은 “로메티의 퇴진은 ‘여성 CEO 소수 현상’을 더욱 고착화시킬 것”이라며 “2019년 기준으로 포천 500 기업 중 여성 CEO는 로메티를 포함해 33명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여성 CEO의 간판이었던 로메티가 퇴임하면서 미국 재계에서는 ‘유리천장’ 문제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메리 바라 GM 회장
로메티 퇴임 소식이 전해진 직후인 2월 7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왜 여성 CEO가 소수인가’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보도했다. 대학진학률도 높고, 미국 노동시장에서 대략 절반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정작 CEO 자리에 오르는 여성들은 소수에 그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WSJ가 조사업체 에퀼라(Equilar) 조사를 인용·보도한 바에 따르면 러셀3000 지수에 속한 미국 3000대 기업 중 CEO가 여성인 기업은 2019년 기준으로 167곳(5.57%)에 불과했다.
이는 2010년의 2%보다는 늘어난 것이지만 여전히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수준이라는 분석이다. 아울러 러셀3000 지수에 속한 기업 중 307곳이 지난 1년 동안 새로운 CEO를 임명한 가운데 이 중 오직 26명만 여성이었다. 또 같은 기간 17명의 여성 CEO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메릴린 휴슨 록히드마틴 CEO
여성 CEO가 소수인 주요 원인으로는 ‘경력경로(Career Path)’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분석됐다. 아울러 기업문화 역시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됐다. 우선 ‘경력경로 관리’ 문제와 관련해 여성들의 경우, 최고경영층을 의미하는 ‘C 레벨’로 이어지는 ‘중간 관리자’ 경험을 제대로 쌓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WSJ는 진단했다. 기업의 매출, 영업이익 등 실적과 직결된 핵심 부서의 장(長)을 맡는 중간 관리자는 주로 남성이 채우고 있다는 분석이다. 여성의 경우, 기업 실적과 직결된 부서보다는 주로 인사팀, 행정팀, 법률팀 등에서 경력을 쌓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얘기다. 금융회사 에버코어 웰스매니지먼트의 주웰 빅포드 파트너는 “여성은 테이블에 앉을 수는 있지만 선수로 뛸 수는 없다”고 현실적인 문제를 꼬집었다. 한마디로 경력경로 관리 측면에서 여성이 불리하다는 지적이다.
경력경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다보니 정확한 성과 평가를 토대로 한 승진 사례도 드문 것으로 전해졌다. 예를 들어 ‘이번 인사에서는 리더십팀에 여성이 1~2명 필요하다’라는 식으로 여성 임원을 채우는 사례가 있을 정도라고 WSJ는 보도했다. 채용정보 업체 콘 페리의 제인 스티븐슨 부회장은 “CEO까지 올라가는 여성들의 경우, 이는 운에 따른 것에 가깝다”라며 “(CEO 자리로 올라가기 위한) 지속적인 파이프라인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남성이 여성보다 경력관리 측면에서 회사 선배들의 도움을 더 많이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워킹 마더’ 조사 연구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성 중 50%가량은 중간관리자 역할 등 경력 관리에 조언을 받았다고 응답했지만 여성의 경우 15%에 그쳤다. 이러한 이유로 근무연수가 쌓이더라도 여성이 남성보다 경험할 수 있는 회사 내 경력의 폭이 좁다는 분석이다.
콘 페리의 스티븐슨 부회장은 “여성이 직장인들 사이에서 훈련을 받는다고 하면, 남성은 핵심 사업본부 등 다양한 비즈니스 사이에서 훈련을 받는 격”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헤드헌팅업체가 한 회사의 적합한 CEO를 찾아줄 때도 CEO가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채용 과정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콘 페리가 한 회사에 적합한 여성 CEO를 찾아주는 데는 평균 269일 걸렸다. 이에 비해 남성 CEO 자리를 찾아주는 데는 평균 207일이었다. 그만큼 여성 CEO를 꺼리는 분위기가 팽배해 여성 CEO를 선택하는 데 더 많은 고민을 한다는 의미다. 결국 체계적인 경력경로 관리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분석이다.
지니 로메티 IBM 최고경영자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초콜릿 회사 허쉬가 모범사례로 꼽힌다. 허쉬의 미셸 벅 CEO는 회사의 전략적인 인력 개발 프로그램에 힘입어 최고직 자리까지 오른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2005년 마케팅 책임자로 허쉬에서 일을 시작한 후 남성인 J.P 빌브레이 당시 CEO의 적극적인 여성 인사 영입 전략에 힘입어 핵심 자리인 북미사업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지냈다. 그는 이를 발판으로 2017년 허쉬의 첫 여성 CEO로 부임했다.
벅 CEO는 주요 임원진들과 함께 1년에 5번 꼴로 회사 중요 직책 70개에 대한 평가를 실시한다. 이 자리에 필요한 어떤 업무 능력을 키워야 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성에 상관없이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관행’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승진 인사를 내기 위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벅 CEO는 “허쉬의 미래에는 여성 CEO가 또다시 배출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회사를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재풀을 확보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편 기업 문화 역시 되돌아봐야 할 문제로 지적된다. 경직적인 기업문화에서는 여성들이 승진하는 데 ‘보이지 않는 벽’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이 20만 근로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기업에서는 여성 중견급 직장인 85%가 더 높은 직급을 추구한다고 응답했다. 이는 남성들의 응답률인 87%와 큰 차이가 없다. 이에 비해 그렇지 않은 기업의 경우, 여성 66%만 더 높은 직급을 추구한다고 답했다. 이는 남성들의 응답률인 83%와는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지난 연말과 연초에 걸쳐 한국 기업에서도 여성 임원 발탁 소식이 많이 전해졌다. 그들이 CEO 자리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