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집은 필요없다는 일본의 젊은이들 주소 바꿔가며 사는 ‘아도레스호퍼族’
정욱 기자
입력 : 2019.04.08 14:50:34
수정 : 2019.05.15 15:59:08
도쿄의 기업 소셜미디어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는 스가 다이스케 씨.
회사는 도쿄에 있지만 그가 3월 살고 있는 곳은 사무실에서도 신칸센으로 3시간가량 떨어진 이시가와현 가나자와다. 동해안에 접해 있는 경치 좋은 관광지다.
잠시 휴가를 내고 여행 온 것이 아니다. 한동안 살 계획이다. 장기 휴가를 낸 것도 아니다. 일은 일대로 하지만 사무실에 가지 않는 것뿐이라고 스가 씨는 NHK와의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작은 규모의 회사이긴 하지만 그의 직함은 본부장. 나름 업무가 많지만 필요한 일은 공유사무실에서 메신저와 영상회의, 이메일 등의 정보통신(IT) 서비스를 활용해 처리한다.
가나자와에 사는 친구가 요즘 봄꽃 보기 좋다고 추천하자 바로 짐을 싸서 달려왔다. 이곳에서 지내다 질릴 때쯤 또 다른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외에 정해진 일정은 없다. 유목민처럼 생활하는 것은 돌아갈 집이 이미 없어져서이기도 하다.
그동안 월세로 살던 도쿄 자택은 1월 계약을 해지했다. 이후 유목민 생활을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의 이동을 통해 캐리어 하나로 1개월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나머지 짐들은 도쿄의 한 창고업체의 컨테이너에 맡겨뒀다.
스가 씨와 같은 생활을 하는 ‘아도레스호퍼’들이 늘고 있다. NHK, 니혼게이자이신문, 아사히신문 등 일본 주요언론들도 앞다투어 신인류라며 관련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어드레스(address, 주소)의 일본식 발음인 ‘아도레스’에 캥거루처럼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호퍼(hopper)’를 합해 만든 말이다.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주소를 바꿔가면서 사는 사람을 뜻한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수개월을 주기로 주거지를 지속적으로 바꿔가는 삶이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벌써 이들을 타깃으로 한 전문 부동산 중개 업체나 관련 서비스 업체 등이 생겨나는 등 아도레스호퍼 시장이 형성되고 있을 정도다.
도쿄 미나토구에서 올 3월 문을 연 ‘오요테크놀로지앤드호시피탤리디’(이하 오요)가 대표적인 예다. 인도의 부동산 중개회사의 일본 현지법인이다.
오요의 사무실 풍경은 평범한 부동산 중개회사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이곳은 스가 씨와 같은 ‘아도레스호퍼’에 특화된 부동산 중개업소다.
일본에서 이사를 하기 위해서는 집주인에게 감사의 뜻으로 내는 ‘레이킨(통상 1~2개월분 임대료)’이나 보증금(통상 2~3개월 임대료)은 물론 보증인이 필요하다. 오요에서는 이 같은 조건 등을 모두 없앴다. 또 임대 가능 기간도 최저 1개월부터 월 단위로 선택할 수 있다. 유목민 생활을 하는 아도레스호퍼들의 스타일을 고려해 모든 과정을 스마트폰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회사 카츠세 히로노리 사장은 “아도레스호퍼를 주 타깃으로 하고 있다”며 “방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을 아무런 불편 없이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가전, 가구는 물론 인터넷 등도 모두 준비돼 있다. 임대료에 전기요금, 수도요금 등도 모두 포함돼 있다.
지난해 창업한 카부쿠스타일은 회원제 서비스를 들고 나왔다. 이 회사는 지난 1월 8일 나가사키에 ‘하프’란 이름의 숙박시설 1호점을 열었다.
하프란 이름은 ‘또 하나의 집(home away from home)’을 줄인 말이다. 1층에 카페, 2층에 공유사무실, 3층에 거주 공간을 만들었다. 일반 관광객 대상이 아니다. 아도레스호퍼들에 특화된 숙박시설이다. 매달 8만2000엔(약 82만원)만 내면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 나가사키 외에도 현재 도쿄, 요코하마, 오사카, 후쿠오카 등에서 건설이 진행 중이다. 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와 베트남 하노이에도 건설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 회사는 향후 일본 전역에 100여 개의 하프를 세운다는 계획이다.
시장이 되겠다 싶으니 대기업들도 뛰어들고 있다. 이직관련 사업 등을 주력으로 하는 리쿠르트에서는 ‘듀얼러’란 개념을 들고 나왔다. 도시와 지방을 오가며 사는 삶이다. 4월부터 시작하는 이 서비스를 위해 일단 전국에 11건 정도의 주거공간을 마련했다. 회원은 월 4만엔 정도를 내고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다.
아도레스호퍼들은 주로 1980년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나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Z세대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는 가치관과 함께 이를 가능케 한 기술의 발전 덕분에 확산되고 있다.
클라우드서비스가 있으니 어디서든 인터넷만 있으면 일을 할 수 있다. 사무공간은 공유사무실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 아도레스호퍼를 꿈꾸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들을 위한 서비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옷은 서브스크립션(구독) 서비스로 필요한 만큼 원하는 지역으로 배송시킨다. 서브스크립션 서비스인 덕에 세탁도 필요 없다. 들고 다닐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데는 각종 짐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수요를 노리고 필요한 물건을 보관·배달해주는 서비스도 생겨났다. 최소 하루 단위로 짐을 원하는 곳으로 보내준다.
관련 서비스가 늘어나면서 불편한 부분이 줄자 아도레스호퍼 전향을 선언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곳곳을 돌며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돈을 버는 삶을 살겠다는 사례도 있다.
호핑바 커뮤니티의 지난해 첫 모임 모습. 10명을 예상했으나 30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다. (@addhops 트위터 캡처)
아도레스호퍼끼리의 커뮤니티도 규모가 커지고 있다. 평소에는 다들 원하는 대로 살다가 몇 달에 한 번씩 모여 생활 노하우를 공유하는 식이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에서 해시태그(#) 호핑바(hoppingbar)를 쓰는 일본인 커뮤니티는 지난해 10월 첫 모임을 가졌다. 10명 정도 예상했던 모임에 30여 명이 모여 주최측도 놀랐다.
아도레스호퍼가 느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한몫했다. 젊은 층의 삶은 어느 나라에서나 팍팍한 것이 현실이다.
집을 빌리고 광열비, 수도요금 등을 지불하는 것보다 오히려 저렴한 숙박시설, 공유주택 등을 택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 에어비앤비를 비롯해 다양한 숙박시설이 등장하면서 가격도 세분화되고 있는 것이 주효했다.
인생을 즐기려는 사람만 아도레스호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이 몰리는 시기엔 야근을 밥먹듯 하고 나머지 시간엔 수주에서 수개월간 휴가를 받는 업종들에선 들어가지도 못하는 집을 유지하는 것보다 필요에 따라 지역을 바꿔가면서 사는 것이 더 합리적이란 얘기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주거 불안정이다, 홈리스의 세련된 표현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인생에 한번쯤 이런 시기도 있지 않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젊은 층의 반응을 보면 일본 사회의 우려에도 아도레스호퍼는 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