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이 초대형 입시부정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한국 언론들은 ‘미국판 스카이(SKY) 캐슬’이라며 화제성 뉴스로 다뤘지만 미국 주요 매체들도 앞다퉈 심층 취재에 나설 정도로 파장이 크다.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주로 속해있는 매사추세츠주 연방지방검찰청과 연방수사국(FBI) 공조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자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소수의 부자들이 기여입학제 등을 통해 ‘황금 사다리’를 타고 있다는 것을 미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변호사부터 기업체 전문경영인(CEO), 유명 배우들까지 자녀들을 돈으로 대학에 보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기회의 박탈’이 주는 상실감이 컸다. 이들은 주로 축구, 요트, 테니스, 수구, 배구, 조정 등 스포츠 특기생으로 자녀를 둔갑시켜 명문대에 들여보냈다. 연방공무원 300여 명이 투입된 특별수사의 작전명이 ‘바시티 블루스(Varsity Blues)’였는데 ‘바시티’는 대학 스포츠팀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들 사이에 오간 뒷돈은 2500만달러, 우리 돈으로 약 280억원에 달했다. 학부모들은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뒷돈을 건넸고 세금공제까지 받아냈다. 대학은 단체에서 기부금을 받는 방식이라 학내 감사에서도 쉽게 노출되지 않았다. 이번에 적발된 학부모는 33명, 브로커와 매수된 대학 코치 등은 17명 수준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비리가 몇 배는 될 것이다.
비리에 연루된 대학도 서부 명문 스탠퍼드·UCLA·USC부터 남부의 텍사스, 동부의 예일·조지타운 등에 두루 걸쳐 있었다. 예일은 특히 8개 아이비리그 대학 중에서도 하버드와 쌍벽인 학교다. 비리에 연루된 학부모들은 출연하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거나 회사에서 줄줄이 해고됐다. 비뚤어진 부모 욕심이 자승자박이 됐다.
미 연방수사국(FBI) 조지프 보나보론타 보스턴 지부장이 ‘대입 비리’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한 뒤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입시제도의 구멍을 이용해 부를 쌓은 인물들의 실체도 속속 드러났다. 몸통은 입시 컨설팅의 ‘대가(?)’인 윌리엄 싱어(58)였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뉴포트비치에서 입시 컨설팅 업체를 30년이나 운영해왔다. 주로 대학의 소외 스포츠 종목 코치들을 뇌물로 매수하는 것을 넘어 시험 감독관까지 끌어들여 우리로 치면 수능 격인 SAT와 ACT 부정까지 서슴지 않았다.
행동대원 격인 마크 리델(36)은 플로리다에 있는 대형 입시 컨설팅회사 간부였다. 테니스 특기생으로 하버드대에 진학했던 그는 운동뿐 아니라 시험에도 달인이었던 모양이다. 2011년부터 9년 가까이 매년 ACT와 SAT 대리시험을 봐주면서 회당 1만달러를 받아 챙겼다.
주범 싱어가 그에게 학생 필적을 넘겨주면 미리 치밀하게 연습까지 했다. 시험장 근처 숙소에 머물면서 싱어가 빼돌려온 시험지를 풀고 이를 매수된 감독관에게 슬쩍 넘기는 수법을 주로 썼다. 자신의 입시 컨설팅회사 ‘실적’을 올리려는 생각보다는 돈에 눈이 멀었다고 봐야할 것 같다.
▶기여입학제까지 불똥… 체육특기생 선발방식 바뀔 듯
미국 대입 제도가 어떻길래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 이런 후진적 비리가 횡행했던 것일까. 미국의 대학 입시는 대략 5가지 정도가 있다. ‘얼리 디시전(Early Decision)’은 가고 싶은 대학 한 곳에 10월 말까지 일찌감치 지원하고 합격하면 취소가 불가능하다. ‘얼리 액션(Early Action)’도 비슷하게 수시 전형으로 볼 수 있는데, 11월 초까지 여러 곳에 지원하되 취소가 가능하다는 차이가 있다. 이를 변형한 ‘리스트릭티브 얼리 액션(Restrictive Early Action)’은 한 곳을 지원하되 붙어도 주립대 등에 지원할 수 있는 조건이다.
정시는 ‘레귤러 액션(Regular Action)’으로 불린다. 1월 초에 접수를 마감하며 스무 개 대학까지 동시에 지원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롤링 베이시스(Rolling Basis)’라는 게 있는데 원서 마감 데드라인 없이 정원이 찰 때까지 지원을 받는다.
학생 선발 기준은 대학마다 상이하지만 내신성적(GPA), SAT 및 ACT 성적, 에세이, 추천서 등이 주요 평가항목이다. SAT는 1년에 7번 시험이 있는데 여러 번 응시해 원하는 대학의 기준에 맞출 수 있다. 학생 선발의 전권이 대학에 쥐어져 있다보니 체육특기생 비리같은 허점이 곳곳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스탠퍼드 대학교
미국도 명문대 진학을 위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커리어 관리에 돌입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학생의 특장점을 살려주는 입시 상담사는 물론 에세이를 대리 작성해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이나 버지니아주 맥클린 등에는 대치동식 학원도 성업 중이고, 대학 등록금에 맞먹는 돈이 드는 기숙형 사립고인 ‘보딩 스쿨’도 여전히 인기다.
명문대 입학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은 한미 간에 차이가 없다. 미국의 파워 엘리트 가문이나 부자들에게는 손쉬운 ‘뒷문’도 열려 있다.
미국은 동문 자녀를 우대하는 ‘기여입학제(Legacy Admission)’가 합법화돼 있다. 대개 거액의 기부를 조건으로 정원 외 입학을 허용하는 방식인데 대학들이 재정을 손쉽게 확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평등주의 사고가 강한 한국에선 도입 불가 딱지가 붙었지만 미국은 이 돈을 받아 건물도 짓고 일반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준다는 논리가 통하는 나라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는 사실상 하버드대에 부친이 250만달러(약 28억원)를 기부한 덕에 입학했다. 이번에 적발된 입시 비리는 정식 뒷문이 아니라 불법적으로 옆문을 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기여입학제가 특권층의 대물림을 위해 악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기여입학제 수술까지 기대하긴 무리로 보인다.
미국 대학들은 외양간 고치기에 나서고 있다. 스포츠 특기생 제도가 일단 수술대에 오르는 분위기다. 종목별 코치들이 사실상 전권을 쥐고 있던 관행을 뜯어고친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주요 대학의 입시사정관들이 스포츠 문외한인 경우가 많아 코치들에게 점수를 매길 권한을 대개 위임해왔다고 전했다.
여자축구팀 코치가 비리에 연루된 예일대는 당장 해고 조치와 함께 제도 개선에 착수했다. 연간 158명의 체육 특기생을 선발해온 조지타운대 역시 감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한편에선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을 둘러싼 논란도 진행형이다. 소수 인종을 우대하기 위해 쿼터를 정하는 입시 정책인데 오히려 성적이 우수한 아시아계가 역차별을 받는다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폐지 쪽에 찬성 입장을 나타냈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다. 보스턴 연방법원에 아시아계 학생단체가 낸 소송은 오는 10월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